北 금기어 ‘오빠’

북한 경제가 장기간 침체하면서 남편은 실업자가 되고, 아내가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 ‘낮 전등’ ‘풍경화’ ‘자물쇠’ 등 집에 있는 남편을 가리키는 은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낮에 아무 쓸모도 없는 전등, 하는 일 없이 벽에 걸려만 있는 그림, 집만 지키고 있는 자물쇠와 같다는 의미다. 집에서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뜻하는, 남한의 ‘삼식이’와 같은 표현이다.
▷연애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닮아가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당의 허락을 받아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중매결혼이 대세가 됐고, 지금은 연애결혼이 보편화됐다. 북한 여성들은 지금까지는 애인을 동지나 동무, 남편을 여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애인이나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에 익숙해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북한 당국은 이런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애인이나 남편에 대한 오빠 호칭을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속에 걸리면 처벌까지 한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속속 들어선 장마당 등을 통해 남한의 드라마, 영화, 가요가 북한 주민에게 퍼진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카세트, 비디오테이프에 담겼던 한류 콘텐츠는 이제 CD, DVD를 넘어 USB에 담겨 퍼져 나간다. 밤새 영상을 보는 바람에 퀭해진 눈을 일컫는 은어, ‘너구리 눈’이 생겨났을 정도다. 북한 당국은 그동안 “남조선이 공화국을 모략하려 경제발전상을 꾸며낸 조작 영상을 만든다”는 식으로 한류 콘텐츠 확산을 통제해 왔지만 MZ세대에게 통할 리가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한류에 개방적인 모습을 노출한 적이 있다. 2018년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의 평양 공연을 보고 박수까지 쳤다. 부인 리설주는 그해 평양에 간 한국 특사단 앞에서 김정은을 ‘원수님’이 아닌 ‘남편’이라고 불렀다. 부부 관계가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공개 석상에 나선 이후 북한 거리에서는 팔짱을 낀 연인들의 모습이 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빠와 같은 친숙한 호칭의 사용이 늘어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말은 사람들이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을 반영한다. 북한에서 남한식 표현이 널리 퍼진 것은 남한의 언어와 문화를 의심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을 넘어 의식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 당국이 겉으로 드러나는 주민들의 남한식 말투는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까지 바꾸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황인찬 논설위원, 조선일보(2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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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과 레드벨벳
2002년 4월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가 대통령 특사로 김정일을 만났을 때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이야기가 나오자 김정일은 대뜸 "제주도 노래인 '감수광'을 부른 혜은이가 요새도 노래 많이 부릅니까? 가수 김연자가 다시 공연하러 (평양에) 오는데 내가 특별히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나훈아의 '갈무리' 등 남쪽 노래 6곡을 신청해놨다"고 했다. 이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칭찬하며 옆에 앉은 이명수 인민군 작전국장과 김용순 대남 비서에게 TV 사극 '여인천하'를 몇 편까지 봤느냐고 물었다. 작전국장이 30편, 대남 비서가 29편까지라고 답하자 김정일은 "나는 80편까지 봤다"고 했다. 임 특보는 자서전에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보지 못한) '공동경비구역 JSA' 비디오를 빌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김정일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 생모인 고용희가 김정일과 연애할 때 '벤츠를 타고 밤새도록 남한 노래를 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당시 고용희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등을 직접 불렀다고 한다. 어릴 적 어머니의 남한 노래는 김정은 귀에도 익숙할 가능성이 크다.

▶2일 자 노동신문 1면에는 김정은이 걸그룹 레드벨벳 등 1일 평양 공연한 우리 측 예술단과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김정은은 공연 후 레드벨벳에게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남측에서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 일정을 조정해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공연 당일인 1일 자에선 "자본주의 예술은 썩어빠진 부르주아 생활양식을 유포시킨다"고 했다.
▶김정일 시대나 김정은 시대나 북에서 일반 주민이 남한 노래나 드라마를 접하는 것 자체가 범죄다. 올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비사회주의 요소를 섬멸하라'고 지시한 이후 한류(韓流) 단속이 대폭 강화됐다. 노동신문은 2일 김정은의 공연 관람을 크게 보도하면서도 남한 가수 이름이나 노래 제목은 하나도 밝히지 않았다. 김정은은 레드벨벳을 보고 좋아하는데, 주민들은 그 이름도 알면 안 된다.
▶2003년 평양에서 공연했던 가수 신화는 "당시 파워풀한 댄스곡에도 관객들 호응이 없어 난감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북 관객들은 남한 노래에 맞춰 머리 위로 손을 흔들거나 일부는 따라 부르기도 했다. 체제 모순의 두꺼운 얼음장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는 것인지, 늘 그랬듯 이게 다 쇼인지 알 수 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1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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