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인물'에서 "가장 해로운 정치인"으로]
[마지막 기자회견서도 빛난 메르켈]
'올해의 인물'에서 "가장 해로운 정치인"으로

10년 전 조선일보 베를린 특파원이 수퍼마켓에서 쇼핑 카트를 밀고 있는 독일 메르켈 총리를 만났다. 22년째 단골인 이곳에서 매주 장을 본다고 했다. 장식 없는 의상으로 이름난 메르켈은 이날도 평범한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다. 바뀌지 않는 검소한 패션의 이유를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모델이 아니고 공무원입니다.”
▶그는 인도주의 리더십으로도 유명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등으로 발생한 중동 및 아프리카의 100만 난민은 유럽 전체의 고민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뒷걸음질 칠 때 메르켈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내세워 앞장섰다. 그해에만 난민 90만명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2016년 새해 전야의 쾰른 중앙역 광장. 예년이라면 신년 축하의 환호로 가득했겠지만, 이날 밤은 여성과 노인, 어린이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랍과 북아프리카 남성들이 집단으로 성희롱과 성폭력, 강도 행각을 벌였다. 경찰이 집계한 신고 건수만 1200건을 넘었고, 이 중 성희롱·성폭력이 절반에 육박했다. 용의자 대부분은 난민 신청자·불법 체류자였다. 지금 독일은 난민으로 고통받는 대표적 나라다.
▶미국과 동유럽이 강력히 반대했던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건설을 강행한 것도 메르켈이었다. 러시아 천연가스를 독일까지 직접 수송하는 이 가스관은 추진 당시부터 우려가 컸다. 유럽의 대러시아 에너지 종속이 심화돼 러시아가 이 파이프라인을 정치적 무기로 삼을 거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탈원전으로 에너지가 부족했던 독일의 메르켈은 ‘실용주의’를 내세워 가스관 건설을 강행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려와 경고는 현실이 됐다.
▶엊그제 폴란드 전 총리가 메르켈을 “유럽에 가장 해로운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퇴임 후 조용하던 메르켈이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폴란드와 발트 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때문이라는 취지로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푸틴과 대화로 해결하려 했는데, 이 국가들이 협상 자체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해당 국가 정상들도 “생각이 없는 말” “푸틴의 선의?”라며 혀를 찼다. 메르켈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일까. 정치에서 이 말은 옳지 않은 듯하다.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더 와닿는다. 그때 메르켈은 자신의 선의로 상대의 선의를 믿고 전략적 오판을 했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지옥이 됐고 온 유럽이 불안에 떨고 있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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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여러분 고마워요, 기자회견은 늘 즐거움이었어요”

22일 열린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연방기자협회(BPK) 초청 기자회견. 명패가 '메르켈 박사(Dr. Merkel)'라고 돼 있다./EPA 연합뉴스
22일(현지 시각) 독일 수도 베를린의 연방기자협회(BPK) 강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한 기자가 “오는 9월 26일 오후 6시에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다. 자신의 후임 총리를 정하는 총선일 저녁에 무엇을 할 예정이냐는 질문이었다.
메르켈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아직 생각 못 해봤네요. 아마도 나한테 소중한 정당과 관련된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총선이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데다, 이날은 정당 대표가 아니라 독일의 국정 책임자로서 기자회견장에 섰다는 점을 고려해 일부러 여당인 기독민주당(이하 기민당)의 당명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메르켈은 “제가 그 당의 당원입니다”라고 했다.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메르켈의 지난 16년간 모습-2005년 집권 후 4선(選)에 성공하며 16년간 재임한 앙겔라 메르켈(67) 독일 총리가 2006년부터 올해까지 연방기자협회(BPK) 기자회견에서 발언할 때 모습을 담은 사진 16장을 한 곳에 모았다. 이날 재임 중 마지막으로 회견을 가진 메르켈은 80분 동안 원고 없이 기자들과 질의 응답을 주고받았다. /DPA AP 연합뉴스
메르켈은 이날 독일의 대표적인 언론인 단체인 BPK 초청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1949년 출범한 BPK는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총리를 초청해 국정 현안은 물론이고 총리의 개인사까지 질문을 쏟아낸다. 이날 메르켈은 지난주 독일 서부에서 발생한 홍수 피해와 백신 접종에 대해 13분에 걸쳐 모두 발언을 한 후 80분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질문에 답했다. 늘 그랬듯이 메르켈은 준비된 원고가 없었다. 메르켈의 BPK 기자회견은 2005년 총리 취임 이후 이날이 29번째였으며,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독일 언론들이 집중 조명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메르켈의 개인적인 영역을 건드리는 질문이 나왔다. 어떤 기자가 “당신 인생에서 동독 출신이라는 게 여전히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메르켈은 “뿌리 없는 미래는 없다”며 “(어린 시절 동독에서 자란 것은) 당시 무슨 일들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해줬기 때문에 좋은 정치적 커리어를 갖기 위한 바탕이 됐다”고 받았다.

기자회견 도중 웃고 있는 메르켈 총리/EPA 연합뉴스
메르켈은 동독에서 공부하던 시기를 회상하며 “나는 과학자”라고 했다. 그는 정확하게 현안을 바라보자고 강조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쓴다. 메르켈은 1986년 동독 시절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그가 앉은 자리 앞에는 ‘메르켈 박사(Dr. Merkel)’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과학자답게 그는 숫자를 정확하게 제시하려 애썼다. 홍수 높이를 설명하다가 “8.8m”라고 말한 메르켈은 곧바로 “8.87m”로 정정했다. 그는 “국가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GDP(국내총생산)의 3.5%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소수점 단위의 숫자를 그는 술술 이야기했다.
메르켈은 공격적인 표현을 자제하며 포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그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 캠페인을 세번 언급했지만 한번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을 실행에 옮겨달라며 금요일마다 학교에 결석하는 캠페인으로서, 다소 급진적인 환경운동으로 평가된다. 여당인 기민당의 우파 정치인들은 이 캠페인에 대해 지나치다며 자주 비난하지만 메르켈은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자기편을 과도하게 감싸지 않았다. 이날 기자들은 기민당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에 대해 기후변화 정책을 놓고 우왕좌왕하고 홍수 피해에 적절히 대비하지도 못했다며 맹공을 가했다. 라셰트는 홍수로 직격탄을 맞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주지사다.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메르켈이 라셰트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셰트를 적극 방어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국정 현안을 놓고 쏟아지는 질문을 메르켈은 막힘없이 설명했다. 기후변화 대책, 러시아와의 천연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를 둘러싼 논란,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메르켈은 93분에 걸친 회견을 마치면서 “언론인 여러분 고맙다. (BPK 기자회견에 참가한 것은) 나에게는 즐거움이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조선일보(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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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 메르켈 총리 마지막 기자회견서도 질문 공세에 원고 없이 80분간 답변. 부러우면 지는 건데, 그래도 부럽다.
-팔면봉, 조선일보(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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