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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자존감을 각성하라!] [日과 유치한 자존심 싸움.. ]

뚝섬 2023. 3. 8. 07:47

[대한민국의 자존감을 각성하라!]

[세계가 삼성 폰으로 K팝 듣는 시대… 日과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대한민국의 자존감을 각성하라!

 

[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대한민국은 결코 ‘엽전’이 아니다
문제는 ‘돈’ 아닌 ‘자존감’에 있다!

 

# 1548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소쇄원 주인 양산보(梁山甫·1503∼1557)에게 보낸 한시 한 편이 전한다. ‘무신(1548)년 정월 보름날 소쇄원에 드리다(戊申上元奉寄瀟灑園)’라는 제목의 시인데 내용인즉 이러하다. “소쇄원에는 소쇄옹이 있어(瀟灑園中瀟灑翁)/ 한 해 농사를 동풍에 점쳐보네(一年春事占東風)/ 매화 소식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나(梅花消息渾依舊)/ 묻노니 인심 또한 그대로인지(爲問人心同不同).” 하서 김인후는 퇴계 이황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가르쳤던 이다. 하지만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한 올곧은 인물이다. 훗날 정조 때에 이르러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와 더불어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사람이 그이다. 대원군이 그의 고향 장성을 가리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즉 학문으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고 말한 까닭도 그로부터 연유한다.

 

# 하서가 그의 사돈인 양산보에게 보낸 이 한시를 작금의 풍류로 변용시켜 읊어보자면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용산원에는 석열옹 있어/ 한 해 국정을 동풍에 점쳐보네/ 매화 소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나/ 묻노니 민심 또한 그대로인가.” 여기서 동풍(東風)이라 함은 지난 삼일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한일 파트너십’에 기반한 새바람이다. 허나 거스르기 힘든 바닥 민심은 돈(배상금)은 그렇다 쳐도 마음만큼은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재차 확인하고 또 확약하는 뭔가가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 하서 김인후가 양산보에게 한시를 지어 보낼 그즈음(1548년) 독일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모리츠(Moritz von Sachsen)는 자신의 영지 내에 있던 드레스덴에 궁정악단을 만들었다. 475년 전의 일이다. 이것이 독일 클래식의 오래된 자존감이라 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모태다. 지난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이 있었다. 1953년생인 정명훈은 약관의 나이를 갓 넘긴 21세였던 1974년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들어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하며 일약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사실상의 우승자나 다름없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도쿄를 거쳐 김포로 들어와 서울 시내까지 축하 카퍼레이드를 벌인 당사자가 됐다. 당시는 냉전 시대였고 유신 독재하에서 경제개발의 발동이 걸려 있긴 했지만 여전히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이가 당시 냉전 체제하에서 우두머리 적성 국가였던 소련 모스크바에 들어가 피아노 콩쿠르에서 쾌거를 이뤘다는 사실만으로 자존감에 온 국민이 감격했던 때가 바로 그 시절이다. 그런 그가 70세 고희(古稀)의 나이에 지난 2012~13시즌부터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해 오고 있는 세계 최정상의 자존감 높은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끌고 대한민국 서울 예술의 전당 포디엄에 선 것이다.

 

# 그런가 하면, 피아노 앞에 앉은 조성진은 2015년 그 역시 스물한 살 나이에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로 자타가 인정하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클래식계의 아이돌이다. 이후 더 깊어지고 성숙한 모습으로 그날의 협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약 40년 간격의 한 세대를 이어가며 고희의 아버지뻘인 정명훈과 서른 살을 눈앞에 둔 아들뻘의 조성진이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를 조율하고 협연하는 모습은, 한 세대의 세월 만에 클래식 불모지에서 클래식 최정상의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을 상징하는, 한 컷의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삽화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 문화적 자존감의 강력한 낙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주가 시작도 되기 전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이 협연되는 내내 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으리라. 예술의 전당 전석을 입추의 여지 없이 꽉 채운 3000여 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슈타츠카펠레 단원들마저 그러했다. 1악장 후반부에 피아니스트 홀로 독주하는 부분에서 슈타츠카펠레의 전 단원들을 살펴보니 잠시 쉬는 것이 아니라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에 넋을 잃은 듯 빠져드는 모습이 아니던가. 그만큼 조성진의 연주력은 사람을 몰입시킨다.

 

# 나는 조성진이 예원을 다니던 중학생 시절 그를 처음 봤다. 서초동의 모차르트홀에서 신수정 전 서울음대 학장과 단둘이 객석에 앉아 그의 연주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소 통통하고 앳된 중학생의 연주가 나를 ‘몰입’시켰다. 내가 음악을 잘 알아서가 아니었다. 쇼팽의 스케르초로 기억되는 곡을 그가 연주할 때 내 몸이 점점 그에게로 기울었던 솔직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 몰입의 힘이 조성진의 힘이었다. 그 힘이 점점 자라 이제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운집한 3000여 관중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청중을 몰입시키고 있다. 물론 조성진의 몰입력은 그 개인에게 그치지 않는다. 후배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위시해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코리안 클래식의 놀라운 질주로 이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 모두가 공감하듯이 대한민국의 문화력은 가히 세계 최정상 수준이다. 영화 등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클래식 같은 고급 문화에서도 예외 없이 그러하다. 그만큼 우리는 자존감 있는 나라가 되었다. 반세기 전 아니 십 수년여 전까지도 ‘엽전’이 별수 있고, ‘조센진’이 오죽하랴 하는 식의 자기 비하가 일상어였던 나라가 이제는 “대한민국이, 코리아가 하면 다르다”는 자타 공인의 상찬의 말로 바뀌지 않았는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부터 독립해 70여 년이 되어갈 무렵 랠프 월도 에머슨은 자신의 에세이 ‘자연’에서 ‘마투티나 코그니티오(matutina cognitio)’라는 라틴어를 이야기한다. ‘이른 아침의 각성’이란 뜻으로, 어둠이 가시며 날이 채 밝기 전 새벽녘 샛별 같은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작금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되살리려면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대통령을 위시한 위정자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조선일보(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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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삼성 폰으로 K팝 듣는 시대… 日과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노정태의 시사哲]
도쿄올림픽 2020에 듣는 ‘수궁가’와 ‘범 내려온다’
 

 

용왕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기 위해 자라는 뭍으로 올라왔다. 멋진 경치를 쓱 둘러본 자라 눈에 육지 짐승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윗자리에 앉아야 마땅한지 상좌(上座)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옳거니, 저기 가면 토끼가 있겠거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털이 북슬북슬한 짐승 쪽으로 말을 붙여 보았다. “토생원 아니시오?”

 

먼 바닷길을 헤엄쳐 오느라 힘들었던 자라의 입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호생원 아니시오?”라고 내뱉고 만 것이다. 산에서 가장 힘센 짐승이지만 남이 자신을 ‘생원’이라고 높여 부르는 일 따위는 영 없어서 서운했던 호랑이,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자라를 향해 달려갔다. 자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도망갈 틈이 없다. 엇모리장단에 맞춰 소리꾼이 목청을 뽐낼 차례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퍽 친숙하게 들린다면, 그렇다. 밴드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가 바로 이 대목을 따서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작한 것이다. 마치 판소리의 한 대목이 ‘힙’한 유행가로 탈바꿈했듯, 우리는 이 옛이야기 한 토막 속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이라는 오늘날 키워드를 찾아볼 수 있다. 호랑이는 자존심을 앞세워 우쭐대다 큰코다친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굽히고 자존감을 되찾아 힘센 상대를 이겨내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린다. 그 ‘무언가’ 중에는 당연히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나는 소중한 사람인가? 고귀한 존재인가?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와 같이 다양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답을 제시하는데,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아 존중감(self-esteem)’이라고 부른다. 그 개념이 일상적 대화와 심리 상담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자존감’이라는 약칭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은 자존심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취급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무관하게 나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긍정적 가치를 자존감이라고 하는 반면, 타인과 경쟁하거나 서로 평가하면서 얻는 자기만족 등을 자존심이라 부르는 화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심리학 용어가 대중적으로 정착되면서 학술적 의미를 넘어 그 나름의 용례를 갖게 된 셈이다.

 

이와 같이 자존감과 자존심을 대립시킨다면 자존감은 자존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긍정하라’는 말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존감과 자존심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키워야 하는 양자택일 관계가 아니다. 자존심을 적절히 채우거나 필요한 시점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자존감을 기르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다시 수궁가의 그 대목으로 돌아가 보자.

 

호랑이는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존심만 강한 캐릭터다. 동물들은 누가 더 어르신이고 윗자리에 앉아 대접받아야 하는지 논쟁을 벌인다. 내 나이가 더 많다며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다툰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대본에서 호랑이 역시 그 틈에 껴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 높은 대접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라가 실수로 ‘호생원’이라고 불렀을 때 호랑이는 그 말이 너무도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갔다.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버렸다. 호랑이가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자 “나는 자라가 아니라 두꺼비”라고 둘러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죽기 살기로 싸워봐야 할 때. 여기서 ‘수국 전옥주부공신(典獄主簿功臣) 사대손 별주부’라는 자라의 자존심은 자존감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준다. 목을 쭉 빼서 내밀고 호랑이의 가랑이 사이 ‘밑 주머니'를 물어뜯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21년 7월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선진국이다. 국제사회라는 동물 모임 중에서도 그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에 걸맞은 국가적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말초적 자존심 싸움에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일본을 상대로 한 자존심 싸움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곤 한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습니다” “쇠퇴하는 일본 ‘선진국’ 격상 대한민국”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같은 문구를 떠올려보자. 중학생, 아니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이렇게 유치하게 자존심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한민국의 공식 채널에서 튀어나온다. 정말이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갓 개막한 도쿄올림픽을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이다. 코로나로 한 해 미뤄지고 지금도 확진자가 나오는 어려운 여건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의 올림픽 운영은 퍽 미숙해 보인다. 손기정 선수를 굳이 ‘일본 금메달리스트’라 표기하고, 일본 자위대 깃발인 욱일기를 대회장에서 사용하겠다고 고집하는 등, 논란을 자초하는 모습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손뼉도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올림픽은 전 세계 모든 나라와 함께하는 평화와 우정의 한마당이다. 그걸 마치 전쟁이라도 되는 양 일본과 벌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끌어내리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어른스럽지 않다. 한반도 모습을 한 호랑이 그림과 함께 ‘범 내려온다’고 써서 내건 것도 마찬가지다. 수궁가의 원래 맥락을 떠올려보면 이건 코미디다. 그 호랑이는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자라를 상대로 자존심을 찾다가 망신만 호되게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21세기의 20여 년간 일본을 상대로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한때는 한국 청소년들이 소니 워크맨으로 J팝을 듣고 자랐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삼성전자 스마트폰으로 K팝을 듣고 있다. 우리의 자존심은 새로운 시대의 자존감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마땅하다.

 

‘범 내려온다’는 산에서 내려온 허세 가득한 호랑이를 위한 노래가 아니다. 바다에서 올라와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을 찾은 자라 이야기다. 흥겨운 가락을 흥얼거리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파이팅을 외쳐본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조선일보(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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