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진보를 갈망한다]
[진보 모독하는 저질 좌파… 어떻게 생겨나 어디로 가나]
[어느 ‘新대깨문’의 일기]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진보를 갈망한다
[朝鮮칼럼]
진보 바꿀 세 번의 기회…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2008 노무현 실패, 2022 이재명 패배
바뀌어야 할 때 못 바뀌어 오늘날 이 꼴이 났다
‘무오류’라는 착각 포기하고 대한민국 성공 역사 인정하는 올바른 진보로 거듭나야
한국 진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진보 진영의 정당은 물론 노조, 시민 단체, 종교 단체가 모두 심각한 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은 목하 검은돈의 광풍에 휩싸였다. 입법 폭주는 국가 근간을 흔들고 있다. 민노총 전직 간부 4명은 김정은 총회장님의 영업1부 노릇을 하는 간첩이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참여연대는 조국 사태에 침묵했다. 이를 비판한 김경률 회계사는 징계위에 회부됐다.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기도했다. 모두 진보의 도덕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례다.
이런 위기가 뚜렷이 가시화된 계기는 조국 사태였다. “조국은 내로남불의 상징이다. 진보 이미지는 오염될 대로 오염돼 버렸다.” “평등 가치를 실현하기는커녕 불평등에 안주하거나 심화하는 데 일조하는 그런 진보”가 되었다(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하지만 진정한 위기의 징표는 이재명 대표다. 그는 사실 진보라기보다 생계형 정치가다. 대장동 개발 사업을 둘러싼 혐의는 상상 이상이다. 염치도 없다. 대선 패배 후 자숙 기간도 없이 곧바로 보궐선거, 당대표 선거에 나섰다. 결국 민주당은 방탄 국회의 볼모로 잡혔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77.8%라는 압도적 지지로 그를 당대표에 선출했다. 자멸의 길이지만, 의원들은 공천권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당내의 진보 역량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방증이다.
진보가 왜 이렇게 깊이 부패했나. 바뀌어야 할 때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세 차례 기회가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2008년 노무현 정부가 실패로 끝났을 때, 그리고 2022년 20대 대선에 패배했을 때이다. 첫 번째는 이념, 두세 번째는 통치 능력이 문제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진보 이념이 뿌리째 흔들렸다. 1980년대 이후 진보 세력의 이념은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인류의 재난임이 드러났다. 당황한 좌파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성공 사례는 여전히 없다. 1987년 민주화, 1988년 서울올림픽, 1989년 탈냉전은 좌파 이념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지만, 한국 진보는 바뀌지 않았다.
1997년 외환 위기가 진보 세력을 되살렸다. 대한민국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집권한 DJ는 진보 운동권을 대거 영입했다. 외환 위기와 세계화로 불평등이 확대되자 진보의 가치도 부활했다. 노무현 정부 때 진보 운동권은 최초로 국가를 장악했다. 그러나 국정 운영에 실패해 폐족으로 떨어졌다. 이때가 두 번째 변화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 대신 광우병 파동을 일으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로 진보는 극적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성공함으로써 재집권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역시 국정 운영에 실패해, 5년 만에 정권을 잃었다. 이때가 세 번째 변화의 기회였다.
그런데 진보의 진정한 실패는 대한민국이 계속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게 진보의 기본 인식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 시대 때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친 노론 세력이 일제 때 친일 세력이 되고, 해방 후에는 반공이라는 탈을 쓴 독재 세력이 되었다”고 본다(’대한민국이 묻는다’). 대한민국은 노론, 친일파, 반공 독재 세력의 귀태에서 잉태된 나라다. “그래서 제가 지금 ‘대청소’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적폐 사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곧 G8이 될 성공한 나라다. 요컨대 진보의 인식이 틀렸다. 하지만 진보 세력은 그들의 ‘이론’은 무오류이며, 논리적·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확신한다. ‘현실’이 틀린 것이다. 바뀌어야 할 것은 현실이지 이론이 아니다.
이렇게 도착된 인식은 두 개의 악덕, 즉 무능과 위선을 낳는다.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국정 운영에 거듭 실패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한편 실패를 부인하고 정당화하려니, 위선이 불가피하다. 통계 수치 조작, 유체 이탈 화법, 쇼 중독은 위선의 다양한 형태다. 그러나 정신 깊은 곳조차 속일 수 없다. 그 정신적 어둠이 도덕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것이다. 진보도 자신의 위선에 지쳤다. 그래서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냐”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양이원영)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한국 진보에게는 무오류라는 ‘신의 관점’을 포기할 ‘인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상은 현실을 개조하지만, 현실도 이상을 개조한다. 이걸 인정하면, 세속주의와 실용주의가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성공도 받아들일 수 있고,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진보를 갈망한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조선일보(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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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모독하는 저질 좌파… 어떻게 생겨나 어디로 가나
[이기홍 칼럼]
‘쥴리 벽화’까지 치달은 저질 행태 비롯해 이념과 정치에 마취돼 저지르는 폭력들
진정한 자기희생 없이 민중·진보 내세워온 文정권 구성원들 속성과 국정 독주가 잉태

지난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를 봤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 고립된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필사의 탈출을 하는 스토리다. 영화에는 무장세력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힘자랑을 해대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했다. 광기와 폭력성의 극치를 보다 보니 크메르루주, 중국 홍위병, 6·25전쟁 당시 완장들의 행태가 연상됐다. 이념의 이름으로 야만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현대사에서 낯선 장면이 아니다.
극장을 나와 뉴스를 검색하니 ‘쥴리 벽화’ 소식이 줄을 이었다. 쥴리 벽화도 적(敵)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야만성의 산물이다. 과거엔 좌든 우든 금도는 있었다. 과거 선거 때도 후보 배우자를 놓고 누구와 동거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돌았지만, 그건 하수도에 해당되는 ‘찌라시’의 세계에 국한됐다.
그러나 요즘 일부 세력에겐 금도가 없다. 그 결과 하수도가 상수도로 역류해 범람한다. 가짜뉴스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부터 천착해야 하는데,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는 여당은 유튜브와 1인 미디어는 적용 대상에서 슬그머니 빼버렸다. 한국의 권력 주변 좌파집단은 어쩌다 이렇게 저질로 전락한 것일까.
첫째, 친문세력 내 운동권 출신들은 진정한 진보 가치의 맥을 이어온 주역이라 보기 어렵다. 80년대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독재정권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따듯한 마음의 청년들이었다. 그중에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무명으로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말기 학생운동의 실질적 지휘부는 구국학생연맹 같은 지하조직이었다. 구학련 총책이었던 서울대생 김영환은 수년 후인 90년대 초 북한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주체사상의 몽상에서 깨어나며 북한인권 운동가로 거듭 태어났다. 반면 현재 학생운동권 출신의 대표처럼 인식된 정치인 중 상당수는 총학생회 같은 공개조직에서 활동하다 투옥 생활을 겪은 뒤 상당수는 군 면제를 받고 현실 정치인의 휘하로 들어갔다.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이는 송영길 대표 등 소수에 불과하다. 조국 교수에 대해선 김영환은 “운동권 축에도 못 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아랫세대인 40대 좌파 인사들은 반독재투쟁이나 노동현장은 거치지 않은 세대다. 그들에게 진보 활동은 자기희생이나 헌신과 직결된 게 아니다. 기득권을 내놓는 손해를 볼 필요도 없이, 일상에선 기득권층으로서의 특혜는 다 누리면서 공개적으로는 약자의 대변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꿩 먹고 알 먹기다. 이런 이들의 상당수는 신독(愼獨), 가난한 이웃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오는 검소함과 절제 등 과거 진정한 진보인사들이 실천했던 생활 특성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암울했던 시절 기득권을 버린 채 헌신했고, 그 대가로 어떤 권력이나 명예, 보상도 바라지 않았던 사람들의 열정과 겸손을 알기나 할까.
저들이 저열해진 두 번째 원인은 문 정권의 행태다. 반대론을 설득하고 내용을 보완하는 과정 없이 독주하다 보니 반대론자들이 승복하지 못하는 대립 구조가 고착됐다. ‘의로운 목적’을 위해선 절차와 수단의 정당성은 양보할 수 있다‘는 운동권적 사고(思考)의 발현이다. 그 결과 정권을 증오하며 정권교체가 필생의 소원인 국민이 늘어나고, 여기에 맞서 정권 지지자들은 부족전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원시인들처럼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악순환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을 진보는커녕 좌파라 부르는 것도 적절치 않다. 좌든 우든 가치관을 지향한다면 제도와 질서의 불합리한 것들을 유불리와 상관없이 고쳐야 하는데 정반대다.
단적인 예로 나팔수 방송, 검찰권 남용, 코드 낙하산 인사 같은 구시대의 폐습들은 이 정부 들어 더 적극 활용됐다. 그러다 나중에 그 칼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으면 뒤늦게 개혁을 부르짖는데 대표적인 예가 검찰개혁이다. 이들의 머릿속엔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돈과 선전선동술을 잘만 활용하면 권력을 영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각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환각이 온갖 무리수로 발현되고 있으며 강도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민도가 낮은 제3세계와 달리 시민층이 두텁게 발달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궤도를 이탈한 권력은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차벨스(괴벨스+차베스)‘의 할아버지가 나선다 해도 성숙한 민의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평화적·단계적 진화‘가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단절 없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진화론의 새로운 이론인 단속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Punctuated Equilibrium)처럼 각 단계마다 마침표를 찍듯이, 정권마다 격렬한 단절과 부정(否定)이 이뤄지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결과 광신적 지지·반대 집단이 더 양산되고, 심리적 내전이 지속될 것 같아 안타깝다.
-이기홍 대기자, 조선일보(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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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新대깨문’의 일기
[논객 조은산의 시선]
(※이 글은 지은이의 시각이 아닌, 각종 커뮤니티 게시글, 언론 기사 댓글들의 내용 등을 토대로 재편성한 풍자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나는 대깨문이다. 내가 언제부터 대깨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본디 나는 귀가 얇고 심장이 약해 길거리에서도 온갖 종교인들에게 끌려갔다가 겨우 빠져나오길 반복했는데, 이만한 종교가 따로 없을 것 같기도 하니 사실 잘된 일이기도 하다.

한때 이런 글이 떠돈 적이 있다. 이른바 ‘대깨문의 일기’라 불리는 이 글은 짧고도 명쾌하게 대깨문의 실상을 까발리므로 심장이 꽤나 아픈 것이다. 먼저 읽어보도록 하자.
‘서울 서대문구에서 전세를 살던 대깨문 김모씨는 종부세 인상 뉴스에 투기꾼 놈들 잘됐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5개월 후 전셋집 재계약 날 월세 200만원을 내라는 집주인 말에 영문도 모르고 경기도로 쫓겨나게 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빨간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그의 이어폰에선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흐르고 있다.’
마치 대깨문의 일상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듯, 뛰어난 묘사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한 가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속에 저자의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 글을 통해 저자 내면에 형상화된 빈자의 단편적 모습을 정치와 결부시킴으로써, 진보적 세계관의 허구성을 까발리려는 심보겠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부자다.
내가 사는 서울의 아파트는 얼마 전, 20억원을 가뿐히 돌파하고 말았다. 해놓은 짓이라고는 지난 총선 이후, ‘민주당이 득세했으니 집값이 더 오를 것이여. 자네도 얼른 하나 사놔’라는 지인의 권유에 전세에서 자가로 갈아탄 것뿐인데, 어느 순간 20억대 자산가 대열에 합류하게 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러니 내가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민주당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집도 못 사고 일순간 벼락 거지가 된 부류들도 있는데, 놀라운 건 이들 역시 꽤 많은 수가 대깨문이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깨문에도 급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최하급 대깨문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더욱 효과적인, 부동산 양극화의 희생양이자 정치적 제물로서 그들의 앞날은 자명하다. 여론조사 그래프를 통해 표출되는 여권의 푸른 막대기, 그 안의 작은 나노미터급 화소 하나가 되기 위해 그들은 표와 혼을 바칠 것이다.
직장 다니며 월급 받아 봐야 얼마나 가겠느냐고, 너도 얼른 가게 하나 내서 사장님 소리 들어보라던 동창 녀석이 어제 죽었다. 최저 시급에 못 이겨 직원들을 다 내보내더니, 제 마누라와 자식들까지 동원해 가게를 지키다가 코로나로 인한 집합 금지 탓에 제 목에 그걸 감았다. 퇴직 전날까지 매 오던 그 파란 넥타이를. 장례식장에 들러 육개장 한 그릇을 얻어먹은 나는 그 길로 외제차 전시장에 들려 벤츠를 계약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을 말하고, 촛불을 말하고, 서민을 말하는 정치인을 비로소 신봉한다. 차별화를 꿈꾸며 남들보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집, 차, 범접할 수 없는 부의 향연을 가능케 해준 그들의 이중성과 모순성에 무한히 감사하다. 누군가가 말한 ‘사람 사는 세상’이 뭔지 이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사는 세상, 못사는 ‘것’들은 더 못사는 세상이었다. 그래. 내가 ‘사람’이었다.
출근길에 잡념이 길었다.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 동지들은 머리띠를 두른 채, 오늘도 파업에 열중이다. 뒤늦게 밝히지만 나는 귀족 노조다. 공무원을 능가하는 정년이 보장되고 평균 연봉은 1억을 상회하는, 게다가 근무 중 유튜브 시청이 가능하며 그것을 빌미로 노동자의 권리와 전태일의 영혼을 소환할 자격을 갖춘 신지배 계층이 바로 나인 것이다.
회사 정문에 위태롭게 선 용역업체 소속 경비원이 사원증 제시를 요구한다. 그도 대깨문이다. 헛것이나 바라는 비정규직, 감히 전태일의 후예를 가로막다니. 노동자에게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저것은 아마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다. 이윽고 사원증을 확인한 경비원이 버튼을 눌러 차단기를 올린다. 사이드미러 속에 멋들어지게 경례를 올려붙이는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 이내 사라지고 만다.
주차를 마친 나는 차 시동을 끈다. 시계를 본다. 한 시간 정도의 가벼운 지각은 사 측도 함부로 문제 삼지 못할 것이다. 최고급 나파 가죽 시트를 젖힌다. 라디오를 켠다. 벤츠의 부메스터 사운드 시스템으로 듣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언제나 훌륭하다. 오늘 게스트는 대선에 출마하는 전 법무장관이라고 하니, 5.1채널 서라운드 스피커로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나 감상해야겠다. 오프닝 멘트가 올랐다. 그녀가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 사는 세상…
촛불 정신을 받들어…
서민이 잘사는 나라를…
음… 아… 좋다.
-논객 조은산 '시무7조' 청원 필자, 조선일보(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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