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천재’라는 말 뒤에 가려진 모차르트] ....

뚝섬 2026. 1. 20. 09:37

[천재’라는 말 뒤에 가려진 모차르트]

[덴마크 외교관이 모차르트 전기작가 된 사연은] 

[아내의 前남편 모차르트를 위해 생애를 바친 남자]

 

 

 

천재’라는 말 뒤에 가려진 모차르트

 

올해는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탄생 270주년이다. 모차르트를 떠올릴 때 우리는 너무 빨리 한 단어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천재.’

세 살에 이미 작곡을 했고, 다섯 살에 유럽을 순회한 모차르트. 그가 신이 내려준 재능을 평생 낭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 서사는 너무나 익숙해서, 더 이상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천재라는 단어 하나면 모든 설명이 끝난다. 그의 음악이 왜 그렇게 들리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갈망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 천재라는 말은 이해의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이다. 감탄만 남기고, 해석은 생략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의 음악 앞에서 놀라워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비되는 순간, 모차르트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음악가가 아니라, 음악사 교과서 속에 고정된 이미지가 된다. 인간으로서의 시간, 선택, 흔들림은 지워지고, 오직 성공한 결과만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차르트를 너무 빨리 정의해버린 대가로, 그가 실제로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모차르트를 가장 멀리서 바라보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모차르트의 탄생 270주년을 맞는 지금, 모차르트를 다시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를 더 높이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땅으로 내려놓기 위해서다.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외로웠고, 때로는 미완성으로 멈춰 서야 했던 인간 모차르트를 만나는 것. 이 기념해가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모차르트를 더 높이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읽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차르트가 남긴 편지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작곡가의 얼굴은 자주 흐트러진다. 특히 누나와 주고받은 편지에는 음악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 감정들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누나에게 장난스럽고 유치한 말들을 쏟아내다가도, 어느 순간엔 공연이 잘 풀리지 않는 불안을 털어놓고, 자신의 음악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한다. 천재의 모습이라기보다, 먹고사는 예술가의 모습에 가깝다.

이 편지들 속의 모차르트는 늘 흔들린다.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빈에서 누릴 수 있었던 예술적 자유와 당장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균형을 잃는다. 사랑을 선택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선택이 불러올 책임을 두려워했고, 독립을 꿈꾸면서도 보호받던 시절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편지의 문장들에는 자신감과 불안이 뒤섞여 있고, 확신에 찬 말 뒤에는 곧바로 자기 의심이 따라붙는다.

우리는 종종 그를 너무 일찍 완성된 존재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이미 모든 것을 성취했고, 이후의 삶은 그 재능을 반복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편지 속의 모차르트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간 인물에 가깝다. 어느 도시에 속해야 하는지, 어떤 음악을 써야 하는지,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늘 질문했다.

이 인간적인 흔들림은 음악 안에서도 분명하게 들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상곡 d단조 K.397이다. 이 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낯설다. 형식은 불안정하고, 생각은 도중에 끊기며, 결말조차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듣는 밝은 종결부조차 모차르트의 손을 떠난 뒤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에서 모차르트는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확신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멈추고, 머뭇거리고, 다시 말을 꺼낸다. 마치 피아노 앞에서 혼잣말하듯,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그대로 흘려보낸다. 이것은 신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독백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런 순간에야 비로소 모차르트와 같은 높이에 서게 된다.

모차르트를 천재로만 기억하는 것은 안전하다. 감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모차르트를 마주하는 일은 다르다. 그에게서 불안을 발견하고, 미완성을 듣고,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견뎌야 한다. 그 대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음악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270주년은 모차르트를 다시 생각할 기회다. 하늘에서 떨어진 신동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모차르트. 그를 그렇게 다시 듣는 순간, 모차르트의 음악이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 곁에서 함께 걷는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된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동아일보(2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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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외교관이 모차르트 전기작가 된 사연은

 

[유윤종의 클래식感]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 콘스탄체의 새 남편이 되어 모차르트의 삶을 연구한 덴마크 외교관 니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이 1797년 하숙을 옮겼을 때 그는 36세의 오스트리아 주재 덴마크 대사 대리였고 4년째 빈에서 일하고 있었다. 새 하숙집에는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과부 여주인과 두 아들이 있었다. 한 해가 지나 니센 대사는 하숙생 생활을 면하게 된다. 두 아이의 ‘아빠’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의 파트너는 7년 전 남편을 잃은 뒤 하숙업 외에 전남편의 유품을 팔며 생계를 잇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니센은 음악적 안목이 상당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유품 판매의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남겨둘 것이며 어떻게 협상할 것인지를 그는 주의 깊게 판단했다. 함께 살게 된 사람은 콘스탄체 모차르트였고 그가 판매한 주요 유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쓴 악보와 그 저작권이었다. 기록은 그가 두 사내아이의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전한다. 두 아이는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초기의 선생님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음악계의 큰 존재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1809년, 동거 11년 만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3년 뒤 니센의 대사 임기가 끝나자 코펜하겐으로 이사해 8년을 살았다. 니센이 공직에서 은퇴하면서 두 사람은 새 거처를 모색했다. 니센의 고향인 유틀란트반도일까? 콘스탄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독일 만하임? 두 사람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모차르트의 전기를 쓴다는 계획이었다.

부부는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을 찾아갔다. 난네를은 모차르트와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 수백 통을 건넸다. 그 밖에도 니센은 모차르트를 알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가장 중요한 인터뷰 대상이 부인 콘스탄체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니센은 모차르트 전기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1826년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기는 콘스탄체와 포이어슈타인이라는 후속 저자에게 맡겨져 1829년 출판됐다. 이 책은 모차르트 생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 전기로 꼽힌다.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에 남았다. 둘째 아들 크사버 모차르트는 당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됐다. 슈베르트와 슈만도 크사버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 자신은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니센이 세상을 떠나고 15년 뒤인 1841년, 콘스탄체와 두 아들은 ‘종교음악과 콘서트의 세련된 취향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음악 협회 및 모차르테움’을 설립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대작곡가의 고향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 콘스탄체와 니센의 결정이 큰 나무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관의 음악교육 과정은 오늘날 명문 음대로 자리 잡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대의 기원이 됐다. 1880년에는 국제 모차르테움 재단이 설립돼 모차르트 연구와 도서관 운영, 관련 유적의 관리를 맡게 됐다. 초기부터 활발하게 콘서트 활동을 펼친 오케스트라는 1908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로 독립 출범했다.

콘스탄체와 니센 부부의 의지가 싹을 틔워 탄생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는 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피셰르 아담의 지휘로 내한공연을 연다. 모차르트의 교향곡과 레이 첸이 협연하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기자는 모차르트와 니센 가족의 숨결이 남아 있는 잘츠부르크를 올해 8월 찾아간다. 음악계의 악동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지휘하는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등 두 개의 잘츠부르크 축제 프로그램을 감상하고, 이 외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이탈리아 베로나 야외 오페라 축제에서 푸치니 ‘토스카’를,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 교향곡 3번을 감상한다. 세 나라에서 보는 알프스의 장관이 함께한다. 함께하실 분은 인터넷 검색창에 ‘투어동아’ 검색어를 입력해 보시길 권한다.

사족, 오늘날의 음악사가들은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철없고 경박한 여성이었다는 설에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모차르트의 유산과 업적을 잘 관리했고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살리에리의 살인 누명과 함께 콘스탄체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평가도 거둬 주시길.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동아일보(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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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前남편 모차르트를 위해 생애를 바친 남자

 

[박종호의 문화一流] 

 

그녀가 파티에 나간 것은 돈 많은 남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갖은 노력을 다하였어도 생활은 궁핍했다. 그래서 아직은 30대이니 최선을 다해서 치장하고 파티에 나온 것이다. 남편은 9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한 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고 대신 어린 두 아들만 안긴 채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29세에 남편을 여읜 그녀는 살길을 찾다 못해 파티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파티가 괴롭고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넋을 잃은 듯 구애했다. 그녀는 그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부자는 아니지만, 반듯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빈에 부임한 외국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그녀를 대했다. 그래서 둘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전남편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교양 있었고, 4개 국어를 했다. 전남편처럼 상스러운 말이나 욕설도 하지 않았고, 침 뱉지 않았고, 트림하지 않았고, 방귀 뀌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돈 벌 방법을 찾아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집 안 곳곳에 널려있는 전남편의 악보였다. 전남편은 작곡가였지만, 생전에 팔린 곡은 몇 되지 않았다. 집에는 악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피아노 밑에, 침대 위에, 부엌에, 소파의 쿠션 사이에 있었다. 그 남자는 악보들을 모아서 정리했다. 연대별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그리고 출판업자들을 만나서 협상을 해냈다. 

29세에 남편 모차르트를 잃고 두 아이와 남겨져 살길이 막막했던 콘스탄체(왼쪽 초상화)는 파티에서 만난 덴마크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오른쪽 초상화)의 청혼이 꿈만 같았다. 콘스탄체는 전 남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잊으려 재혼했지만, 폰 니센은 아내의 전 남편 모차르트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는 걸 필생의 사명으로 여겼다.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한 그는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했고, 그의 사후 콘스탄체가 첫 전기를 출간했다. 속표지(가운데 사진)에 저자 폰 니센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독일 경매사 도로테움

 

그녀는 전남편의 음악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음악이었다.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이후로 음악계는 변했고, 빈에는 새로운 음악가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꾸 전남편의 음악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전남편의 누나 등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써서, 전남편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내고 자료를 모았다.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방에 틀어박혀서 무언가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전남편의 전기(傳記)였다. 그녀는 전남편을 다만 일곱 개의 계명(階名)을 사용해 멜로디를 꾸며내어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닳고 닳은 솜씨를 가진 음악 기술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전남편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전남편과 그가 남긴 가난을 잊기 위해 새 남자를 택했지만, 이 남자는 전남편을 세상에 다시 드러내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전남편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벨기에 작가 에릭 에마뉘엘 슈미트(Eric-Emmanuel Schmitt)의 소설 ‘콘스탄체 폰 니센’에 나오는 내용이다.(국내에는 소설집 ‘브뤼셀의 두 남자’(열림원)에 들어 있다.) 그녀는 당연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Constanze Mozart·1762~1842)다. 실제로 극심한 빈곤 속에서 혼자된 그녀는 빈 주재 덴마크 영사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1761~1826)을 만나 재혼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품위가 있고 음악 애호가였던 니센은 모차르트의 진가를 알고 마음 깊이 존경했다.

 

니센은 무엇보다도 콘스탄체에게 전남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두 아들을 정성으로 부양하고, 두 아들을 프라하의 기숙학교에 보내주었다. 1812년에 니센은 본국 근무로 발령이 나서, 두 사람은 코펜하겐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1820년 니센이 은퇴하자, 그들은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 작업에 계속 매진했다. 그러나 1826년에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다른 사람과 함께 남은 작업을 계속해, 1829년에 세계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다고 하지만, 그건 니센 탓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성격적 결함이나 빈곤한 처지를 과장하려는 콘스탄체에게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콘스탄체는 13년을 더 살면서 ‘위대한 천재의 미망인’이라는 명예를 얻었고, 현실에서는 귀족 호칭인 ‘폰 니센’을 붙여 ‘콘스탄체 폰 니센 부인’으로 남루하지 않은 여생을 보냈다. 

모차르트와 사별한 콘스탄체와 두 아들을 거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은 평생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했고, 외교관 은퇴 뒤 아내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했다.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해, 그의 사후 마침내 첫번째 모차르트 전기가 출간된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의 카페 토마젤리 건물에는 “폰 니센 부부가 여기 살았다”는 명판이 붙어있다./위키피디아

 

잘츠부르크에 남아있는 니센의 무덤에는 “모차르트 미망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세상에 ‘전남편 미망인의 남편’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아내의 전남편을 더욱 존경했던 니센에게 그것은 영광스러운 타이틀이었다. 아내 전남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 일생을 바친 그를 기리기 위해 잘츠부르크시(市)는 한 거리를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 슈트라세(도로)’로 명명하였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있는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의 묘비에는 '모차르트의 미망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다. 그의 노력을 통해 모차르트는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위키피디아

 

우리는 최고의 예술을 접할 때에 위대한 예술가의 존재만 의식한다. 그리고 그의 위대함이 감상자인 나에게 바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 예술가나 예술 작품의 가치가 명료해지고 세상에 인정받기까지는 무명의 학자, 해설가, 비평가, 작가 그리고 열광적인 애호가 등 중간 지식인들의 공헌도 있었다. 아니, 지금은 대부분 잊힌 그들의 도움 없이 대중이 즉시 알아차렸을 예술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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