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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덩 반열 오른 시진핑] .. [ .. 5년 만에 '1인 천하' 어떻게 가능했나] ....

뚝섬 2021. 11. 10. 06:17

[마오·덩 반열 오른 시진핑]

[뒤통수를 보인 시진핑]

[종신집권 꿈꾸는 시진핑… 5년 만에 '1인 천하' 어떻게 가능했나]

[정적 날린 칼잡이 왕치산, 시코노믹스 설계자 류허]

[견제세력 없는 '21세기 마오'… 국제사회, 우려의 목소리]

 

 

 

마오·덩 반열 오른 시진핑

 

8일 시작돼 11일 끝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주목을 받는 건 여기서 ‘역사(歷史) 결의’란 걸 채택하면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장기 독재까지는 한 단계만 남기 때문이다. 남은 한 단계는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 열리는 새로운 회차의 공산당 대회다. 제20차가 되는 이 공산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세 번째 당 총서기로 선출되면 국가주석직에도 연임되면서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10년 집권’ 관행이 깨진다.

약 3000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공산당 대회는 약 200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좌우하고,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약 25명으로 구성된 중앙정치국이 좌우하고, 중앙정치국은 당 총서기를 포함한 7인 상무위원이 좌우한다. 당 총서기인 시진핑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상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도 유명무실해졌다. 상무위원들의 결정은 시진핑이 좌우한다.

▷시진핑의 권력 강화는 그의 집권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가시화했다. 장쩌민 시대에는 덩샤오핑이 지정한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후진타오 시대에는 장쩌민이 지정한 시진핑이 후계자로 집권 5년이 지나 부상했다. 후진타오는 2017년 시진핑을 이을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했다. 시진핑이 막았다고 볼 수 있다.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이 깨진 것이다.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도 후계자가 부상하지 않으면 시진핑의 집권은 15년을 넘어 2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시진핑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리는 공작은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2017년 제19차 공산당 대회의 결정에 따라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가 소집돼 공산당 당장(黨章)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삽입했다. 2018년 국가 입법 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憲法)에서 ‘국가주석직 3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 앞서 공산당은 100년사를 펴냈다. 그 속에 시진핑 관련 내용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비슷한 분량으로 기록했다.

 

▷공산당 대회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결의가 채택되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1945년 역사결의에는 마오쩌둥 사상을 중심으로 단결과 통일의 필요성을 담았다. 1981년 역사결의에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을 확고히 하는 내용을 담았다. 2021년 역사결의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중(美中) 대결 시대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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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를 보인 시진핑

 

공산당 권력 교체 순탄치 않아… 과거 시진핑도 테러설 등 휩싸여
中 차세대, 톈안먼·실용 경험… '코로나 이후' 변동 주목해야

 

중국 공산당의 권력 교체는 순탄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1976년 죽고 나서야 권력을 놓았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숙청이 없었더라면 덩샤오핑 복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덩은 1989년 톈안먼 시위 무력 진압을 결심한 직후 상하이에 있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불러올렸다. 손에 피 묻지 않은 '새 간판'이 필요했다. 그해 공산당 총서기가 된 장도 1997년 덩 사망 이후에 실권자가 됐다. 후진타오는 2002년 총서기에 이어 국가주석에 오르지만 핵심인 군사위 주석은 2004년 물려받는다. 권력이 나오는 '총구(군권)'를 장이 계속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시진핑도 그랬다. 2012년 9월 권력 승계를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실종'된 적이 있었다. 약속했던 힐러리 미 국무장관과 회동도 취소했다. 전 세계 관심이 집중될 때 보름쯤 종적이 묘연했다. 변고(變故)였다. 당시 베이징에선 '테러설'이 돌았다. 시진핑 집권에 반대한 세력이 덤프트럭으로 시가 탄 차량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해 베이징 정가는 '보시라이 파동'으로 혼란스러웠다. 혁명 원로 보이보(
薄一波)의 아들인 보시라이(薄熙충칭 서기는 주목받는 차세대 주자였지만 부인의 영국인 사업가 독살과 측근의 미 총영사관 망명 기도가 겹쳐 실각했다. 보시라이가 해임 직후 아버지가 창설한 윈난의 제14집단군으로 피신했더라면 중국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시진핑보다 네 살 위인 보시라이는 같이 자란 시를 우습게 봤다고 한다. 그런 보시라이를 공안·정보 총책인 저우융캉(
周永康)과 후진타오 비서실장 링지화, 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허우가 지지했다. 후진타오 경위국(경호실)에 체포된 보시라이를 빼내려고 저우융캉이 공안 병력을 동원한 것이 '쿠데타설'로 외신에 보도되기도 했다. 시진핑은 집권하자마자 이 '신(新) 4인방' 세력부터 숙청했다.

시진핑은 2017년 4월 미국에서 트럼프를 처음 만날 때 팡펑후이 총참모장을 데리고 갔다. 그런 팡펑후이를 얼마 지나지 않아 해임하더니 장양 군사위 주임과 함께 부패 혐의로 수갑을 채웠다. 장양은 조사 도중 자살했다. 정말 부패가 문제였을까. '황제'로 불리지만 시진핑 독재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엄존한다. 지금 시진핑은 우한 코로나 사태에서 허둥대고 있다.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가 26년 만에 처음 연기됐다. 경제 때문에 도시 봉쇄를 풀었다가 방역이 걱정되자 다시 묶었다. 우왕좌왕이다. 시가 뒤통수를 보였다.

1953년생인 시진핑이 언제, 어떻게 권력을 넘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이 60년대생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중국에도 '86세대'가 있다. 문혁 이후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세대이자 개혁·개방 덕분에 서구 사상도 접했다. 한국 '86세대'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톈안먼 시위는 중국의 86~88학번이 이끌었다좌파 이념에 빠졌던 한국과 달리 중국 86세대는 자유·민주·실용 가치를 배웠다. 지금 시진핑 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는 학자·지식인 중에도 86세대가 많다. 투자은행 한넝(漢能)의 천훙 회장처럼 미국에서 얻은 기술과 자금으로 중국 사업에 성공한 경우도 적지 않다. 공산당과 정부의 86세대는 한국처럼 '운동권'에 머무르지 않고 50세가 넘도록 일선 경험을 쌓으며 공부했다. 이들도 공산당 독재와 중화 민족주의는 추종할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숭배와 영구 집권까지 박수를 보낼 세대는 아닐 것으로 기대한다. 양쯔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있다. 양쯔강 중심인 우한발 코로나 사태가 풍파를 키우면 시진핑 1인 독재를 덮칠 수 있다. 시진핑만 쳐다볼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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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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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집권 꿈꾸는 시진핑… 5년 만에 '1인 천하' 어떻게 가능했나

 

장쩌민·후진타오의 수족 차례로 쳐내...

정적 보시라이 비리사건 터지자 反부패 앞세워 경쟁세력 무력화
후진타오 정권 핵심 저우융캉에 장쩌민 군부 인맥까지 사정 칼날
권력 놓는 순간 보복 당할까봐 장기집권 추진한다는 분석도

 

2012년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에 대한 서구의 평가는 "역대 최약체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에 과묵하고 무색무취한 그에게서 13억명을 이끌 강력한 리더십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서구 언론 평가는 그러나 완전히 달라졌다. 개혁·개방 이래 40년간 이어진 '국가주석 10년 임기제' 헌법 조항을 폐지하려는 시진핑을 그들은 '21세기 마오쩌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치며 제도화된 권력 계파 간 안배와 집단지도 체제는 시진핑 주석에 의해 폐지될 처지다. 그는 어떻게 단 5년 만에 1인 종신 집권을 꿈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것일까.

첫째 동력은 시대적 배경이었다.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한 2010년 '아랍의 봄', 201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중국 공산당에 충격을 안겨 줬다. 부패한 독재자들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은 '지금처럼 가다간 중국 공산당도 망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겨 줬다. 그런 위기감은 부패와의 전쟁에 나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시진핑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대형 부패 사건이 터졌다. 첫 장본인은 시 주석의 최대 후계 경쟁자 보시라이 충칭 서기였다. 그는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시진핑보다 네 살 위인 태자당 그룹의 맏형이었다. 시 주석이 권좌에 오르기 한 해 전인 2011년 그는 비리·조폭 척결을 내세워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핵심 측근인 충칭 공안국장의 미국 망명 시도, 아내의 살인 사건이 잇따라 밝혀지며 몰락했다. 그가 낙마한 2012년 3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후진타오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 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의 아들이 만취 상태로 최고급 페라리 스포츠카를 몰다가 숨진 것이다. 사건 당시 차에는 알몸의 여대생 두 명도 타고 있었다링지화는 후진타오 주석의 비서실장이었다.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시진핑 주석은 대대적인 반(反)부패 사정으로 연결했다. '호랑이(부패한 권력층)든 파리(지위가 낮은 비리 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는 시진핑 정권의 선언에 여론은 열광했다. 시 주석은 반부패 캠페인을 철저히 정치적 경쟁 세력을 척결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했다. 같은 태자당 출신인 왕치산을 사정 책임자로 앉히고 칼날을 휘둘렀다. 타깃 설정은 신중하고 전략적이었다. 상대 세력의 수장(首長)이 아니라 2인자 그룹을 노렸다.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 저우융캉, 중국 군부 내 장쩌민 인맥의 대부인 궈보슝·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이 그렇게 날아갔다. 온갖 비리 혐의를 들이밀면서 잘라내겠다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수족을 지킬 명분이 없었다그런 식으로 당·정·군 3대 권력 집단을 자기 세력으로 물갈이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군권은 나중에 넘겨받는 관행을 깨뜨린 그의 승부 근성은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2012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자신의 전임자 장쩌민이 그랬던 것처럼 후임자에게 군사위 주석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시 주석은 집무를 거부하며 압박했고 후진타오는 결국 군사위 주석까지 한 번에 넘겨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덕분에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군권까지 완벽히 쥔 상태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전선동에서도 그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과감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그를 다룬 기사는 한 해 3000건이었다. 후진타오 시절은 2000건이었다. 시 주석은 무려 5000건이었다. 그는 또 인터넷을 완전히 틀어쥐고 반대 여론을 원천 차단했다. 작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그는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그 같은 난제를 성취하려면 강력하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집권 연장을 예고했다. 하지만 반부패로 인해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가 권력이라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이 장기 집권을 노리는 또 다른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오쩌둥 시대에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조선일보(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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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날린 칼잡이 왕치산, 시코노믹스 설계자 류허

 

시진핑 제국 만든 1등 공신들

 

시진핑 주석을 '시 황제(皇帝)' 반열에 올린 1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왕치산 전 당 중앙기율위 서기. 시진핑 주석과 같은 혁명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낸 그는 시진핑 집권 1기 상무위원 중 시진핑 주석과 귓속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몇 개월씩 사라지면 반드시 그 뒤에는 거물급 인사의 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곤 했다.

왕 전 서기의 반(反)부패 작업을 시 주석의 권력 강화로 연결시켜 준 인물이 자오러지 상무위원이다. 당 중앙조직부장으로 당내 고위인사 1400명의 파일을 쥐고 있었던 그는 왕치산이 제거한 정적(政敵) 자리에 시진핑 인맥을 채워넣는 역할을 했다. '왕치산이 뜨면 자오러지가 바빠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시진핑 집권 2기, 공산당 최고위직인 7인의 상무위원에 오른 인물을 보면 대부분 참모형,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다. 장쩌민·후진타오 시절에는 각 권력 계파의 실력자들이었던 점과 대비된다.

왕후닝 상무위원은 장쩌민·후진타오 시절부터 외교·안보 분야의 책사로 활약해온 인물이다. 당 통치이념 면에서는 천민얼 충칭 서기가 복심으로 불린다. 그는 시 주석이 저장성 서기 시절 선전부장 겸 저장일보 사장을 맡아, 시 주석 이름으로 4년간 게재된 칼럼의 초고를 쓴 인물이다. 시 주석 통치철학의 밑그림을 함께 그린 인물이다.

경제 면에서는 시진핑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류허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이 있다. 그는 시코노믹스 설계자로 불린다.

리잔수 상무위원은 시진핑 집권 1기 거의 모든 해외 순방에 동행했던 인물이다. 시진핑 집권 1기 당 중앙판공실 주임(비서실장)을 맡아 시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허베이성 정딩현에서 밑바닥 행정을 배울 때 이웃한 현의 수장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 30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평생을 지방을 돌다가 67세에 상무위원에 발탁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조선일보(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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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세력 없는 '21세기 마오'… 국제사회, 우려의 목소리

 

"전세계에 영향 미칠 중국의 판단… 한 개인의 결정에 의존하게 됐다"

 

세계 2대 경제대국(G2)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의 의사결정이 시진핑 1인에게 집중되는 데 따른 위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7일 보도했다. '21세기 마오쩌둥'의 등장을 우려하는 것이다.

국제분쟁 전문 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의 마이클 코브리그 선임 고문은 "중국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판단이 이제 한 개인의 결정에 의존하게 됐다"며 "이는 끊임없이 발생할 중대한 이슈를 다룰 때 시 주석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황재호 교수는 SCMP와 인터뷰에서 "시 주석의 권위가 강화될수록 그에게 조언할 수 있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라며 "이는 시 주석이 오판할 가능성이 커지고 잘못된 판단이 내려졌을 때 신속하게 시정할 기회 또한 줄어든다는 뜻"이라고 경고했다. 독일 공영 국제방송 도이체벨레도 지난 26일(현지 시각) 마티아스 폰하인 에디터의 칼럼에서 "세계는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중국의 초강력 지도자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진핑 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 추진에 중국 내에서도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장을 역임한 옌자치, 중국의 기업인 왕잉파 등은 재외 중국 민주화 인사들과 공동으로 발표한 26일 성명에서 "개헌 추진은 (인민에 대한) 배반이자 역사의 퇴행"이라며 "나에게 침묵할 것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우영 기자, 조선일보(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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