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는 신경질이 많다]
[엄마는 오늘도 밥을 챙긴다]
한국 영화는 신경질이 많다
‘미키 17’을 봤다. 봉준호 신작이다. ‘설국열차’ ‘옥자’에 이은 세 번째 영어 영화다. 한국말 하는 한국 배우는 나오지 않는다. 본격적인 첫 할리우드 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살다 보니 한국 감독이 2천억원짜리 할리우드 SF 영화를 만드는 걸 다 본다.
모국어 아닌 언어로 좋은 영화 만드는 경우는 잘 없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외국인 감독 실패작도 서부 전선 병사처럼 널려 있다. 할리우드 입성하는 순간 고유의 특색을 잃어버리는 탓이다. ‘미키 17’은 달랐다. 매우 봉준호다운 영화였다. 영화 중반쯤 깨달았다. 로버트 패틴슨, 마크 러팔로 같은 배우들이 한국 연기를 하고 있었다. 뭐가 그들 연기를 한국적으로 만드냐고? 신경질이다.
한국인은 신경질이 많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신경질을 부린다. 한국인만의 특징은 아니지 않으냐고? 서양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자 유튜브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봤다. 아내의 신경질에 화를 내던 남자가 첫 한국 여행 이후 화를 멈췄다는 이야기다. 일상에서 언성을 높이는 한국인들을 보고 ‘이건 그냥 한국인 특징이구나’ 깨달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과장된 세계다. 한국인 특징은 증폭된다. 전문가조차 위기 상황에 신경질을 부린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전문가들은 그러지 않는다. 자기 영역에 문제가 생길수록 차분해진다. 그래야 전문가다. 한국 영화에서는 과학자도 신경질을 부린다. 모두가 이러니 영화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과학자로 가득한 SF 영화 ‘더 문’을 보다 극장에서 볼륨을 줄이고 싶었던 독자라면 무슨 소린지 이해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한국 감독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감정 과잉 상태로 짜증을 부리는 사람들 말이다. 이제 그런 캐릭터는 조금 덜어내도 좋겠다. 지금 한국 배우 중 미묘한 신경질 연기를 미세하게 잘하는 젊은 배우가 있다. ‘지옥’과 ‘밀수’의 박정민이다. 모든 신경질 캐릭터는 박정민에게만 맡기자. 한국 영화의 골고다 언덕에서 신경질이라는 십자가를 홀로 짊어지게 하라. 한국 영화 부활을 위한 신경질적 제안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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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오늘도 밥을 챙긴다
이슬만 먹으면 좋으련만, 떡볶이도 삼겹살도 초밥도 먹고 싶어
먹어도 금세 찾아오는 허기… 아, 끝없는 ‘시시포스’ 형벌인가
매 끼니 밥 챙기는 엄마처럼… “운명을 받아들이면 벌이 아니다”
평소에 무얼 먹으며 지내느냐 누군가 물어 온다면 이슬만 마시며 산다고 요정처럼 대답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떡볶이도 먹고 싶고 된장찌개도 먹고 싶고 삼겹살에 초밥까지 당기는 인간인지라 사흘 걸러 한 번씩은 마트에 간다.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사다가 주린 배를 채우고 나면 포식의 기쁨도 잠시,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허기가 지고야 만다. 하루에 세 번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틈틈이 입이 궁금해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여닫으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정말로 이슬만 마시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먹는 데에 돈 들일 필요가 없으니 지금보다 적게 벌어도 살 만할 터이다. 씁쓸한 마음에 이슬 대신 참이슬을 마시며 감상에 잠기다 보면 시시포스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시시포스와, 이내 배고파질 것을 알면서도 입안으로 음식을 밀어 넣어야만 하는 나의 다름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안주 삼을 계란을 부치려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활활 타오르는 가스불이 지옥 불처럼 보였다.
먹는 일에 진력이 나 마른 빵으로 끼니를 때운 어느 날, 친구에게 시시포스 이야기를 꺼내며 공감을 구걸했다. 눈감는 날까지 먹는 일을 반복해야만 하는 이 삶이 형벌처럼 느껴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대뜸, 지옥에서의 시시포스는 행복했을 수도 있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읽어 본 적 있느냐 물었다. 그러고는 부조리가 어쩌고저쩌고 어려운 얘기를 길게도 늘어놓기에 하품을 쩍 하며 그만하면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나의 수준을 알아챈 친구가 쉬운 말로 풀어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신이 시시포스한테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내렸잖아. 나 같으면 콱 죽어버렸을 텐데 시시포스는 좌절하는 대신에 운명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격렬하게 맞선 거야. 그 순간, 벌은 벌이 아닌 게 되는 거지. 생각해 봐. 누가 너한테 벌을 줬는데 네가 ‘어쭈, 나한테 감히 벌을 내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라!’ 하면서 그 일을 기꺼이 해 버려. 그럼 그게 벌이야?” “아니.” “벌이 아니지.” “응.” “뭔 말인지 알겠어?” “음, 대충.”
자신에게 주어진 벌을 벌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사람을 떠올려 본다. 제일 먼저 어머니가 생각난다. 가부장적인 내 아버지에게 시집온 죄로 끝없이 삼시를 챙기고 있다. 끼니때가 다가오면 “아으, 또 뭘 차려 먹어!” 신경질을 내면서도 뚝딱 밥을 짓는다. 당신이 알아서 먹으라거나 지겨워서 못 해 먹겠다며 가출한 일 한번 없이 밥상을 차려 내는 성실한 어머니다. 다음으로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요리 솜씨 없는 내 어머니에게 장가든 죄로 끝없이 김치찌개만 먹고 있다.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십오 년 동안 군만두를 먹으며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데, 허구한 날 김치찌개만 먹으면서도 군말 없이 그릇을 비워 내는 우직한 아버지다. 마지막으로 언니들이 생각난다. 잔소리가 취미인 내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로 끝없이 싫은 소리를 듣고 있다. 한때는 몹시도 힘겨워했으나 어느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고급 기술을 터득하여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요령 있게 잔소리를 받아 내는 앙큼한 언니들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운명에 맞서고 있구나 싶다.
나라고 좌절할쏘냐.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이 지긋지긋한 허기에 맞서야 한다는 말인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먹어야지.” “먹었는데?” “그깟 빵 쪼가리로 되겠어? 더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으면서 너를 괴롭히는 배고픔에 격렬하게 저항해야지!” 배달 앱을 실행시키려다 말고 찬장 깊숙이 잠자고 있던 뚝배기를 깨워 쌀을 안친다. 냉동실에서 꺼낸 명란젓이 말랑말랑해지기를 기다리며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양파와 버섯을 넣고 달달 볶는다. 깍둑깍둑 썬 오이를 그냥 먹을까 하다가 이왕이면 제대로 먹자 싶어 쌈장도 후딱 사 왔다. 부산을 떨며 차린 밥상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했지만 갓 지은 쌀밥에 짭조름한 명란젓을 얹어 먹으니 살 것 같았다. 허기에 좌절하지 않고 포만을 이루어 낸 나의 완벽한 승리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운명이 이내 꼬르륵 소리를 내며 또다시 시비를 걸어온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장 주방으로 가 칼을 뽑아들었다. 덤벼라, 운명아!
-이주윤 작가, 조선일보(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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