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하여]
[얼굴이라는 '이력서']
[중심에서 사는 사람.. ]
기도에 대하여
어릴 적, 기도 중간에 실눈을 뜨고 기도하는 사람 얼굴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쏟아지는 소망의 내용이 길수록 사람은 저마다 절박함이 깊구나 싶어 가슴이 울렁였다. 그때 내 기도는 주로 원하는 물건 목록이었다.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은 어린 신앙은 점점 물건뿐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직장인이 되자 기도 시간만큼 한탄의 목록도 길어졌다. 문학 공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IMF만 없었다면, 집을 샀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 원망한 것이다. 하지만 야근 때문에 늦잠을 자고 코앞에서 놓친 버스 앞에서 나는 ‘그 장애물 자체가 내 삶’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 간절한 기도의 내용은 모두 틀린 것이었다.
이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기도한다. 한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엔 위로를 줄 단어를 찾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의 말이 하늘에 닿기 전, 우선 내 귀와 가슴에 닿기를 원한다. 시인 ‘타고르’는 “고통을 멎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성공의 은혜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이제 작가로 큰 업적을 남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읽고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위해 기도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하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를 바란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이를 많이 봤다. 그러나 포기가 곧 실패는 아니다. 때론 멈추는 게 더 큰 용기일 수 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은 바라는 걸 이루는 게 아니라, 흙탕물 같은 자기 마음을 정화해 평정과 냉정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이젠 기도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와 다짐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기도하는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좋아질까. 우리 삶에 맑은 날만 이어진다면 이 땅은 꽃과 나무 없는 사막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별을 볼 수 있고, 빗속을 통과하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백영옥 소설가, 조선일보(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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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라는 '이력서'
‘영월 창령사터 오백나한’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나한상을 촬영하고 있다.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배시시 웃는 표정, 입술을 삐죽 내밀고 토라진 얼굴까지 인간사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이태경 기자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이 됐을 때 친한 친구가 주변 사람 한 명을 천거했다. 새 내각에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만나본 링컨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일로 서운했던 친구가 나중에 왜 그 사람을 발탁하지 않았는지 링컨에게 물었다. 둘이 나눈 대화다.
“그 사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네.”(링컨) “이보게, 얼굴이 어디 그 사람 탓인가? 부모가 준 대로 타고나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유능한 사람을 쓰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친구) “어릴 때는 부모가 준 얼굴로 세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네!”(링컨)
법정 스님 미공개 강연록 ‘진짜 나를 찾아라’(샘터)에 나오는 얘기다. 마흔이 넘었다는 것은 어른이 됐다는 뜻이다. 법정 스님은 저 이야기를 전하면서 “반죽이야 부모가 했으니 어릴 적엔 허물을 잡을 수 없지만, 어른이 된 뒤의 얼굴은 살아온 삶이 투영된 것이니 책임이 따른다”며 “스스로 자기 얼굴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법정 스님 미공개 강연을 묶은 책 '진짜 나를 찾아라'
흔히 얼굴을 가리켜 ‘이력서’라 한다. 이 풍진세상을 살다 보니 주름도 생기고 마음에 금도 그어진다. 그게 얼굴로 다 드러난다고 해서 이력서다. 얼굴은 ‘청구서’라고도 한다. 고물가 시대에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려니 걱정이 많은데 얼굴에 근심이 다 비친다고 해서 청구서다. 이력서니 청구서니 하는 표현에는 우리 얼굴의, 우리 인생의 애환이 담겨 있다.
얼굴은 ‘얼의 꼴’, 즉 자기 내면세계의 형태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 하나뿐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자기 틀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라고 법정 스님은 설명한다. “자기를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거나 남의 거죽을 흉내 내려 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얼굴이 됩니다. 자기답게 살아야 자기 얼굴을 갖출 수 있습니다.”
링컨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가 사람을 미추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구가 추천한 사람의 얼굴이 못나서가 아니라 어떤 그늘이나 어둠을 알아본 것이라고 법정 스님은 말한다. 밝은 마음이 만들어낸 얼굴은 껍데기와 상관없이 아름답다. 어느 조각가 말마따나 예술은 돌덩이에다 아름다움을 새겨 넣는 것이 아니다. 원래 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캐내는 것이다.
나한상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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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서 사는 사람..
모든 것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시들고 쭈그러든다.
내 글만 읽고 나를 현품대조 하러 온 사람들이 가끔 깜짝 놀란다.
법정 스님 하면 잘 생기고 싱싱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별 볼 것 없고
바짝 마르고 쭈글쭈글하니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마다 속으로 미안해 한다.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늘 새 차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다 보면 고장도 나고 쥐어 박아서 찌그러들기도 한다.
육신을 오십 년, 육십 년 끌고 다니다 보면 폐차 직전까지 도달한다.
거죽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생로병사 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 한다.
그러나 보라,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 나이가 있는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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