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겨울에야 보이는 것] [누가 방울토마토를 두려워하랴]

뚝섬 2025. 2. 20. 09:31

[겨울에야 보이는 것] 

[누가 방울토마토를 두려워하랴]

 

 

 

겨울에야 보이는 것

 

세상 차갑게 식어갈수록 더 짙어지는 사람의 호흡
오염되지 않은 긴 숨결은 추워야만 본모습 드러내

 

무심코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김 때문이었다. 출근길, 폐에 차 있던 공기가 입으로 빠져나와 얼굴을 덮었다. 간밤 몸 안에서 데워진 온기가 얇은 담요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펄럭이다가 곧 바람에 올이 풀려 날씨의 일부가 돼가는 장면을 새삼 신기해하며. 영하(零下)의 기온,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날이 추울수록 입김은 짙어지고 더 쉽게 허기진다.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입김을 흘릴 때, 그들의 머리통은 작은 밥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루분의 취사(炊事)를 위해 그들은 오늘도 부스스 깨어나 옷을 껴입었을 것이다. 따뜻한 계절에는 드러나지 않던 숨의 궤적이 숨 쉬는 일의 고단함을 생각하게 한다. 저마다 체내의 압력을 다스리며 조용히 뱉어내는 그 온기의 출처가 나는 한숨이 아니기를 바랐다.

 

연기(煙氣)가 땔감을 태워 남기는 도구의 흔적이라면, 입김은 우리가 온혈동물이라는 본래의 고백처럼 느껴진다. 입김에는 잡념이 섞이지 않는다. 거기엔 아무 저의도 없다. 고(故) 이어령 선생도 찬바람 부는 어느 아침 불현듯 알아챘던 모양이다. 후세를 위한 ‘입김의 시’를 남겼다. “세상이 식어가더라도 시인이여 겨우살이를 하지 말고, 아침마다 문 밖으로 나와 그 뜨거운 입김으로 말하거라.” 꾸며낼 수 없는 입김처럼, 숨 쉬듯 정직하게 살자는 격려였으리라 짐작한다. 

 

19일 오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한 남성이 입김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탄핵 국면이 길어지고 법정의 시간이 늘어질수록, 그러나 입김은 어떤 암막을 배경으로 더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 입김은 권력의 동의어다. 기온과 관계없는 입김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일컫는 관용어로 사용될 때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박완서 ‘그 남자네 집’)와 같은 황홀한 고백에서조차 어떤 치밀한 계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입김에서는 참을 수 없는 구취가 풍긴다.

 

답답한 마음에 더 많은 입이 광장에 모여 더운 김을 피워내고 있다. 서울이든 대구든 광주든, 작은 호흡이나마 보태려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입은 미약하고 발언권조차 없다. 그러나 함성 이후 새어나오는 날숨이 그들의 확실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각자의 폐활량만큼 피워내는 소량의 안간힘으로, 그들이 이 땅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항의하고 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입김은 있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일상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에서 입김은 덧없음을 의미한다. 현란한 웅변의 시대에 고작 입김을 논하다니, 역시 무용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한가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라고, 차라리 치솟은 난방비를 걱정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힐난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가장 원초적인 내면이 있으며, 고로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성찰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침 버스에 사람들이 올라탔다. 여럿이 뿜어낸 훈김으로 금세 차창이 흐려졌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릴 때 누구나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눈앞이 뿌옇고 가끔은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맥없이 잊힐 뻔한 맥박을 한파가 시각화해주고 있다. 그 조용한 흔적으로 인해 아직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음을 깨닫는다. 앞자리에 앉은 한 연인이 창에 입김을 불어넣고는 손가락을 갖다 댔다. 짜증 내거나 꾸벅꾸벅 조는 대신에, 뭔가를 그려넣고 있었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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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방울토마토를 두려워하랴

 

여러 감각 교차하는 정서적 경험이 풍요로울 때 창조적 사회도 가능
분노·적개심 대신 경험의 공유 고민을

지난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바우하우스(Bauhaus)'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왔다. 독일에 갈 때마다 나는 자주 독일인들과 싸운다. 오래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동양인 비하의 교묘함 때문이다. 입국장부터 시작된 '나의 투쟁'은 출국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번에는 절대 분노하지 않기로 맘을 단단히 먹었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기억과 관련해 '정점-종점 규칙(peak-end rule)'을 주장한다. 지난 일을 평가할 때 '가장 좋았던 일(peak)'과 '가장 마지막(end)'이 그 경험 내용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면 '정점'과 '종점'을 제외한 일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이 행복하려면 마지막 순간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 느닷없는 청구액에 놀라지 않을 준비를 미리 해야 한다. 유럽 공항에서 쇼핑한 물건의 세금을 돌려받는 일도 되도록 피해야 한다. 단 한 번도 기분 좋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책만 샀다. 이번 여행은 큰 소리 한 번도 안 내고 잘 끝냈다. 비행기 탈 때까지 상냥한 표정으로 먼저 웃었다. '종점'은 완벽했다.

이번 여행의 '정점'은 독일의 슈뢰더 전 총리를 만나 식사한 일이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녹색당의 요슈카 피셔는 1990년대 내 유학 생활의 영웅이었다. 독일 의회에서 젊은 그들이 연설하면 나는 넋을 놓고 봤다. 엄청났다. 두 사람은 팀을 이뤄 노쇠한 헬무트 콜의 장기 집권을 끝냈다. 두 사람은 결혼도 경쟁하듯 여러 번 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최근 한국인과 결혼했다. 베를린 칸트슈트라세의 오래된 식당에 아내와 함께 나타난 그는 너무 행복해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라며 잠시도 손을 놓지 않았다.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결혼 3번'은 기본이라고 했더니 그는 재혼인 아내에게 한 번 기회가 더 있는 거냐며 불안하게 웃었다.

 

‘상식(common sense)은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에서 나온다!’ /그림=김정운

실제 그렇다. 한번 하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결혼 제도는 평균 수명이 채 40세도 안 될 때 만들어진 거다. 100년도 넘게 살아야 하는 미래에는 단 한 번 결혼해서 70~80년을 함께 사는 부부는 '천연기념물'이 될 확률이 높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결혼, 이혼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동거'가 보편화된다. 유럽의 많은 나라가 '동거 커플'을 '결혼한 부부'처럼 제도적으로 보장해준다. '저출산 대책'은 이런 총체적 사회문화적 변동을 고려해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100세 시대에는 '결혼 10년 단임제'도 훌륭한 대안이다. 결혼하면 그 파트너하고 딱 10년만 사는 거다. 정말 사랑하면 단 한 번만 연장할 수 있다. 크, 여럿 행복해질 것 같다.) 식당을 나서며 슈뢰더 전 총리는 내게 그 '귀족적인(!) 마스크'로 어찌 결혼을 딱 한 번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졸리다리테트(Solidarität)'라고 했다. '연대' 혹은 '의리'라는 뜻이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정점'은 '감각'과 관련된 바우하우스 철학의 재발견이었다. 1919년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불과 14년 만에 나치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모더니즘 건축, 산업 디자인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바우하우스 철학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삶과도 아주 구체적 관계를 갖고 있다. '한국식 아파트'야말로 바우하우스 건축의 가장 효율적 활용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미학적 응용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 철학의 핵심은 '공감각(共感覺·synesthesia)'이었다. '공감각'이란 감각이 서로 교차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그림을 보면서 음악을 느끼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색채를 보는 것과 같은 감각의 교차적 경험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수공업 장인들의 '촉각'을 기초 교육과정에 포함했다. 온갖 조형 재료의 성질을 직접 손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독일 디자인의 독특한 재질감은 바로 이런 '시각과 촉각의 창조적 편집'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전통에서 나온다. 바우하우스 선생이었던 칸딘스키나 클레는 음악의 청각적 경험을 2차원의 시각적 평면에 구현하려 했다. 바우하우스가 지향한 건축이란 이런 감각적 경험의 종합이었다.


감각적 경험의 교차 편집이 일어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풍요로운 사회가 창조적 사회다. '상식(common sense)'은 라틴어의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에서 파생한 단어다. 특정 감각만이 절대화되면 '상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소통 불가능해진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문과 방송, 혹은 유튜브나 팟캐스트 따위로 감각적 기반이 전혀 달라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분노, 적개심을 야기하는 파괴적 정서가 아니라, 공유하며 교차되는 공통 감각적 경험을 아주 치밀하게 고민해야 한다. 문화예술 정책은 그런 걸 하는 거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그렇게만 가능하다. 100년 전의 바우하우스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다.


끝으로 아주 개인적인 공감각적 경험 하나. 나는 방울토마토가 싫다. 입안에서 겉돌며 잘 씹히지 않는 물리적 느낌이 불편하다. 억지로 잡아 씹으면 느닷없이 터지는 입안의 그 느낌에 긴장까지 한다. 마누라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바로 긴장하는 요즘인데 방울토마토 따위에 그럴 까닭이 전혀 없다. 방울토마토는 아무리 작아도 잘라 먹어야 한다. 입안에 들어올 때부터 토마토 속의 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맛있다. 내겐 그렇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조선일보(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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