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신돌궐제국] [흉노(匈奴)-돌궐(突厥)]

뚝섬 2021. 11. 25. 07:43

돌궐제국

 

종신 집권을 꿈꾸며 ‘21세기 술탄’으로 불리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공략에 나섰다. 튀르크어족으로 분류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를 결성한 것. 그런데 최근 반(反)서방 노선을 걷는 에르도안과 호흡을 맞춰온 중국이 OTS에 대해선 아주 불편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신장위구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달 12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공식 출범한 OTS는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 회원국으로 참가했고, 투르크메니스탄이 참관국 자격으로 참여했다. OTS는 장기적으로는 외교안보 측면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 분야에서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2003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무슬림 강경파가 핵심 지지 기반이다. 이슬람권의 맹주를 자처하며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해왔고, 튀르크계라는 연결고리를 활용해 중앙아시아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튀르크라는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 돌궐이다. 돌궐족은 4세기 말부터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해 552년에는 왕조를 세웠다. 당시 중국인들은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돌궐을 철노(鐵奴·철을 만드는 야만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돌궐은 당나라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고 10세기에 투르키스탄 지역까지 진출했다. OTS 회원국 대부분은 이 지역 국가들로서 민족의 뿌리가 같고 모두 이슬람권에 속해 있다. 돌궐족의 후예들이 다시 뭉치면서 돌궐제국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OTS 출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국가는 중국이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튀르크주의와 이슬람의 확대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신장위구르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거세질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신장위구르는 18세기 청나라에 점령된 이후 중국의 일부가 됐지만 주민의 다수는 튀르크계로 분류되는 위구르족이다. 2009년 민족 간 갈등으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등 화약고처럼 불안한 곳이다.

 

▷다른 강대국들도 중앙아시아에 부는 바람을 눈여겨보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미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러시아도 이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돌궐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튀르크계 국가들의 움직임이 국제 정세에 또 하나의 변수가 돼 가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동아일보(21-11-25)-

_______________________

 

 

흉노(匈奴)-돌궐(突厥)

 

흉노(匈奴):
 

흉노(중국어: 匈奴, 병음: Xiongnu 슝누, 몽골어: ᠬᠣᠨᠨᠣ 콩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성(甘肅省),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한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 한무제 때 한나라의 공격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일각에서는 흉노와 훈족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역사

 

초기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는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진(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5국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조의 효성왕(孝成王, 재위: 기원전 265년-기원전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대(代)의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의 군을 격파하였다.(선우는 흉노를 이끄는 대장의 호칭이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

 

흉노의 전성기 영역은 한나라를 능가하는 제국이었다. |출처:<지금은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이야기 흉노>, 사와다 이사오, 아이필드에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을 보내 융적(戎狄) 즉 흉노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흉노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당시 흉노의 두만(頭曼, 터키어: Tumen, Teoman)은 여러 차례 중국을 공격했고,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기에 앞서 황하(黄河)를 넘어 자신의 태자였던 묵돌(冒頓)을 인질로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보냈다. 그러나 곧 그 월지를 공격하여 아들을 죽이려 했고, 가까스로 월지를 빠져나온 묵돌은 귀국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아버지 두만 선우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돌 선우의 등장

 

묵돌이 등장할 당시 중국은 초한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묵돌은 정권을 강화시키고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東胡)를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나아가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쳐서 몰아내고 남쪽으로 누란(樓蘭), 백양하남왕을 병합해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묵돌이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야(屈射), 정령(丁零) 등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는 사이,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유방(劉邦)에 의해 내란이 수습되었다. 기원전 200년에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韓王信)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원(太原)으로 진격, 진양(晋陽)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유방이 친히 이끌고 온 한군이 도착했으나,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많은 병사가 추위로 곤욕을 치렀다. 묵돌은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하고자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진평(陳平)의 헌책에 따라 묵돌의 알지(閼氏, 역대 선우의 어머니)를 움직여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다. 이후,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과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와 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실크로드 장악

 

기원전 177년,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하남 땅을 침략해 상군(上郡)을 약탈했다. 한의 문제(文帝, 재위: 기원전 180년~기원전 157년)는 승상 관영(灌嬰)에게 우현왕을 치게 했는데, 백등산 전투 이후 한이 흉노에 대해 처음으로 손을 쓴 사례였지만, 이 무렵 서방 공략에 주력하던 묵돌 선우는 곧장 흉노측의 책임을 인정했다. 묵돌 선우는 한과의 조약을 깬 우현왕을 시켜 돈황(敦煌) 부근에 있던 월지국을 축출하게 하는 동시에, 누란(楼蘭), 오손(烏孫), 호갈(呼揭) 및 서역 26국을 흉노의 지배하에 두었다.

 

묵돌이 죽은 뒤 선우가 된 노상(老上, 재위: 기원전 174년~기원전 161년)에게 한 문제는 화친 조약에 따라 공주를 출가시켰는데, 이때 공주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 환관 중항열(中行說)은 흉노의 땅에 가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강제로 보내지게 되었고, 흉노에 붙어 노상 선우의 상담역으로서 선우가 한을 침공하도록 부추겨 한의 골칫거리가 된다.

 

흉노의 분열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 무제(武帝)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황하 서쪽 지역에 처음으로 진출해 '하서사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했으며, 나아가 서역(西域 : 간쑤성 및 신장 자치구 일대)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과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중국에 입조하여 지원을 얻었다. 이후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다. 이때 질지(郅支) 선우는 서흉노를 이끌었는데, 후에 동흉노에 패하여 다시 흡수되었지만,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흉노의 내분과 약화의 원인으로는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되었던 것을 꼽기도 한다.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국한 후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흉노는 다시 중국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이후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이 성립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중국 측에서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와 소멸

 

남흉노는 남하하여 대부분 중국인이 되었다. 후한의 유표는 고대 흉노 모계 조상 가운데 한나라 공주 유(劉)씨가 있었기 때문에 유(劉)씨로 창성하였다. 그의 후손 서진(西晉) 말기, 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漢)을 건국하였다. 이는 흉노가 과거 한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유연은 형인 한나라를 대신하여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였다. 흉노의 한나라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하여 지배권을 얻었다. 이후 흉노의 일파인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를 건국하자 국호를 (趙 : 후조와의 구분을 위해 보통 前趙라고 부른다.)로 고치고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으로 대립하였다. 329년에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였으며,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

 

407년에는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산시 성(陝西省) 일대에서 하(夏)를 건국하여 선우를 자칭하였으나 431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5호 10국 시대 유지원이 후한 (오대)을 건국하는데, 석경당 휘하에 있다가 한을 건국하였기 때문에 흉노의 후예라고 믿어지고 있어서, 공식기록에 유지원이 사토족 출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한나라 유씨 이외에도 주나라와 항우 계통이 있어서 검증이 필요하다.

 

정치 제도

 

흉노의 군주는 선우라고 불렀다. 흉노의 선우는 흉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묵돌 선우 이래 부자세습제를 통해 자리를 이어갔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흉노는 군주를 선우(單于)라고 불렀고, 수하 장수를 왕으로 지칭하였다. 흉노열전의 곤야왕 (昆邪王), 절란왕, 휴도왕 등은 왕이 아니고 한나라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제후(장수)을 가리켰다.

 

흉노의 주요 지배 집단은 연제, 호연(呼衍), 수복(須卜), 난(蘭), 구림(丘林) 등 5개 부족이 있었다. 국가를 구성하는 5부족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고 국사를 의론하였다. 흉노의 지배 계층은 험윤에서 이어져 온 몽골계이며, 흉노는 다민족 국가로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와 이란계가 흉노에 포함되었다. 한나라 시대 연제 씨족이 왕통을 이어 갔고 황후는 다른 4개의 부족에서 나왔다. 남흉노 "류" (劉)씨는 연제 부족에서 나왔으며, 구림(丘林)은 북위 무렵에 남하하여 "림"(林)으로 성을 가졌다. 셀랑가 강에서 기원한 "설연타"의 일파인 사토족이 후당을 건국했을 때 흉노족이 "리"(李)를 성으로 취했다.

 

4세기 이후, 오르도스와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목 왕조들의 군주들은 선우라는 명칭은 거의 쓰지 않았고, 한이나 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선우를 보좌하는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직책도 있었다. 흉노 선우의 시각은 중원 왕들과 반대로 남방을 정면으로 삼았기 때문에, 좌현왕은 동부, 우현왕은 서부를 관장했다. 당시 중국 왕조인 한나라 식으로 하면, 선우는 황제, 좌우현왕은 황제가 봉해주는 왕에 해당한다. 또한 좌우현왕과 비슷한 두 왕(좌곡려왕, 우곡려왕)이 더 있어 선우와 함께 유목민족 특유의 5부 체제를 이끌었다. 또한 흉노가 강성하여 서역 지방을 다스렸을 때 서역 지방 제후를 일축왕에 봉했다. 골도후라는 직책도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골도후에도 좌, 우의 개념이 있어 각각 선우의 보좌직이라는 설이 있다. 좌우현왕 밑에는 각각 지방관 등으로 여겨지는 각종 직위들이 있었으며, 여기서 흉노의 지역 체제가 군사 체제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언어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몽골어로 ‘훈’은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흉노제국은 스스로를 ‘훈’이라고 불렀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주변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

 

흉노는 유목민족으로써, 경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을 영위하는 정주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흉노는 때로는 중국을 침략·약탈하고 때로는 조공이나 세폐를 통해 평화적으로 물자를 확보하였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은 국력을 기울여 장성을 쌓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도 하였다. 중국측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중국이 전한 무제 때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흉노 부족의 일부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신하라고 자칭했었다고 한다. 전한의 원제는 궁녀 왕소군을 공주로 만들어 흉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비교적 장기간 국경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혼 동맹을 통해서 양국과 우호관계를 담보하기 위한 행위였다.

 

전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서역을 상실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더욱 약화되어 일부는 중국에 복속되어 번병이 되기도 하였다.

 

훈족과의 관계

 

서흉노 또는 북흉노가 훈족의 원류라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한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민족과의 관계

 

신라의 일부 금석문에는 흉노 출신의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실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재야사학자 및 소수의 역사학자들은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고대 신라인들이 왕가의 혈통을 미화하기 위해 중국 역사 속의 위인을 시조로 꾸며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____________________

 

 

돌궐(突厥):

 

돌궐(突厥, 불가리아어: Гоктюрки 고크튜르키, 터키어: Göktürk Kağanlığı 괵튀르크 카안르으, 551년-657년) 또는 괵튀르크(Göktürk)는 천산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다. 돌궐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이며, ‘주서(周書)’ 이역(異域돌궐(突厥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며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557년의 영토는 6,000,000km²이다. 괵튀르크는 하늘의 튀르크 혹은 천상의 튀르크라는 의미이다.

 

당시 강자로 군림하던 유목 제국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만주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세력 확장을 펼쳤다. 그러나 동, 서로 분열되어 동돌궐은 당에 복속하게 되었고, 서돌궐은 이슬람화 되었는데 그 중 오구즈 부족이 셀주크 제국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99년 튀르크 족은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구려와의 대외 관계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다가 수의 통일 후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인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 돌궐은 당의 고구려 원정에 동참하며 다시 한번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중국과의 관계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중국이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589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을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북방의 강자 유연을 멸망시킨 새로운 패자 돌궐은, 중국과 대립관계가 된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은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고, 돌궐의 힐리 카안(頡利 可汗, Kieli Kağan, Hieli Kağan, İliğ Kağan)은 당나라에 신속하면서 당과 돌궐 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한다. 중국과 돌궐의 관계를 보면 주도권 관계가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분열되면 중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중국에 복속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중원 왕조는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는 머나먼 이역만리(異域萬里) 터키인들이 우리 대한민국, 꼬레를 형제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25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고. 그렇지만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가 베트남에 참전했다고 해서 베트남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을까요?

 

실제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 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으며,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중공군에 밀려 연합군들이 후퇴를 할 때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도 났다는데, 자기나라일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요?


서양으로 간 동양인 "투르크족"의 나라

 

터키는 한자로 돌궐(突厥)이라고 표기하며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입니다.

 

터키는 서쪽으로 그리스와 불가리아, 동쪽으로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이란, 남쪽으로는 이라크,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터키의 북쪽국경은 흑해와 연결되어 있구요. 남쪽과 서쪽 국경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터키인 셈이지요. 역사나 신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마 히타이트, 미다스왕, 그리고 트로이 전쟁등에 대해 친숙할 겁니다. 이들이 자리한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자리한 "아나톨리아 반도"입니다. 흔히, 그리스 신화에서 "소아시아"라고 지칭되는 곳이 바로 터키이지요.

 

그러나, 지금의 터키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히타이트족도 아니요, 미다스왕의 후예들도 아니며, 과거 트로이의 백성들도 아닙니다. 지금 터키의 국민들은 머나먼 아시아 대륙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투르크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지요.

 

과거 중국인들이 흉노족, 돌궐족이라 칭했던 바로 그 족속들이 "투르크족"입니다.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호령했던 유목민족인 돌궐이 8~9세기경 당나라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했고(이 시기는 당태종, 당고종등 당나라 전성기이며,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때와 동시대입니다) 이들이 정착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지금의 터키의 전신이라 할 셀주크 투르크오스만 투르크 제국인 거죠.



구이(九夷)족의 우두머리 "동이(東夷)족"

 

<.... 먼 옛날부터 나라가 있는데, 이를 "동이(東夷)"라 한다. 그 나라에 단군(檀君)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니 동쪽에 아홉 부족 구이(九夷)가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다음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사람 노릇 하는 윤리와 도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중략)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淳厚)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儀君子之國>"가 아니겠는가? >

 

중국 사서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순 시대때부터 중국의 황화문명과 대등한 지위의 동방문명이 있었으며,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그 동방문명에서 종주국(宗主國)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어가 알타이어 계통이란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몽골어, 위구르어, 그리고 터키인들이 사용하는 투르크어가 바로 우리와 같은 알타이 언어이지요. 고조선때부터 만주와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대평원에 넓게 위치한 유목민족들의 총칭인 구이(九夷)족의 일원으로써, 우리 한민족과 투르크족은 상호공존(相互公存)해 왔던 것이죠.

 

한(), 고조선과 흉노

 

중화민족(中華民族) 중심 사관(史觀)으로 보는 중국의 역사는 크게 보면 농경민족인 중화족과 북방 유목민족간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화민족이 통일국가를 경영하는 한(漢),당(唐),송(宋),명(明)의 시대는 치세(治世)요. 그렇지 않은 때는 역사가 정체되는 난세(亂世)로 보는 그러한 시각인데요. 그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고, 그래서 모든 나라는 중국을 다스리는 천자(天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집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따르는 자들은 제후국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무력으로 정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이런 중국의 세계관에 불응한 나라가 둘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고조선과 고구려 입니다.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는 자신을 중화문명에 대항하는 동방문명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구요. 이런 중화민족 위주의 세계질서에 반대하는 제 세력들은 상호 연대할 필요를 가지게 되지요.

                

원래 한 뿌리였고(환인, 환웅시대), 공통의 이익을 가지는 고조선과 흉노족이 서로 친하게 지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구요. 한나라 입장에서는 중화 위주의 세계질서 편입에 반대하는 두개의 세력, 즉 동방의 고조선과 북방의 흉노와의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한 무제때에 이르러 비록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중 아무도 상을 받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고조선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고 하구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 흉노를 막기 위함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리장성에도 불구하고 진을 이은 한(漢)은 흉노를 막지 못합니다. 중국을 재차 통일한 한고조(유방)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시 흉노의 지도자였던 묵특선우(冒頓單于)와 백등산(白登山)에서 맞서 싸우게 됩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패한 한고조는 흉노와 신속관계(臣屬關係)를 맺게 되구요.

 

이후 흉노의 선우(지도자명칭)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해마다 많은 양의 견직물·술·쌀 등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죠. 그리고, 중화(中華)를 형성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는 한 무제가 왕위에 오릅니다. 한고조 유방의 치욕적 패배 이후 아마도 절치부심 했었던 걸로 보이는데요. 우선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동방의 적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월트디즈니사의 영화 ‘뮬란’의 배경이 이때로 추측됨).

 

이후 한무제 치세 내내 무려 50년간 한-흉노의 싸움은 이어지게 되구요. 끝내 한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한무제의 아들 한소제는 흉노와의 화친(和親)을 도모하게 되고, 결국 양자는 대등한 관계로 서로의 왕실이 통혼(通婚)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漢)도 흉노도 서로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로 평화의 시대를 열게 되는 거죠.

 

이후 1세기경 흉노는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지게 되구요. 오랜 투쟁 끝에 남흉노에 의해 밀려난 북흉노는 서쪽으로 그 근거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서양사에 나타나는 훈족(헝가리)의 출현이구요. 또한 이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끌어 낸 것은 익히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한(漢)나라가 위치한 중국 또한 220년 조조가 위를 세우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근 400년간 열국이 중국대륙을 분할 통치하는 대난세인 위,진,남북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구요. 중국이 혼란에 접어든 거의 동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도 여러갈래로 나뉘어져 역시 혼돈스런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 고구려와 돌궐

 

사실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곤 하나, 실질적으로 한사군의 고조선 영역 지배는 채 반세기를 넘지 못했을 걸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한-흉노의 50년간의 대전쟁을 이어가기에도 여러모로 벅찼을테고, 실제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도 고구려의 옛 영역을 지배한 건 채 반세기가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화민족은 오랜기간 만리장성 이남을 중화족의 영토로, 만리장성 너머는 새외(塞外)로 인식해 왔습니다. 농경민족인 중화민족이 유목민들의 땅을 탐낼 이유도 사실 없구요. 어디까지나 요하의 서쪽인 요서까지를 중화민족의 세계로 인식해 왔다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어쨌든, 한(漢)의 멸망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져 있던 때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고구려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동방문명권을 건설하게 됩니다. 과거 동이족이 구이족의 우두머리 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직접 통치하고, 신라와 거란(키타이), 동예, 말갈, 왜국등은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두는 식으로 실질적인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습니다.

오랜기간 혼란에 휩싸여있던 중국은 결국 589년 수의 양견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되구요. 그리고 이제 천하(天下)의 패권을 두고 수, 당과 고구려 간의 대문명전쟁은 자그마치 70년간이나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는 두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양성을 본거지로 하는 농경문명적 성격이구요. 또 하나는 동북방 유목국가의 종주국으로써의 성격이었습니다. 즉, 유목과 농경의 두가지 국가상이 하나로 어울어져 있는 국가가 바로 고구려라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연유로 수,당과 고구려간의 70년 문명전쟁에서 키타이(거란), 말갈, 그리고 돌궐등의 유목국가들은 고구려와 연합해서 수, 당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 때도 여전히 터키인들의 조상인 우리들의 조상과 더불어 싸운 형제국가였던 거죠. 투르크의 직속 선조라 믿어지는 돌궐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6세기 중엽(수가 중국을 통일하기 수십년 전)의 일입니다.

 

서기 552년 유연(몽골의 선조로 보임)을 무너뜨리고 몽골고원으로부터 준가르분지에 이르는 일대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돌궐은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후 돌궐은 채 20년의 시간 동안 동쪽으로는 만주(고구려와 국경을 닿게 되죠), 서쪽은 비잔틴제국의 북쪽,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판도를 실현하게 됩니다.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를 석권하게 된 셈이죠.

 

그러나, 이런 대 제국 실현도 잠시 583년(수의 중국통일 6년전)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수를 멸망시킬 때 동돌궐 기마군단의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618년). 그러나, 630년 동돌궐은 내부 혼란으로 말미암아 당태종 이세민에게 복속됨으로써 그 생을 마치게 되구요.

 

서돌궐은 천산(天山) 일대를 그 근거지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서북 유라시아를 지배했습니다.(현재의 티벳, 카자흐스탄등 중앙아시아 일대) 서돌궐은 동돌궐이 멸망한 이후에도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과 동맹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공격을 가할 정도로 한 때 강성했었으나, 역시 내부혼란을 틈탄 당고종의 공격으로 657년 멸망하게 됩니다.

 

전경에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고 하듯이, 당 북서쪽의 강력한 동맹세력을 잃어버린 고구려도 결국 11년뒤인 668년 멸망하게 되구요. 이 때 패망한 투르크인들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압바스 왕조등에서 용병등으로 일하던 이들 투르크인들은 결국 투르크인들의 나라를 세우게 되고, 이것이 셀주크 투르크, 이후 오스만 투르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키운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이란 고도(古都)를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자신들의 수도로 삼은 후, 유럽의 패자가 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유럽화한 오스만 제국이 바로 터키의 전신(前身)이 되는 거구요.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죠. 우리나라의 중, 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터키는 다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합니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죠.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합니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입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죠.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犬猿之間)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한국전쟁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었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최근 대한민국 축구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닌, 더구나 한국인이 아닌.... 2002년 월드컵 당시 투르크전사라고 불리우던 터키축구대표팀의 수장이었던 현 FC서울의 세뇰귀네스감독입니다.

 

한 때 대학 교수로도 재임했었다는 귀네스감독이 얼마 전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인은 ‘빨리빨리’하는 것 등 터키인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역사공부를 해 봐서 알지만,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1,400년 가까이 지난 2005년 4월 14일, 대한민국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는 터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형제상봉의 원을 풀어주는 상제님의 공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