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일본(日本)]---[국력 한일 역전?] [일본 열도 10만㎞] ....

뚝섬 2022. 10. 8. 06:27

---[일본(日本)]---

 

[국력 한일 역전?]

[일본 열도 10만㎞]

['푸들'과 '잽' 사이]

[‘기무치치게’]

[메이지유신 전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가장 심한 욕이 '바보'인 사회]

['요시노야'-'스키야']

['규슈'라는 일본 경제의 칼날]

 

 

 

국력 한일 역전?

 

10여 년 전 일본에서 ‘버블로 GO!’라는 코미디 영화가 히트를 쳤다. 1980년대 버블 시절에 대한 일본인의 추억을 자극한 것이 주효했다. 심야 택시를 잡느라 만 엔짜리 돈다발을 흔드는 회사원, 가지도 않을 회사를 몇 군데 돌면서 면접비를 받아 유흥비로 탕진하는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80년대 당시 미국은 일본의 산업 경쟁력에 공포를 느끼며 일본 반도체 산업을 죽이고, 엔화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렸다.

 

▶엔화 강세 덕에 일본 국민소득은 2000년 세계 2위(3만9173달러)까지 올라갔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일본의 3분의1 수준(1만2263달러)이었다. 그 후 20년, 한국 소득이 3배(3만3801달러)로 뛰는 동안 일본은 마이너스 물가 탓에 고작 167달러 늘었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한국(4만3319달러·2020년 기준)이 일본(4만1775달러)을 이미 추월했다.

 

▶미국 명문 와튼스쿨과 마케팅 기업이 공동 조사한 ‘2022년 세계 국력 순위’에서 한국이 6위로 일본(8위)을 제쳤다. 국가의 민첩성, 기업가 정신 등 요소 10가지를 묶어 주관식 점수로 순위를 낸 것이다. 국력 쇠퇴는 일본인 스스로도 절감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최근 실시한 국력 평가 여론조사에서 일본인들은 정치력(강하다 5%, 약하다 58%), 군사력(강하다 9%, 약하다 50%), 외교력(강하다 5%, 약하다 61%) 등 모든 분야에서 국력이 쇠퇴했다고 자평한다.

박보검의 침대가 궁금하다면?

한국의 성장과 일본의 쇠퇴는 디지털 전환기 적응 여부가 갈랐다는 평가가 많다. 반도체, 스마트폰, 5G 등 첨단 IT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 세계를 제패했던 일본 만화 산업은 IT 경쟁력을 앞세운 한국 웹툰에 무너지고 있다. 일본에서 만화 앱 이용률 1~2위를 한국 네이버·카카오 자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코로나 선별 지원금 지급을 2주 만에 완료한 반면 일본은 전 국민에게 10만엔씩 똑같이 나눠주는 코로나 지원금 지급에도 6개월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일본을 얕볼 순 없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3조1500억달러로 한국의 7배에 이른다. 한국이 고소득 월급쟁이라면 일본은 거액 자산가다. 일본은 100년 넘는 장수 기업을 3만3000곳,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중소기업을 1000곳 넘게 갖고 있다. 한국 이제 겨우 자체 로켓을 개발했지만 일본은 소행성에 우주선을 보내 흙을 퍼 올 정도의 기술을 갖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기술 대국이다. 그 경쟁력을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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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10만㎞

 

작은 기록을 하나 세웠다. 5년 전 일본에서 산 자동차 주행 거리가 지난주 10만㎞를 넘었다. 홋카이도 북단에서 가고시마 남단까지. 찻길이 없어 항공편을 이용한 오키나와를 포함해 일본 47개 광역자치구를 빠짐없이 돌아봤다. 틈나는 대로 돌다 보니 제법 두꺼운 여행 일기가 생겼다.

전국 여행을 결심한 것은 일본 부임 8개월 뒤인 2006년 2월 시마네(島根)란 곳에서였다. 시마네현이 제정한 '다케시마(독도)의 날' 1주년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다. 일본의 시골이었다. "시골 사람들이 무슨 영토 불평이야…." 이런 기분이 앞섰다. 작은 시골의 퍼포먼스를 취재하러 온 기자 자신도 솔직히 한심했다. 하지만 기사만큼은 세게 보낸 듯하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이 당장 위기에 빠진 것처럼….

타지에 가면 밤이든, 새벽이든 운동 삼아 동네를 뛴다. 시마네현 마쓰에(松江)시에선 새벽에 뛰었다. 한참을 뛰다가 방향을 잃었다. 개천가 서민 동네에 잘못 들어갔다. 하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보도 블록 한 장 엇나가고 울퉁불퉁한 것이 없었다. 쓰레기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허름한 목조주택은 쓰러질 듯했지만, 깔끔히 정리돼 있었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화단에 물을 주고, 이웃 할아버지는 골목을 쓸었다.

일본 시골의 서민 동네가 그렇게 깔끔했다. 동네를 빙빙 돌았다. "일본에서 무엇을 보고, 한국에 무엇을 전해야 할까?" '다케시마의 날'을 기념하는 소수의 시마네보다 밑바닥까지 성실한 다수의 시마네가 더 절실히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하지 못했다. 정돈된 골목, 부지런한 노인이 '다케시마'로 흥분한 한국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두 괘씸한 일본일 뿐이다.

시마네 골목에서 "일본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여행을 시작했다. 어디를 가나 '멋진 일본'과 '나쁜 일본'이 교차했다.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의 멋진 문화유산 뒤에는 한국인의 귀무덤이 있었고, 나가사키의 장대한 산업유산 뒤에는 한국 징용자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타(有田) 도자기 마을의 사찰은 끌려온 한국인 도공의 한(恨)을 달랬다. 일본은 땅 전체가 '시마네' 같았다. 감동과 분노가 오락가락하는….

하지만 줄곧 "일본은 큰 나라"란 생각을 했다. 타국에 기대지 않아도 홀로 생존할 수 있는 땅이었다. 지역 반목도 없었다. 국민은 성실했다. 메이지(明治)유신처럼 국가 시스템을 바꾸면 언제든 대국이 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본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100년 전 상처 받은 국가의 영혼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일본 열도를 달리면서 과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단점보다 장점을 챙기는 것이 우리를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거에 대한 분노를 거두면 수많은 장점이 부각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장점을 배울수록 우리가 강해졌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섬나라 일본은 비뚤어진 역사관을 가져도 존립할 수 있지만, 문명과 세력이 교차하는 반도(半島) 한국은 과거에 집착하고 이웃과 반목할수록 국가의 기반이 허물어진다. 100년 전에도 그랬고, 10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특파원 생활을 연말에 끝낸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10만㎞ 여행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1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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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들'과 '잽' 사이

 

1956년 10월 8일 도쿄 하네다(羽田)공항에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총리가 나타났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자민당을 통합해 보혁(保革)구도의 '55년 체제'를 만든 다음해였다. 일본 언론은 이날 공항에 배웅 나온 사회당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를 주목했다. 전후(戰後) 일본 사회당의 기초를 닦은 리더로, 훗날 우익 소년의 칼에 백주 살해당한 비운의 혁명가다. 책 '쇼와사(昭和史) 전후편'은 그가 공항에서 "정열적으로" 총리를 격려했다고 전한다.

하토야마는 19일 모스크바에서 당시 소련 총리 불가닌과 일·소 국교회복선언에 서명했다. 패전국이던 일본이 독립과 경제적 번영을 약속받은 대가로 일본 열도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내용의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5년 만의 일이다. 책 '하토야마가(家)의 사명(使命)'에는 하토야마 총리의 당시 발언이 나온다. "만약 일본이 소련과 국교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시작하면 일본은 전쟁터가 된다. 이번엔 일본 전체가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廣島)의 폐허로 변하는 것이다.일본은 그해 12월 소련의 동의를 얻어 유엔 가입에 성공함으로써 국제적 지위를 완전 회복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무장관서리의 발언을 통해 이렇게 반응했다. "자유 진영의 도의로 되어 있는 반공(反共) 정책에 배반하는 처사이며, 상권(商權) 확대에 눈이 어두운 탐욕에서 오는 행동이다."(조선일보 1956년 10월 7일자)

2006년 공개된 미국 정부의 비밀 문서엔 1972년 8월 31일 키신저 당시 대통령 보좌관이 백악관 회의에서 내던진 발언이 담겨 있다. "여러 배신자들 중에서 '잽(jap·일본인을 멸시할 때 부르는 말)'이 최악이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국교정상화 움직임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쾌감이 드러나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공동성명에 서명한 것은 한달 뒤인 9월 29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세계에 충격을 던진 두달 뒤, 엉뚱하게 일본이 끼어들어 동북아시아 안보 역학을 기우뚱 바꿔놓은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다나카의 친중(親中)노선과 대립한 라이벌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였다. 하지만 후쿠다 역시 총리로 있던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 부총리를 일본으로 초청해 평화우호조약을 맺었다. 일본과 중국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 원년으로 기록된다.

이런 후쿠다 총리에게 사사(師事)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2006년 6월 30일 부시 미 대통령과 미국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저택을 방문했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 앞에서 푸들 강아지처럼 재롱을 부리는 동안, 중국에서 외교 기반을 강화하던 인물이 이번 선거를 통해 실권을 잡은 민주당 대표대행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다.

우리에게 각인된 일본의 이미지는 '푸들'이다. 고이즈미의 퍼포먼스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후 외교사를 보면 결정적 전환기에 꼭 "잽" 소리를 듣는 일본을 발견할 수 있다. 아사누마가 하토야마를 응원했듯이 당파와 정파를 넘어서는 '국책(國策)' 차원의 움직임이다.

정권 교체 후 일본의 외교 노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외교 노선을 수정할 것인가'이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전후 일본이 미국 일변도의 '요시다 노선'을 부단히 수정해온 것은 분명하다. 사실 국익을 위해서라면 '푸들'이면 어떻고, '잽'이면 어떤가. 일본은 이렇게 생각하는 나라인 듯하다. 그래서 주시해야 한다. 일본이 변신할 때마다 늘 골탕 먹은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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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치치게’

 

집 근처에 '가루비야(家)'란 숯불고기집이 있다. '가루비'는 우리말 갈비에서 나온 단어이니, '갈비집'이란 이름이다. 이 식당 메뉴를 보면 어이가 없다.

"비빈바?" 비빔밥을 뜻하는 듯한데, 'ㅂ'이 사라졌다. 일본 표기법이라면 '바푸(부)'라고 해야 하는데 이조차 생략했다. "국파?" 국밥이 틀림없는데 이번엔 '바'를 '파'로 바꿨다. "네기문추?" 네기는 우리말로 파. 그럼 '문추'는? 주문해보니 우리 파무침이다. 깍두기는 '가쿠테키'란다. '찬자'란 메뉴도 있다. '창난젓' 발음이 어렵다고 재료(명태 창자)의 우리 말을 갖다 붙인 것이다.

한국에선 '스시'를 '초밥'이라고 한다. 일본도 비빔밥을 '마제고항(混ぜご飯)'처럼 일본말로 바꾸면 쉬울 텐데 굳이 제멋대로 부른다. 다른 언어에 대한 모욕 아닌가. 때론 부아가 치민다. 일본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랬을까. 친분이 있는 재일동포 언론인 김향청('쿠리에 자폰' 편집자)씨에게 물었다. 뜻밖의 설명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야키니쿠(고기구이)집을 했어요. 우린 비빔밥이라고 말했지만, 메뉴엔 일본어로 '비빈바'라고 썼지요. 일본 손님이 '밥' 발음에 서툴렀으니까요.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국파', '기무치'도 마찬가지지요." '문추'에 대한 설명은 이랬다. "어머니는 무침을 '문치'라고 했어요. 경상도 사투리인 듯해요. 이게 변한 듯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가쿠테키'도 이남 사투리(깍대기)에서 나온 듯했다.

옛날 야키니쿠집은 대부분 동포가 운영했다. 따라서 '비빈바' '국파'란 말은 동포가 생업을 위해 확산시켰다고 짐작할 수 있다. "복잡해도 제대로 표기해야지!" 식당이 어학당이 아닌 이상 이렇게 몰아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재일동포가 옳았다. 식당이 동포 3·4세로 넘어가고 한식 주도권이 일본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일본 내 한식의 맛이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로 달달해지지만 '비빈바'는 원형을 유지하는 편이다. '국파'는 우리 중국집 계란탕 맛이고, 한국 냉면에서 나온 '모리오카 레이멘(盛岡冷麵)'은 분식집 쫄면에 물 탄 듯하다. 속을 풀려고 주문했다가 야릇한 단맛에 숟가락을 놓는 순간, 일본 '육케장'은 '육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음식도 '김치'와 '기무치'만큼 차이가 본질적은 아니다. 냄새를 없애려는 일본인의 집착 탓에 기무치는 겉절이 음식이 된 지 오래다. 발효식품인 김치와 달리, 기무치에선 유산균이 사라졌다. 김치의 맛이 시큼한 유산균의 청량감이라면, 기무치의 맛은 입에 척 들러붙는 조미료의 감칠맛이다.

당연히 '김치찌개'와 '기무치치게(チゲ)'도 다른 음식이다. 기무치는 발효가 안 되고 그냥 썩기 때문에 국물이 안 생긴다. 그래서 '기무치 맛' 가공수프를 사용한다. 싱싱한 김치국물을 한 냄비 사용하는 김치찌개와 맛도, 차원도 다르다. '기무치치게'를 '김치찌개'라고 하면, 심하게 표현해 '밀키스'를 '요구르트'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배우 정우성씨가 일본 TV에서 'kimuchichige'라고 쓴 글을 보였다가 한국에서 반성문까지 쓴 모양이다. "왜 '김치'를 '기무치'라고 썼느냐"는 비판이다. 하지만 상대 일본 여배우가 말한 것은 일본이 가공한 '기무치치게'였다. '김치찌개'가 아니다. 시시콜콜 따지려면 차라리 정씨가 '기무치' 따위를 시종 '김치'라고 말한 것을 탓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오락프로였다.

그날 방송을 본 시청자로서 전체적인 감상을 말하면, '한국 싸나이' 정우성은 정말 멋졌다. 배우는 그걸로 된 것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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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전야

 

일본 태평양 연안 구리하마(久里濱) 해안은 페리(Perry) 제독의 미 군함이 1853년 정박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이 '구로후네(黑船)'라며 두려워한 페리 함대는 4척. 페리 상륙 이후 강요된 불평등조약과, 이에 따른 내부 살육전의 참상은 개국 직후의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런 구리하마에 페리 상륙을 기념하는 '페리공원'이 있다. 그 안에 기념탑과 기념비가 있는데, 비문의 함의(含意)가 다소 달라 읽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평온한 졸음을 깨운 증기선, 단 네 척에 밤잠도 못 이뤄.' 기념비의 글을 쓴 인물은 에도(江戶) 막부의 고위 관료를 지낸 봉건영주 마나베 아키카쓰.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직면한 구세대들의 당혹스러움이 드러나 있다.

 

기념탑은 모습도 당당하고 내용도 깔끔하다. '北美合衆國水師提督佰理(페리)上陸記念碑.' 성대한 제막식이 열린 때는 상륙 48년 후인 1901년. 유신(維新)정부의 최고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기념탑의 비문을 썼다. 한 공원 안의 두 비석이 반세기 만에 공포에서 자신감으로 바뀐 일본인의 세계관을 대비시킨다.

일본의 자신감은 같은 태평양 해안선에 인접한 미카사(三笠)공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을 승리로 이끈 기함(旗艦) '미카사'를 84년 전부터 실물 전시한 공원이다. 안내판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 승리로, 일본은 독립과 안전을 유지하고,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억압받는 제국(諸國)에게 자립(自立)의 희망을 던졌다.'

우리에겐 얼핏 자가당착 같지만, 그 후 20여 년 동안 일본이 정치·외교·경제·문화 전방위에서 시대를 압도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이 세계의 무관심 속에 식민지로 전락한 일도 러일전쟁 이후 찾아온 일본의 황금기에 일어났다.

미카사공원에서 다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미 해군 7함대 시설이 있는 요코스카항(港)을 만난다. 함대 주둔의 역사는 태평양전쟁 직후 점령군이 이 항구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패전(敗戰)의 산물, 피지배의 출발점이다하지만 '닫힌 일본'을 '열린 일본'으로 바꿔 경제대국의 길을 연 결과는 '페리 상륙'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해안선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도착하는 요코하마(橫濱)의 요즘 풍경에서 확실히 가늠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945년 미군이 공폭(空爆)으로 초토화시킨 뒤 전후 일본을 지배하는 총사령부(GHQ)를 세운 곳이다.

이런 요코하마가 올해 개항 150주년을 맞았다. 6월 기념일을 앞두고 축제가 한창이다. '개항' 하면 '침탈'을 떠올리는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개방의 부작용을 개혁으로 극복하고 개방을 지렛대로 강국을 일군 역사적 승자들의 경쾌한 풍경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개방을 받아들일까. 6년 전 인천 개항 120주년을 맞아 개항 기념탑을 때려부순 것이 우리 수준이다.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세기를 두 차례나 넘기면서도 극복하지 못한 남루한 역사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자세라면 24년 후엔 개항장 전체를 때려부수는 살풀이로 150주년을 기념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물론 열린 마음으로 응전하면 앞으로 24년은 개항을 강요한 일본을 국력에서 따라잡고 역사를 축하할 수 있는 시간으로 모자람이 없다.

 

'축복의 역사'와 '저주의 역사'는 조상이 결정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결정하는 현실인 것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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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아사히(朝日)신문이 "쇼와(昭和·1926~89)시대를 생각하면 누가 떠오르는가?"란 질문을 일본인 3000명에게 던졌다. 지난 2~3월의 설문조사였다. 733명이 "쇼와 덴노(天皇)"라고 답했다. 쇼와 일왕 재임기에 대한 질문이니 충분히 예상된 응답이었다. 2등이 의외였다. 494명이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꼽았다. '쇼와의 상징'으로 유명한 가수 미소라 히바리(143명)를 3등으로 밀어냈다.

지난 2000년, 이 신문은 밀레니엄 특집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거 1000년 동안의 정치 리더는?"이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등은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2·3등은 난세를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가 차례로 꼽혔다. 이미 신격화된 이들 역사적 영웅의 바로 뒤를 이어 당시 4등에 오른 인물도 다나카 전 총리였다.

이때 아사히신문은 다나카를 이렇게 간단히 소개했다. '지방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총리. 일본열도개조론을 주장하고, 록히드사건으로 체포. 전후 고도성장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하지만 '다나카=고도성장' 이미지는 허상에 가깝다. 다나카가 총리에 오른 1972년은 일본 경제가 저(低)성장에 진입한 때였다. 그가 물러난 1974년은 석유위기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국민이 그렇게 믿는 것은 그가 '일본열도개조(국토균형발전)'란 슬로건을 내걸고 성장의 결실을 본격적으로 분배했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빈농 출신이다. 고등소학교 졸업, 요즘 학제로 '중졸(中卒)'이 학력의 전부다. 시장에서 사업 기반을 다지고 정계로 진출할 때까지 그의 일천한 배경은 핸디캡이었다. 하지만 탁월한 수완으로 자민당 본류에 진입한 뒤부터 핸디캡은 정치적 자산으로 변했다. 고도성장에서 소외된 국민이 말만 앞세우는 사회당 대신 '서민권력자' 다나카에게서 빛을 찾으려 한 것이다.

지금 다나카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바라마키(인기 영합의 분배주의) 정치로 나라 살림을 골병들게 한 원조(元祖)"란 비판론이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다나카의 분배정책이 보수의 저변과 자민당 영구집권 기반을 강화했다"는 긍정론도 있다. 지방과 서민을 자민당 보수 정치의 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다나카는 내놓고 부패한 정치가였다. ""정치는 수(數), 수는 힘, 힘은 돈"이란 어록도 있다. 그래서 그는 총리 이전부터 이후까지 줄곧 '죽이기'에 시달렸다. 언론이, 검찰이 앞장섰다. 문예춘추가 다나카의 금맥(金脈)을 파고든 것은 당돌하게 총리 재임기였다. 검찰이 록히드 수뢰사건으로 다나카를 구속한 것은 총리에서 물러난 2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정치가 다나카는 죽지 않았다. 체포 후 2심 유죄 판결까지 11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총선거에서, 다나카는 한 번도 전국 최고 지지율 기록을 놓치지 않고 당선됐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구속 이후에도, 유죄 판결 이후에도, 심지어 죽은 지금까지 그를 지지한다. 결국 그를 죽인 것은 국민도, 언론도, 검찰도 아니었다다나카를 통해 이익을 챙기던 측근들의 비정한 배신과,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난 병마(病魔)였다.

30일 일본 TV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 장면을 주요 뉴스로 방송했다. 지지자들이 뿌려대던 노란 장미, 흔들어대던 노란 풍선이 눈을 압도했다. 이게 무슨 용의자 소환 풍경인가. 창피했지만, 보이는 그대로가 현실이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노무현'은 죽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포퓰리즘의 상처는 언론의 폭로나 검찰 수사로 쉽게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우리 사회가 그가 파놓은 '계급의 골'을 메울 때까지, '노란 풍선'은 망령처럼 한국 사회를 부유할지 모른다.

 

-선우정 도쿄특파원, 조선닷컴(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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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심한 욕이 '바보'인 사회

 

일본에서 한국 깡패영화를 보면, '번역을 저렇게 하면 무슨 재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말 한마디로 관객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다채로운' 상욕들을 몽땅 '고노야로'(이녀석)나 '바카야로'(바보 녀석) 정도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귀를 막고 일본어 자막만 읽으면 서울 초등학생 저학년 싸움만도 못하다.

하지만 번역 문제는 아닌 듯하다. 뒷골목 막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본 야쿠자 영화를 보아도 상욕이란 '바카'나 '야로'를 세고 비열하게 말하는 수준에 그친다. 간혹 쓰이는 다른 욕설들도 우리말로 풀면, '멍청이' '얼간이' '똥싸개' '돼지 녀석' 정도의 의미다. '육×랄' '씨×'처럼 생명을 위협하거나 신체 일부를 조롱하는 욕설을 과문한 탓인지 들어본 일이 없다.

일본에선 '욕설'을 '아쿠타이(惡態)' 또는 '와루쿠치'라고 한다. 단어가 있는 것을 보면 욕설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일본인에게 물어도 '바카' '야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어를 아는 일본 지인 가운데에는 "한국에서와 같은 상욕은 일본엔 없다"고 잘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이니 일본에도 욕설이 없을 리 없다. 일본 전통의 축제(마쓰리) 가운데 '아쿠타이마쓰리(惡態祭)'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욕설로 싸워 욕설로 이기면 이기는 쪽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니, 예부터 다양한 욕설이 오갔음에 틀림없다. 일본의 욕설만 한 권에 묶은 책('빛나는 일본어의 욕설'·1997년)까지 있다.

하지만 이들 욕설을 문화 공간은 물론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도 듣기 힘든 것이 우리와 다른 듯하다. 욕설을 멀리하는 문화가 일상을 바꿨는지, 욕설을 입에 올리지 않는 일상이 문화를 바꿨는지 모르지만 일본의 욕설은 아무도 찾지 않는 사전 속에 포박당한 사어(死語)로 쇠퇴하고 있다.

재일한국인·중국인·빈민·장애인 등 소수파를 괴롭히던 '차별어' 역시 죽은 언어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에게 "고지키(乞食·거지)"라고 말하면 "엣!" 하면서 웃는다. 공적 영역에서 워낙 오래 금기시됐기 때문에 귀에 생소한 낡은 언어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異)민족을 경시하는 말들도 일부 편협한 사람들의 음습한 술자리 안에서 떠돌 뿐이다.

공적인 강제도 있었던 모양이다. 옛날 이야기이지만 가마쿠라(鎌倉)막부(1185~1333년)는 무가법(武家法)에 '욕설죄'를 만들었다. 막말꾼들을 매로 다스린 것이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엔 '인권'의 차원에서 사회적 규율로서 더욱 엄격하게 분위기를 다잡은 듯하다. 2002년엔 '바보'란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유명 소설을 삭제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욕설을 대하는 일반 정서가 아닌가 한다. 일본에선 인간을 평가하는 말로 '품(品)이 나쁘다·좋다'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품격이 없다·있다'의 뜻인데, 만약 누군가에게 "품이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그만큼 치욕스러운 순간이 없다. 이런 평가가 가장 자주 적용되는 경우가 바로 막말이다. 욕설이든 차별어든 비속어든 막말을 올리는 순간, 사회적 평가의 영역에서 낮은 품격을 뜻하는 '게힌(下品)'의 영역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말하는 언어 수준은 사회의 품격을 반영한다. 국민 전체가 볼 수 있는 공중파 방송이 막말로 떠들어댄다면, '그 사회는 갈 데까지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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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스키야'

 

주머니에 달랑 500엔(약 5000원) 동전 하나 있을 때, 자리 차지하고 맘 편히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일본에서 '규동' 집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규동'이란 쇠고기덮밥을 말하는데, 돼지 등뼈로 국물을 우려내는 '국민식(食)' 라멘(라면)보다 일반적으로 값이 싸다. 규동 체인의 양대 산맥인 '요시노야'와 '스키야'의 규동 값(보통 기준)은 각각 380엔과 350엔. 공원 벤치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을 작정이 아니라면 "싸게 한 끼 때우자"는 서민들에게 이만한 메뉴가 없다.

 

명색이 쇠고기를 사용하는 규동이 이렇게 싼 이유는 물론 수입 쇠고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시노야는 미국산, 스키야는 호주산을 사용한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쇠고기 산지에 대한 이들 두 기업의 집착은 철학에 가까울 정도로 완고해 일본 경제계에서 종종 화제까지 일으킨다.

2004년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면서 미국산 수입이 중단된 것이 발단이었다. 요시노야는 "미국산이 아니면 요시노야 규동의 참맛을 낼 수 없다"며 규동 판매를 아예 중단했다. 그 후 연속 적자를 버티다 미국산 수입 재개로 규동 판매를 다시 시작한 것은 2006년. 그때 '규동부활제(祭)'라는 축하 행사까지 열었으니 세상에 이런 친미(親美)기업도 없을 듯하다.

 

스키야는 반대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광우병 소동이 일어나자 즉시 재료를 호주산으로 바꿨고, 2006년 미국산 수입 재개 이후에도 계속 호주산을 고집했다. 이 회사 사장은 미국 쇠고기 가공공장을 실사(實査)한 뒤, "날림 관리체계"라며 수입을 허가한 일본 정부를 맹렬히 비판까지 했다. 이 회사의 경영철학은 '먹는 것에 대한 세계 최고의 겁쟁이 기업'.

지금 두 기업은 호각지세다. 전국 점포 수는 지난 4월 말 현재 1048(요시노야) 대 1017(스키야). 각자 기호와 판단은 다르지만 맛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요시노야안전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스키야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소비 패턴이다. 주머니에 500엔 동전 하나 가진 서민도 맛과 안전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것이다.

일본 지인에게 "일본도 30개월 이상 미국 쇠고기를 수입한다면?" 하고 물었다. 일본은 지금 미국산의 경우 20개월 이하 쇠고기만 수입하고 있다. "국민보다 요시노야가 훨씬 더 당황하지 않을까?"라고 그는 답했다. 정부가 아무리 위험하지 않다고 얘기해도 상당수 규동 팬들이 스키야로 발길을 돌릴 듯하다는 얘기였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1000엔짜리 일본산 와규(和牛) 규동을 먹을 것이다.

요즘 한국의 광우병 공포를 접하면서 한국이 두려워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한우를 한우로, 호주소를 호주소로, 미국소를 미국소로 믿을 수 있는 유리알 유통 시스템을 가졌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했을까 반성해 봤다. 결국 한국이 지금 이토록 동요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도 미국이 요구하는 쇠고기 전면 개방을 정부가 수용하면 상당한 내부 진통을 겪을 것이다. 일본 국민 역시 진실이 무엇이든 "값싸고 질 좋은 고기"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종적이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까지 거리로 나와 "미친 소, 너나 처먹으라"는 살벌한 구호를 외치진 않을 것이다. 싫으면 안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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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라는 일본 경제의 칼날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열린 회사 행사에 참여하려다 큰 실례를 했다. 한국에서 오는 여성 경제인들을 공항에서 맞아야 하는데 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비행기로 서울~후쿠오카는 1시간20분, 도쿄~후쿠오카는 1시간50분. 서울 손님들보다 도쿄에서 먼저 이륙했는데도 비행기가 연착하니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보통 '일본이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를 변명하는데, 사실 요즘 더 쉽게 통할 수 있는 변명은 '한국이 일본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시간만이 아니다. 요금도 도쿄~후쿠오카가 왕복으로 10만원 정도 비쌌다. 이것은 사람의 왕래만이 아니라 물류(物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서울지회가 주최한 행사 목적은 도요타자동차 시찰과 세미나였다. 도요타는 본사가 나고야(名古屋) 인근, 아이치(愛知)현 도요타(豊田)시에 있다. 하지만 도요타의 최고급 브랜드를 생산하는 곳은 후쿠오카현의 도요타자동차규슈(九州)다. 도요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후쿠오카를 택했던 것이다. 본사 인근 다하라(田原)공장도 렉서스를 생산하지만 최신 시설이 집약돼 외부 공개를 거의 하지 않는 곳이다.

후쿠오카를 선택하니 아이치와 다른 또 한 가지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산기지 외엔 아무 자원도 없는 도요타시와 달리 '온천'이라는 훌륭한 관광자원이 있다는 점이었다.

'편리하군'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후쿠오카는 무서운 미래를 우리에게 제시할 수도 있다. 1년 전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가 '규슈 독립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후쿠오카가 포함된 규슈의 희한한 움직임을 소개한 일이 있다. "일본에서 분리돼 독자적 FTA(자유무역협정)를 한국과 맺자"는 주장이 규슈 경제인들에게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규슈의 경제 의존도가 일본 수도권보다 한국 쪽으로 기울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미 규슈 관광을 대표하는 온천과 골프산업은 한국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 뿌듯해할 일은 아니다. 이 현상을 달리 표현하면, '규슈의 관광산업이 한국에서 맹렬히 돈을 긁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규슈 때문에 제주도가 파리를 날린다면 규슈는 결코 한국 경제의 동반자가 아니다. 지금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더욱 한국을 두렵게 하는 존재는 '도요타'처럼 지척에 있는 일본의 산업기지다. 후쿠오카의 도요타는 '렉서스' 한국 수출 물량의 75%를 생산한다. 지리적 근접성을 이용한 것이다. 현대차의 생산기지인 울산과 후쿠오카가 얼마나 가까운지 지도만 쳐다봐도 한국 자동차업계는 모골이 송연해야 정상이다. 같은 곳에 일본 양대 자동차 회사인 닛산과, 도요타 계열사인 다이하츠 생산기지도 있다도시바, 소니의 반도체 생산기지가 있는 곳도 관광지로 유명한 오이타(大分)와 구마모토(熊本)다.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자 후쿠다 총리가 "한일 FTA 재개"를 언급했다. 물류의 벽이 무너지는 FTA란 경제적 의미에서 '규슈'란 이름의 거대한 제조업과 관광기지가 한국에 새로 생긴다는 것을 말한다. 이중삼중의 유보 조건을 만들어도 언젠가 도요타규슈는 무관세로 울산을 향해 자동차 선박을 띄울 것이다. 이대로라면 제주도가 규슈에 당한 것보다 더 강한 강도로 현대차는 당할지 모른다. 규슈는 한국을 향한 일본 경제의 칼날이다.

 

-선우정 도쿄 특파원, 조선닷컴(0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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