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풍자영화 ‘돈 룩 업’과 확증 편향 부추기는 대선판]
[22사단이 ‘별들의 무덤’ 된 진짜 이유]
[동맹을 코너로 몰면 안 된다]
트럼프 풍자영화 ‘돈 룩 업’과 확증 편향 부추기는 대선판
[노정태의 시사哲]

일러스트=유현호
미시간 주립대 천문학과 박사과정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런스)는 인생 최고의 날을 맞이했다. 태양계를 감싸고 있는 오르트 구름에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지도교수 랜들 민디 박사(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계산해본 결과, 혜성은 지구로 향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산 크기의 돌덩이가 정확히 6개월 14일 후에 지구에 충돌한다. 모든 생명체를 멸종시킬 것이다.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는 백악관으로 찾아갔다. 방문 당일에는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고, 이튿날 드디어 대통령과의 면담을 갖게 됐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이 영 이상하다. 리얼리티 쇼 스타 출신의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리프)과 그 아들인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은 사태를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3주 후로 다가온 중간선거에 불리할 수 있으니 ‘기다리면서 상황을 보자’는 소리나 한다.
분노한 민디와 디비아스키는 방송에 출연한다. 문제는 그 방송이 진지함과 거리가 먼 잡담 위주의 토크쇼라는 것. 혜성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농담 따먹기로 일관하는 진행자에게 디비아스키는 정색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죄송한데 저희 말이 어렵나요? 저희가 하려는 말은 지구 전체가 파괴될 거라는 얘기예요. 지구 전체가 파괴된다는 소식은 재밌으면 안 되는 거예요. 무섭고 불편해야 할 소식이라고요.”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의 한 장면이다. 미국 정치, 특히 공화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혜성’은 현실화되고 있는 기후 위기를 상징한다고 감독 스스로가 밝힌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품의 메시지를 그렇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패턴은 국가와 문화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이니 말이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의 원래 신념을 유지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경향성을 일컫는 용어다. 본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나와도, 어떻게든 논리를 끼워 맞추고 때로는 증거를 무시하거나 아예 왜곡·날조하는 행태가 바로 확증 편향이다.
확증 편향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심리학적으로 입증됐다. 그중 하나. 스탠퍼드대 학생들에게 사형제도에 대한 자료를 나눠주었다. 그랬더니 사형제에 찬성하는 이들도 반대하는 이들도 모두 그 자료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해석했다. 문제는 두 그룹의 학생들이 모두 같은 자료를 제공받았다는 것. 선입견에 따라 데이터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읽은 셈이다.
철학은 오늘날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상당 부분을 심리학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확증 편향은 철학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골칫거리였다. 르네상스 시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대표적이다. 중세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경험주의의 포문을 열었던 그는, 대표작인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확증 편향의 작동 방식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어떤 입장을 택하고 나면 그것을 지지하고 확신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설령 기존의 입장을 반박하는 훌륭한 사례가 넘쳐난다 해도, 최초의 결론을 희생하는 대신 반대되는 증거를 거들떠보지 않고 무시하며, 때로는 폭력과 부당한 편견을 동원해가며 거부하고야 마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유명한 ‘4대 우상’ 때문에 확증 편향 같은 오류에 빠진다고 보았다. 심리학자들은 어떨까? ‘확증 편향’이 아니라 ‘우리 편 편향’이라고 보는 게 맞는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인류는 협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진화했다. 구석기 시대의 원시인이라면 객관적 증거를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논쟁하느니 가족과 동료의 견해를 따라 움직이는 게 생존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확증 편향은 득이 아니라 독이 될 때가 많다. <돈 룩 업>으로 돌아가 보자. 올린 대통령은 날아오는 혜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들을 무시하며, ‘위를 보지 말라(Don’t look up)’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전에 몰두했다. 부족주의적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효과적인 선거운동이다. 문제는 그게 나쁜 판단이라는 데 있다. 결국 인류는 혜성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SNS로 잡담이나 하다가 파멸을 맞이한다.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희비극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혜성이 날아오고 있지는 않다. 기후변화는 심각한 문제지만 두 달 안에 결판날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마냥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은 아니다. 철책을 뛰어넘어 귀순했던 탈북자가 같은 경로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과 중국은 대만을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의 힘겨루기를 이어나간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대북 안보 이슈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린, 아니 문재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신년사를 통해 “정부는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까지 남북 관계 정상화와 되돌릴 수 없는 평화의 길을 모색할 것”이라며 종전선언을 밀어붙이겠다고 선포했다. 주한미군을 내쫓기 위한 포석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여론은 잠잠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시작전권을 신속히 환수하자고 기름을 끼얹는다. 좌충우돌 자중지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야당은 제대로 반발조차 하지 않는다.
북핵의 위험이 현실화하면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은 끝장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에이, 북한이 핵을 왜 쏴, 그럼 다 죽는 건데’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당 지지자뿐 아니라 야당 지지자 중에서도 드물지 않다. 북핵 문제가 별거 아니라는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것이다. 우리의 현실 감각은 대체 얼마나 망가진 걸까. 문득 민디 박사처럼 소리 지르고 싶어진다. “제발 즐거운 척 XX 좀 그만해요. 어떨 땐 할 말을 제대로 전해야 하고 듣기도 해야 해요.”
<돈 룩 핵(核)>. 2022년 1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절찬 상영 중인 블랙 코미디의 제목이다. 물론 실화다. 확증 편향의 대가는 혹독하다. 날아오는 혜성을, 날아올지 모르는 핵을 못 본 척하면, 몰살당한다. 하지만 미리 좌절하지는 말자. 우리에게는 아직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조선일보(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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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안방처럼 넘나든 월북자…
22사단이 ‘별들의 무덤’ 된 진짜 이유
새해 또 뚫린 동부전선, 軍 기강해이만 원인일까
1년여 전 강원 고성에서 철책을 넘어 귀순했던 남성이 새해 첫날 똑같은 수법으로 월북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일명 ‘별들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은 22사단에서다. 해당 남성은 육군 제22보병사단의 책임 경계구역에 있는 관문을 3개나 통과해 북한으로 향했다. GOP(일반전초) 철책을 넘고, GP(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주변의 감시 장비에 포착된 뒤, MDL(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철책을 넘어 비무장지대에서 포착되기까지 군은 2시간 40분 동안 월북자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다.
문제는 22사단 경계망이 뚫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점이다. 최근 들어서만 해도 ‘노크 귀순’(2012년) ‘점프 귀순’(2020년) ‘오리발 귀순’(2021년)’ 그리고 이번 ‘새해 월북’ 사건까지 4건에 이른다. ‘군의 기강 해이’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지만, 국방 전문가들과 최근 22사단에서 복무를 마친 장병들이 짚은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래픽=김현국
◇最북단‧最전방‧最장 구역의 부대
22사단은 동해안과 휴전선이 만나는 ‘동부전선’의 최전방 지역.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곳에 있는 사단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창설돼 2020년 12월 지금의 3개 여단과 1개 포병여단을 갖췄다. 경계 책임구역은 내륙 28㎞, 해안 69㎞로 총 97㎞에 달한다. 보통 한 사단이 책임지는 구역이 25~40㎞인 것에 비하면 22사단 경계 구역은 최대 4배 가까이 넓은 셈이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곳은 군에서 유일하게 산악, 해안을 동시에 경계하는 곳인데, 보통 사단처럼 1만~1만5000명대 병력이 이 넓은 지역을 책임지니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등산로, 관광지와 인접한 탓에 일반인 수색에 병력을 투입하는 일도 잦다. 실제로 장병들은 봄에는 나물 캐는 사람들, 가을에는 산삼을 캐러 민간통제구역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업무까지 하고 있다. 22사단 GP 상황병으로 전역한 민모(22)씨 역시 “이상 징후가 보이면 여단 내 모든 비상 출동조가 3~4시간씩 수색에 나서는데, 그나마도 부족한 병력이 이런 일에 낭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가을엔 심마니들을 단속하러 투입된 병사가 낙상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22사단의 책임구역 부담은 더 커질 예정이다. 인구 감소에 대비한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군은 내년까지 22사단의 상급 부대인 8군단을 해체하고, 22사단과 23사단을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2사단 포병대대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강모(26)씨에 따르면 군 생활 중 월남 사건으로 대기하는 상황이 3번 가까이 있었다. 강씨는 “통신분과 유선반은 원래 인원이 적은데, 복무 기간 동안 인원이 감축돼 처음보다 업무량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 했다. GP에 근무했던 민씨는 “새로운 인원이 충원되지 않아 몇 달씩 휴가 못 가는 병사들이 많았다”며 “새벽에 북측에서 화재가 발생해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간신히 꺼진 적이 있었는데, 비상 근무자 전원이 대기 상태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신 과학 장비 무력화한 ‘이것’
국방개혁 계획에 따르면 군은 2022년까지 13만명쯤 병력을 줄일 예정이다. 이런 병력 감소를 대비할 방법으로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도입됐다. 군이 ‘물샐틈없다’고 자랑한 이 시스템은 CCTV 카메라, 열상 감시장비(TOD), 광망 철책 등으로 이뤄져 있다. 철책에 설치된 광망(철조망 센서)이 동작을 감지해 경보를 울리면, CCTV가 자동으로 해당 구역을 비춰 감시병이 이를 확인하는 시스템이다. TOD는 빛이 없는 곳에서도 물체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감시하는 별도의 장비다.
과학 장비라 할지라도 만능은 아니다. 특히 체감기온 영하 40도의 한겨울 고성 날씨는 이를 무력화하기 좋은 요건이다. 22사단 GOP에서 TOD 장비를 다뤘던 감시병 출신 정모(27)씨에 따르면 한 사람이 4~8시간씩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확인해야 한다. 그는 “추운 겨울이 되면 TOD 장비가 가동을 멈추는 날이 한두 번씩 있었다”며 “매뉴얼대로 수리를 해도 정상 가동까지 1시간 이상 걸렸고, CCTV는 아예 터져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이화여대 북한학과 박원곤 교수는 “지난 1일 일어난 월북 사건은 CCTV 감시병과 추후 사단의 대처가 미흡했던 부분도 있지만, 줄어든 병력을 과학 장비에만 의존하려 했던 지도부 또한 책임이 있다”며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감시병 한 명이 CCTV 모니터 15~20대를 수 시간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장비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유능한 ‘별’이 부임한들
지금까지 사단 내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문책성으로 사단장이 해임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22사단에 ‘별들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실제로 22사단은 창설 이후 지금까지 8명이 징계를 받았고, 2009년 이후에만 5명이 해임됐다. 작년 한 해만 ‘동해 민통선 침입 사건’ ‘군 내 성추행 피해자 2차 가해’로 2명의 사단장이 해임됐다. 이번 사건으로 현 사단장이 또 교체될 경우 임기 한 달도 못 채운 ‘최단기 해임’을 기록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유능한 사단장이 와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과는 똑같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원곤 교수는 “사건 재발 방지가 목표라면 해임 대신 책임지고 사건을 조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애초에 접경 초소에 주어진 역할보다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양욱 연구위원은 “GP나 GOP는 대규모로 진격하는 적군을 빨리 알아채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며 “작정하고 몰래 접근하는 1~2명을 완벽히 막으려면 초소가 아닌 국경 수비대를 설치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9·19 남북군사합의(2018년) 조항이 아니었다면 접경 지역 경계가 더 수월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남북군사합의 1조 3항은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들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양욱 연구위원은 “남북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위와 같은 조항을 두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열악한 초소에서 서로를 감시하는 것보다 UAV(무인비행기) 등을 띄우는 것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경계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지인 기자, 조선일보(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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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을 코너로 몰면 안 된다
[朝鮮칼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호주 방문 당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남북한이 모두 종전 선언에 대해 원칙적으로 찬성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전제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철회를 내세우고 있고, 이 때문에 남북 간, 미북 간 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맹 정치에서 ‘동맹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라는 것이 있다. 어느 일방이 공개 발언을 통해 상대방을 비난받고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이도록 압박하는 상황을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몇 주간 종전 선언과 관련해 바이든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 대통령의 호주 캔버라 성명은 사전에 워싱턴과 조율됐는지 여부가 완전히 불분명하다. 미국과 한국은 지난 몇 달 동안(대부분 한국이 요청해) 종전 선언에 관해 공을 들였지만, 이러한 논의는 마무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문 대통령의 발표는 다소 시기상조였다.
워싱턴의 전문가들도 바이든 행정부에서 그런 발표를 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의 회담 조건이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종식이라고 해도 한국 정부는 이를 미국에 떠넘길 것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 미국이 얼마나 자주 북한에 비적대적 입장을 표명했는지 옹호하는 입장에 서야 했다. 예를 들면 1993년 6월 미·북 공동성명에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위협·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듬해 10월 미·북 기본 합의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확언했다.
클린턴 2기 때인 2000년 미·북 공동성명에서 양측은 서로 적대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과거의 적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확인했다. 2002년 2월 김대중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고, 2005년 9월 6자 회담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도가 없다”고 확언했다. 이어 2006년 11월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한다면 안보 협정을 맺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북한에는 평화와 경제적 기회로 이어지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2009년 11월 “미국은 북한에 다른 미래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북한은 더 큰 안전과 존중받는 미래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2018년 7월 김정은과 벌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의 갈등이 내일의 전쟁일 필요는 없다”며 “역사가 계속해서 증명하듯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1989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 대통령,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적어도 40차례에 걸쳐 북한에 적대적 의도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근거로 미국은 북한에 비적대적인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이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북한에 대해 비적대적 의도를 명시적 언어로 표현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종전 선언이 대화 재개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켜 상황을 심각하게 악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 또한 미국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재인 정부는 대북 담화에서 비핵화라는 말을 드물게 사용하면서 비핵화를 낮은 순위로 격하했다. 그리고 북한을 회담에 복귀할 수 있도록 양보(즉 비핵화 없는 제재 완화)로 평화 선언을 보완하는 공을 다시 미국으로 넘긴 것이다. 또 탄도미사일 실험이 없다고 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휴전 발언은 대중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 열 적외선을 사용한 CSIS의 최근 위성 사진은 북한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이 완전히 가동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더 많은 핵무기를 생산한다는 의미다.
한국과 미국이 종전 선언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북한은 이를 ‘종이 한 장’ 정도로 받아들이고 제재 완화, 합동 군사훈련 중단, 주한 미군 철수, 미국 핵우산 폐기 등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선언이 한반도의 평화가 북한의 끊임없는 핵무장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공인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빅터 차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 조선일보(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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