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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안전은 국가 무한 책임”이라던 文.. ] [19살 학생 속였다가.. ] [싸우면서 건설했다]

뚝섬 2022. 1. 19. 06:19

[“국민 안전은 국가 무한 책임”이라던 文의 ‘강 건너 불구경’]

[19살 학생 속였다가 불신임 당한 대한민국 대통령]

[싸우면서 건설했다]

 

 

 

국민 안전은 국가 무한 책임”이라던 文의 ‘강 건너 불구경’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진이 2017년 12월4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앞서 영흥대교 낚싯배 전복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4일 수석회의를 인천 낚싯배 참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가의 책임”이라고 했다. 얼마 후 충북 제천에서 화재 참사가 일어나자 현장을 방문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은 분명 울고 계셨다. 국민을 위해 울어주는 대통령”이라고 했다. 한 달 후 경남 밀양 화재 참사 때도 비슷했다. 2019년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때는 외교부 장관을 사고 대책 본부장으로 만들어 현장에 보내기도 했다.

 

집권 초 문 대통령은 지나칠 정도로 대형 사고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세월호 참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월호 현장 방명록에 “미안하고 고맙다”고 쓴 사람이다. 사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을 둘러싼 논란과 괴담이 문 정권 출범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은 국민 안전과 관련해 그런 제스처도 하지 않는다.

 

광주 화정 아파트 붕괴 참사는 문 정부 5년 동안 국민 안전 문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주 학동 건물 붕괴 참사로 17명이 떼죽음을 당한 지 반년 만에 붕괴 사고가 일어나 1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졸속 공사, 부실 자재, 재하도급 등 드러나는 문제도 비슷하다. 사고가 일어난 지 8일이 지났지만 아직 실종자 5명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른다. 문 대통령은 현장에 수석보좌관을 보냈다. 국민 안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대통령의 태도만 변했다. 이런 가운데 KTX 탈선, 물류센터 화재 등 언제든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안전사고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집권 초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하자 밤 1시에 장관과 참모들을 청와대에 불러 NSC(국가안보회의) 전체 회의를 열었다. 취임 첫해에만 NSC를 8차례 주재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을 땐 “무모한 도발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었다. 대통령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 일도 담을 쌓았다. 북한이 해수부 공무원을 사살했을 때도,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을 때도 NSC를 주재하지 않았다. 북한이 올 들어 4번째 미사일을 동해로 발사하자 문 대통령은 해외에서 “한반도 상황 관리에 만전을 기하라”고 했다. 이런 문 대통령이 해외에서 가수의 쇼를 본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강 건너 미사일 구경을 하고 있다”는 말이 지나치다고 하겠나.

 

문 대통령은 작년 9월 “우리 정부는 말년이라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민 안전과 안보에 손을 놓은 듯한 그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겐 해외 순방만 말년이 없는 듯하다”고 한다. 틀리는 말인가.

 

-조선일보(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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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학생 속였다가 불신임 당한 대한민국 대통령 

 

2020년 9월 서해상에서 북한군 총격에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부인 A씨(왼쪽)와 형 이래진 씨(가운데), 법률대리인 김기윤 변호사가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사건 발생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실종 해수부 공무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반환하기 위해 청와대 업무동으로 향하다 경찰에 저지되고 있다. /연합뉴스

 

재작년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돼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의 아들이 18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받았던 무책임하고 비겁했던 약속의 편지는 더 이상 필요 없다”며 청와대에 반납했다. 고3인 이군은 “대통령께서 편지로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약속했지만 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거짓말일 뿐이었다”며 피살 당시 정보를 공개하라고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19살 학생을 속였다가 불신임을 당한 것이다.

 

이군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대통령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면서 “결국 편지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면피에 불과했다”고 했다. 유족들은 문 대통령 편지와 정보 공개 1심 판결문을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지만 경찰이 막았다. 청와대에 전화를 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 흘리던 유족들이 편지를 길 위에 내려놓자 경찰이 이를 주워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이군은 재작년 문 대통령에게 “아빠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 이 나라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편지를 썼다. 청와대는 이씨가 북 경비선에 발견됐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3시간 후 이씨는 사살됐다. 청와대는 다음 날에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문 대통령은 자고 있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이군에게 “직접 챙기겠다”고 편지로 약속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족의 전화와 방문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정보 공개를 거부하다 법원의 일부 공개 판결이 나오자 항소까지 했다. 말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이군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낙인에 육사 진학을 포기했다. 어린 딸은 아직 아빠의 죽음을 모른다. 1주기 때 제사도 못 지냈다. 이군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편지까지 썼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믿지 못하니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한 것이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공무원을 살리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풀어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씨가 죽은 다음날 문 대통령은 아카펠라 공연을 관람했다. 이군의 절규에 대해선 아무 답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과의 종전선언이라는 평화 쇼에만 관심을 보여왔다. 열아홉 학생이 ‘이게 나라냐’고 절규하지 않을 수 있나.

 

-조선일보(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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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서 건설했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3%를 기록하여 목표인 7.1%를 훌쩍 뛰어넘었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그때 뒤집혔다. 1967년 시작된 제2차 계획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1964년 베트남 파병에 이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상당한 외자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경공업을 뛰어넘어 중공업까지 지향했고, 거기 맞춰 현대자동차(1967년 12월)와 포항제철(1968년 4월)이 설립되었다. 그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5%에 이르러 다섯 번의 개발계획 중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체제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초초했는지, 북한의 도발이 유난히 잦아졌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공작원들이 서울로 내려와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는 동해 공해상에서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 호를 나포했다. 11월에는 120명의 무장공비가 민중봉기를 꾀한다면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여 많은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이승복 어린이와 그 가족들도 희생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동해에서 미 해군 정찰기(EC-121)가 격추되어 30여 명의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그러자 남한 정부도 강하게 대응했다. 간첩신고와 반공사상 고취를 위해서 전국의 산악과 해안 지역에 ‘멸공소년단’과 ‘멸공부녀단’을 조직했다. 1961년 제정된 이래 사실상 사문화되었던 향토예비군설치법도 발동했다. 1968년 4월 창설된 향토예비군의 모토는 “싸우면서 건설한다”였다.

 

1968년과 1969년은 실로 싸우면서 건설하는 시기였다. 안팎의 온갖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경제성장률이 13.2%와 14.6%를 기록했다. 모레는 그 대장정의 계기가 된 날이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다가와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학생들까지 희생되었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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