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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나] [“공부 부족한 운동권, 도덕적 우월 의식.. ]

뚝섬 2022. 1. 19. 06:15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나] 

[“공부 부족한 운동권, 도덕적 우월 의식이 자기 성찰 방해”] 

[공산당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람들] 

[北을 사랑해 눈에 콩깍지가 씐 사람들]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나

 

한때 세계 3분의 1 점령… 경제난·자유억압이 몰락 불러 

 

1982년 3월 19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의 제17차 전당대회 모습. /위키피디아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들이 최근 베트남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어요. 베트남은 1975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뒤 인권 탄압으로 종종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반체제 인사 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자 미국 등이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규탄 성명과 경고 메시지를 낸 거지요. 1990년대 옛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 국가 대부분은 자본주의로 전환했지만 아직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과 더불어 중국·북한·쿠바·라오스 등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한때 전 세계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퍼졌지만 이제는 처참한 실패로 대폭 쪼그라든 거지요.

공산(共産)주의는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이에요. 물건을 생산하려면 기계나 건물, 사람 등이 필요하죠. 이를 생산수단이라 하는데 자본주의에선 이걸 개인이 갖지만 공산주의는 그 사회, 결국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해요. 생산물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같이 생산하고 분배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공(共)산(産)인 겁니다. '공장을 가진 사장' '내 토지에 세운 농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거지요.

1917년 러시아에서 소련 탄생하며 현실화

공산주의는 원래 수렵 사회에서 다 같이 사냥하고 농사를 짓고 공동체가 나눠 가진 데서 유래했어요. 이것을 원시공산주의라고 해요. 이를 대중적인 관념으로 발전시킨 게 19세기 독일 출신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예요. 당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중세 토지를 독점하던 귀족 세력이 약해지고 생산수단(자본)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약진하면서 세상은 자본가노동자, 둘로 나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기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경제적 불평등을 혐오하면서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가 혁명으로 권력을 쥐고 생산물을 다 같이 평등하게 나눠 가지는 공산주의 사회가 찾아올 거라 예언합니다.

마르크스 사상은 사실 당시엔 다들 꿈같은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1917년 러시아에서 실제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면서 현실화해요. 차르(황제) 통치 아래 전제군주국이던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했죠. 소비에트는 러시아 말로 평의회·대표자 회의를 뜻하는데 노동자·병사·농민이 참여하는 조합이자 정치조직을 가리키는 용어죠. 소비에트 결성을 주도한 레닌은 러시아제국을 공산화한 뒤 주변 국가들과 공산 동맹을 맺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蘇聯·USSR)'을 창설했어요. 이때 나중에 독립하는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15국이 소련이란 이름 아래로 편입됩니다.

그런데 레닌이 1924년 죽은 뒤 집권한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들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일인 독재를 강화해 공산주의란 이름이 무색한 사회로 만들었어요. 러시아 공산화 이후 인근 루마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도 영향을 받아 공산화하면서 이들은 서방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동맹으로 뭉칩니다.

이어 중국도 공산화 대열에 합류합니다. 1921년 마오쩌둥 등이 공산당을 창당해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세웠죠. 마오쩌둥은 모든 산업 시설과 토지를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을 운영하는 공산주의 실험을 단행하면서, 경제 성장을 목표로 대약진운동을 전개했어요. 우리나라는 한때 중국을 중공(中共)으로 불렀는데 공산당 체제라는 것을 강조한 명칭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에 이어 베트남과 쿠바·몽골·캄보디아·북한·콩고·에티오피아 등이 잇따라 공산주의 정부를 선언합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동유럽, 자본주의 국가는 서유럽에 많다 보니 이 대립을 전에는 동서 냉전(冷戰·Cold War)으로 불렀죠.

경제 성장 더디고 외부 변수 대응 어려워

그러나 공산주의는 경제 수단을 정부가 다 관리하다 보니 복잡한 생산 과정을 모두 통제할 수 없어 경제 성장이 더디다는 약점이 태생적으로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외부 변수에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고요.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개인들이 각자 필요에 따라 기업을 만들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조정이 이뤄지며 경제가 발전합니다. 더 많이 성과를 내면 더 많은 보상이 돌아와 다들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에선 국가 명령에 따라 일일이 매일 생산량을 정해줍니다. 일하건 놀건 월급이 똑같이 나오고, 뭘 더 사고 싶어도 국가가 분배량을 정해주니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길 리가 없지요. 이런 모순이 쌓이면서 공산주의 국가에선 나중에 생필품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됩니다. 다들 적당히 일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으니까요.

여기에 공산당 일당 독재는 민주적인 의사 표현을 최대한 억눌렀습니다. 누구도 공산당에 저항하는 의견을 낼 수 없었어요. 공산당에 반기를 든 인사들은 잡아 가두거나 추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면서 국민들은 점점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더구나 공산당 간부들은 특권 계층으로 자기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니 공산주의 체제가 오래 가긴 어려웠겠죠. 결국 실망한 국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민주화 혁명을 일으켜 몽골·캄보디아·콩고·에티오피아 등이 하나둘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선거를 거쳐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어요. 소련도 과도한 군비 지출과 저조한 경제 성장 등으로 무너지고 해체됐습니다.

여전히 경제 수준은 저조하대요

사실 공산주의란 이름으로 남은 나라들도 이미 자본주의 개념을 많이 들여왔습니다. 중국은 마오쩌둥 사후 집권한 덩샤오핑 주도로 1980년대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요소를 채택했어요.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을 지향합니다. 기업에 이윤 추구를 허용한 결과, 알리바바나 틱톡 같은 글로벌 기업도 나왔죠.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1당 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셈이죠.

베트남도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외부 자본 투자를 유치해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려고 1992년부터 쇄신을 뜻하는 '도이 머이'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동안 금지했던 자본주의 교과목을 합법화하고, 국가와 사회를 재구성할 전문가를 양성하며, 외국인 소유 공장에서 제조하는 공산품을 수출하면서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했어요. 북한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요소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 계획경제 체제하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지요. 이 국가들의 경제 수준은 여전히 저조합니다.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은 중국이 1만610달러(약 1265만원), 베트남이 2660달러(약 317만원)로 세계 100위권에 겨우 들고, 쿠바와 북한은 순위 밖에 머물고 있죠.

이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일당 독재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체제 비판 인사들에 대한 인권 탄압 문제가 대두되기도 합니다.
 

(좌)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를 선포한 1961년 쿠바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 (우) 카를 마르크스. /위키피디아

(좌) 이오시프 스탈린. / (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가운데). /위키피디아

 

-정효진 양영디지털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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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부족한 운동권, 도덕적 우월 의식이 자기 성찰 방해”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을 만난 곳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이 단체의 회의실이다. 그는 20년 넘게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는 동안 테러 위협 때문에 공개적인 사무실을 둔 적이 없다. 거주지도 가족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는 “늘 조심해야 하는 생활이 아내와 두 아들에겐 미안하다”고 했다.-양회성 기자

 

《현 정부의 주축인 1980년대 중후반 학생 운동권 출신들 가운데는 당시 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58)이 수시로 작성해 회람시킨 팸플릿 ‘강철서신’을 읽으며 북한에 대한 동경을 키운 이들이 많다. 1991년 김일성이 보내준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 번 만나고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주사파의 대부’는 1997년 전향한 후로는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강철서신’의 영향을 받았던 친북 정부로부터 북한 민주화 운동이 탄압을 받고 있다니 ‘업보’라 해야 할까. 북한이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하겠다’고 벼르는 터라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 국회의원 수준의 경호를 받고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만났다.》

 

北인권단체 탄압, DJ-노무현 정부 땐 없었다”

 

현 정부 출범 후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나.


“정권 바뀌자마자 기업 후원이 80% 줄었다. 원래 기업들은 대북 사업의 가능성을 고려해 북한 인권 단체에 후원을 잘 안 한다. 그마저도 끊긴 거다. 정부와 관련된 곳의 강연 요청도 끊겼다. 대북 단체들의 주 수입원인 미국 국가민주기금회(NED)와 북한인권법에 따른 미 국무부 예산 지원으로 버틴다.”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단체 2곳의 설립 인가를 취소하고 탈북·북한 인권 단체 25곳을 사무검사하고 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도 검사 대상인가.

“등록 요건 점검 대상인 64개 비영리 민간단체에 속한다. 1999년 12월 창립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북한에서 대북전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니 대북 단체 탄압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땐 지원도 없었지만 탄압도 없었다.”


대북 단체 활동을 했던 전수미 변호사가 ‘북한 인권 단체에 지급된 후원금 일부가 유흥비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일부 탈북민이 법률지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예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단체가 있다. 통일부도 이 문제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라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바로잡아 발전시키려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북전단 살포 금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북전단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전단 살포 실험을 했는데 풍향이 좋을 때도 북한에 가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드론을 쓰지 않으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통일부가 대북 라디오 방송 제한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라디오 방송은 북한 정권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다. 청취율 조사를 하면 1∼3%가 나오는데 1%만 돼도 25만 명이 듣는다는 얘기다. 다행히 방송을 제한할 방법이 없다.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미국 방송이고, 우리가 하는 국민통일방송은 콘텐츠는 여기서 만들지만 전파 발신지는 중앙아시아, 송출은 영국 회사가 한다. 외국 회사를 어떻게 제한하나. KBS 라디오 방송도 있는데 수십 년 전통의 대북 방송을 금지할 수 있을까.”

 

이인영 장관, 민족해방론 공부 제대로 안 한 사람”

 

운동권 출신 여권 인사들은 왜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미워하나.


북한 체제를 선망했던 사람들이다. 탈북은 북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부도덕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정서가 습관이 된 듯하다. 아니면 진실과 대면하려는 용기가 없거나.”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민족해방(NL: National Liberaton) 주사파로 통하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출신이다. 그런데 장관 인사 청문회에선 ‘대학생 시절에도 주체사상 신봉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라고 했다.

스스로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히 선망했을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임종석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공부를 더 안 했다심상정 노회찬 김성식 같은 민중민주(PD: People’s Democracy) 그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NL 그룹 중 주체사상이 뭔지 제대로 답하는 사람은 100명 중 1명도 안 될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정서에 기초한 집단이다. 친북 반미 반일 우리민족끼리 이런 정서가 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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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과 PD와 IS?

 

NLPDR 이론의 분파과정입니다... 80년대 후반에 대두된 사회변혁운동이론들입니다. 본래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이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85년에 소위 '삼민투'(민족, 민중, 민주)가 있었구요... 1986년에 '민민투'(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와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로 나뉘게 됩니다. 1987년에는 'NL'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지요...

NLPDR의 주요 내용은 영문에서 드러나듯이... 민족해방이란 측면과 민중민주주의란 측면을 같이 담고 있는데... 전자에 비중을 둔 이론이 NL, 후자에 비중을 둔 이론이 PD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NL계열인 자민투는 반미반제(反美反帝)를 우선적인 투쟁과제로 주장한 반면에, PD계열인 민민투는 파쇼타도를 우선적인 과제로 주장하였습니다.

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계급문제보다는 민족문제가 더 공감대를 얻으면서, NL이 주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민족해방은 또한 '민족통일'을 떼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임수경 방북등 사건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래서 한때 그들을 '주사파'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굳이 NL과 PD를 나누다 보니 구분하게 되었지만, 실제 80년대 후반에 소위 '데모'를 하거나 '운동권'이라고 자칭하던 학생들 중 대부분은 두 이론 측면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측면을 다 가지고 있기도 했었죠... 서로 상충된다기보다는 포인트가 다른 데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 87년에 NL은 고대를 중심으로, PD는 연대를 중심으로 이론적 진전을 보입니다. 86년 자민투와 민민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에서는 이론적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서울대의 자칭 NL주의자들은 오히려 PD적 경향이 강하구요... 자칭 PD주의자들은 NL적 경향이 강합니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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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 정서도 강하지 않나.

“원래 친중은 아니었다. 운동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인데 중국 문화대혁명을 미화한 책이다. 그런데 중국이 문화혁명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가면서 운동권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졌다. 논문이나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글을 보면 현 정부가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뚜렷한 이념이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중국이 경제적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으니 척지면 안 된다 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반미보다 반일 정서가 더 강한 것 같다. ‘토착왜구’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주사파 대부’라 불리는 입장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구시대적인 반일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할 때 빼고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없다. 중국 중화주의, 아랍 민족주의, 아프리카 민족분쟁을 봐도 그렇지 않나. 1인당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민족주의 의식이 약해진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극복했어야 했는데, 최고위급 관료들까지 반외교적 언사로 일본을 공격한다.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반일 정서는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패거리주의 강한 NL, 민주적 사고-행동 훈련 못 받아”


―NL
이 공부 제대로 한 PD를 제치고 주류가 됐다.

“제대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주류가 될 수 있었다. PD 그룹은 이념에 기초한 조직이어서 이념적 토대가 변화하면 결속력도 약해진다NL 그룹은 이념 자체가 빈약한 대신 인적 유대와 패거리주의가 강하다.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따라 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그런 문화가 강했다. PD가 엘리트주의적인 데 비해 NL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면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6월 민주항쟁 때 NL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중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다른 그룹이 주도했다면 민주항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화엔 공이 있지만 민주적이진 않다.

민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2012년 이석기 의원의 통진당 부정 경선 사태가 터졌을 때 난 놀라지 않았다. 경기 남부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사파라도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그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중앙위원장이던 시절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회 책임자였다)”

민주화에 공이 있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도 강하다.

“야권은 도덕적 우월 의식이 없다 보니 자기 성찰을 하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 반면 운동권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재돼 있던 사고방식을 끄집어내 성찰하려는 자세가 안 돼 있다. 대학 다닐 땐 탄압받는 위치였으니 문제될 게 없었는데 지금은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고 돈도 여기저기서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니….

학생 시절 이념 성향으로 지금의 정치 성향을 규정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만큼 예전 생각이 변하지 않은 듯하다.

공부가 부족해서다. 시대 변화에 따라 반미를 했던 논리가 바뀌면 반미를 안 하게 된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반미 할 때도 논리적이지 않았으니 반미의 논리가 바뀌었다고 미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그냥 마음속 깊숙한 정서를 따라간다.”

 

북한의 정권교체, 인생을 걸 만한 가치 있는 일”


그는 학생 시절 지하혁명조직 민혁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적발돼 고문당하고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전향 후 북-중 국경지대를 오가며 북한 내 지하혁명조직 ‘횃불’을 만들어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2012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114일간 구금돼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하나.

“중국에 일시적으로 나오거나 체류하는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에서 수년간 쌓아온 조직활동 노하우를 전수해준 뒤 북한에 가서 활동하게 한다.”

중국 입국 금지 후 활동이 어렵겠다.

“위축됐지만 멈춘 건 아니다. 2011년 김정은 집권 후부터 이미 국경 통제가 심해져 운동에 타격을 받고 있었다. 부정부패 단속을 엄격히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북한 주민들도 줄었다고 한다. 국경 넘을 때 경비대원 몫으로 떼 주는 뇌물이 예전엔 300달러였는데 지금은 3000달러다. 뇌물 받다 걸리면 총살이다. 탈북민 수도 줄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들 중엔 조국 전 장관,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없나.

“친척 어른들이 아깝다, 아깝다 하신다. 공부를 했으면 판사가 됐을 거고, (전향하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장관이 됐을 텐데 하신다. 하지만 북한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북한 곳곳에 생겨나도록 하는 것,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전에 민주화된 북한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나.

“그런 믿음이 없으면 이 일을 하겠나.”

 

주사파 운동권 길을 함께 걷던 동지들이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간다. 정권의 실세로 자녀의 해외 유학비 출처를 추궁당하는 고위 관료들, 북한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혁명가, 그리고 종북 세력의 핵심으로 정당 활동을 하다 헌법재판소의 해산 선고를 받은 정치인도 있다. 중국에서 추방된 후 현장에서 멀어진 그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잊게 될까 두려워 겨울에 난방을 끊고 산다고 했다. 냉골에서 겨울을 나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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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람들

 

운동권에 中·北 공산당은 여전히 애틋한 그 무엇
美 전문가들 미·중 대결 시 韓은 100% 중국 편 판단
우리는 중국서 벗어난 뒤 사상 최고 번영기 맞았지만 20~30년 뒤에도 그럴까

 

한·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홍콩과 위구르는 중국의 내정"이라고 말했다는 중국 측 발표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말한 건 시진핑 주석이고 문 대통령은 "잘 들었다"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 정상 발언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외교의 기본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중국에 항의도 정정 요청도 하지 않았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때 일본과 발표 내용이 달랐다고 흥분해 펄펄 뛰던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이 정권은 미국·일본 등 전통 우방 앞에서는 당당하게 '철수하려면 하라' '사과하라' '양심이 있느냐' '무례하다'고 외치면서도 북한·중국의 공산당 앞에만 서면 다소곳해진다. 한국민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세습 권력제, 우상화 독재, 고문과 공개 처형 등이다. 그걸 다 하고 있는 북한 노동당 앞에서 한국 민주 정부가 절절맨다. 북한의 첫 핵실험 직후 개성에서 북 노동당 인사들과 만난 한국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밥을 먹다 춤을 췄다. 우리를 겨냥한 미사일을 난사하고 '겁먹은 개'라고 해도 눈치를 본다. '김정은 이벤트'를 이어가려는 안간힘이겠지만 그 바탕엔 노동당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깔려 있다.

1948년까지 남로당(남한 노동당)은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정당이었다. 6·25 이후엔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국 독재 정부와의 투쟁이 운동권 이념을 반미 좌파로 만들었다1970~80년대 대학가에 리영희 책이 퍼지면서 반미·좌파가 운동권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결국 북한 노동당을 추종하는 주사파까지 등장했다. 당시 주사파에게 북한 노동당과 중국 공산당은 '이상향'과도 같았다. 그 후 소련이 무너지고 공산권과 북한의 허구가 드러나 큰 좌절을 맛봤지만 이들에게 공산당은 여전히 애틋한 그 무엇이다. 문 대통령이 평양 연설에서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다"면서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고 했다. 여기에 노동당에 대한 문 대통령의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 대항하는 G2로 떠오른 중국 공산당은 한국 운동권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존재처럼 됐다. 2003년 방중(訪中)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인으로 '마오쩌둥'을 꼽았다. 마오는 김일성과 함께 6·25 남침을 기획했고 대규모 파병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은 장본인이다. 중공군에게 죽고 능욕당한 우리 국민이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현재의 한반도 질곡도 그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마오를 제일 존경한다고 한다. 자식이 아버지 죽인 사람을 제일 존경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동경, 흠모 없이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노 대통령과 후진타오가 함께 한 기자회견은 필자의 기억 속에 고양이와 쥐가 나란히 앉은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2017년 방중한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면서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몽(夢)에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외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그 나라를 추켜세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원수가 제 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스스로 비하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것은 상대를 우러러보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중국 공산당 원조 찬양자이자 숭배자인 리영희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대통령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다면 이렇게 쉽게 3불(不)로 중국에 한국 군사주권을 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진핑이 한국 대통령 특사를 홍콩 행정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은 사드 보복이지만 한국을 보는 시각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미국 대통령에게 말한 사람이다. 한국 특사는 중국에 이 의전을 변경할 것을 정식 요청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 특사가 지방 장관 자리에 앉아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절절맨다. 중국의 폭력적 대외정책을 겁낸 탓도 있겠지만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열등의식' '작은집 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미국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중 대결에서 일본은 100% 미국 편에 서고, 한국은 100% 중국 편에 선다고 보고있다. 한·미가 결국엔 갈라설 것이란 예측이다. 중국 세력권에 있을 때 한국은 세계 최빈국을 면치 못했다. 모욕과 굴종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벗어나자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가 찾아왔다. 공산당 앞에만 서면 기를 못 펴는 사람들은 이번이든 다음이든 앞으로도 권력을 잡는다. 20~30년 후 한국이 어디에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양상훈 주필, 조선일보(1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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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을 사랑해 눈에 콩깍지가 씐 사람들

 

北 미화한 리영희 "내 제자들 남측 사회 쥐고 흔든다"더니 바로 그렇게 된 현실
北과 사랑에 눈이 멀면 리영희가 말했던 대로 북 核 보유 돕게 될 것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김정은이 편지에서 자신에 대한 찬사를 계속해주자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TV가 트럼프에게 "주민을 억압하고 굶주리게 하고 이복형을 암살하는 사람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나도 안다. 나는 애가 아니다"고 했다. "나는 김정은을 정말 믿는다. 하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만 지금 김정은이 필요하며 그에게서 무언가 자랑할 만한 것을 얻어낼 수 있다면 사랑 고백이라도 왜 못하겠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거래하는 중이지 사랑 때문에 눈에 콩깍지가 씐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협상을 하는지, 사랑으로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5년 북의 지뢰 도발 때 우리 군이 북 지역으로 155㎜ 자주포 29발을 동시 사격하자 북은 협상을 먼저 제안해 왔다. 북측 황병서는 우리 측 대표였던 김관진 안보실장을 화장실까지 따라와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 협상에서 북은 휴전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도발을 사실상 시인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것이 협상이다.

2006년 북이 첫 핵실험을 감행해 민족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졌을 때 개성공단에서 남북 행사가 열렸다.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막 시작된 그 엄중한 시기에 민주당 대표단이 북측과 점심을 먹다가 일어나 춤을 췄다. 이것은 사랑에 눈이 먼 것이다. 협상인지, 사랑인지는 저자세로 굽실거리는지를 보면 된다. 협상이라면 상대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북과 사랑에 빠진 정권의 관료들은 북 앞에서 저자세로 나가게 된다. 통일부 장관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연인에 대해 특별 기준을 적용한다. 다른 사람은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연인이 하면 '불가피한 것' '특수한 사정' '일리가 있다'고 한다. 콩깍지가 씐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이 핵개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 그러다 북이 핵개발을 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의 핵개발에도 일리가 있다고 한 것이 그 예다. 한국에서 누가 세습 왕조를 세우려 하면 목숨 바쳐 싸울 사람들이 북한의 김씨 왕조에 대해선 '가족주의적 나라'라고 한다한국 내 인권엔 편집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 말살에 대해선 '특수한 사정'이라고 한다.

눈에 콩깍지가 씌면 미운 것도 곱게 보인다. 북한은 대표적으로 실패한 국가다. 평양을 벗어나면 변변한 도로 하나, 철도 하나도 없다. 아직도 먹는 문제조차 해결이 안 됐다. 그런데 전시 무대로 꾸며놓은 평양만 보고 "놀랍다"고 감탄한다. 이들도 북한 현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머리는 아는데 가슴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것만 보인다. 북한 IT 수준이 한국보다 높다고 한 전직 장관도 나왔다. 정신병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들의 북한 사랑은 역사가 오래다. 이승만·박정희와 싸우다 보니 이승만·박정희의 적(敵)이 마음속, 이념 속 동지가 된 것이 그 시초가 아닐까 한다. 이들은 별 예외 없이 리영희의 제자들이다. 리영희는 중국 문화혁명을 미화한 사람이지만 북한 사랑의 원조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성(姓)조차 북한식 '리'를 고집했다. 그는 북핵 위기가 시작된 1992년 '북이 핵을 포기한다고 미국의 대북 정책이 수정되지 않는다. 일단 국제 사찰에 개방되면 그것(핵)을 재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빨 빠진 새끼 호랑이가 되는 셈'이라고 북에 충고했다. 북에 절대 핵을 포기하지 말고 국제 사찰도 받지 말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기적적 성취는 철저히 무시하고 북에 대해선 '새 나라 혁명과 열기가 충천한 사회' '북한 주민이 강냉이 죽만 먹고 영양실조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남쪽 권력이 주입한 고정관념'이라고 했다. 그때는 이미 북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 죽고 있을 때였다. 리씨의 한국·미국 저주, 북한 사랑, 중국 공산당 미화는 1970년대 운동권의 성경처럼 됐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밝혔듯이 대부분이 이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가 1980년대 주체사상파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2007년 리영희를 만난 북한 내각참사가 "리 선생이 민족적 선의에서 쓴 글을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리씨는 "(내가) 20~30년 길러 낸 후배와 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 리영희가 말한 그대로다.

 

-양상훈 주필, 조선일보(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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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李泳禧)

1929년 (음력) 생(故人)

(전)한양대 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인 , 교육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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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관심 따라 정부도 '종전 선언'서 '제재 완화'로 총대 바꿔 멘 건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달 초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때 "종전 선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는 종전 선언이 아니라 대북 제재 완화였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7월 초 폼페이오의 3차 방북 때만 하더라도 종전 선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북 외무성은 "종전 선언을 하루빨리 발표하는 것이 신뢰 조성을 위한 선차적 요소"라고 했다. 미국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북은 선전 매체들을 동원해 "남조선 당국도 종전 선언 문제를 수수방관하지 말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도 종전 선언 채택을 위해 총력전을 폈다. 문 대통령은 정전협정 65주년인 올해 안에 종전 선언을 하는 것을 핵심 국정 과제로 내세웠고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일단 종전 선언 하고) 문제가 생기면 취소하면 그만"이라는 외교 상식에 어긋나는 얘기까지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종전 선언이 우리의 외교적 과제"라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일 "미국이 종전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도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우리 정부 내에서도 종전 선언 얘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제재 완화'가 부상했다. 민주당 대표와 외교장관은 국감장에서 미리 입을 맞춘 듯 '5·24 조치 해제 검토'를 언급했고 대통령 안보특보는 외신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서 대북 제재 수위를 낮추는 방안이 공개적으로 고려되고 있다"고 했다. 급기야 문 대통령도 이번 유럽 순방길에 "유엔 제재 완화를 통해 북한 비핵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대북 정책의 주제어가 소리 소문 없이 종전 선언에서 대북 제재 완화로 바뀐 배경이 뭘까 궁금했는데 결국 김정은의 관심사가 그렇게 변해 있었던 것이 확인됐다.

 

정부는 북한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다. 북한에 핵 목록 신고 등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하라고 설득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국제사회도 한국 정부가 김정은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한·프랑스 정상회담에서 "제재 완화"를 제안했다가 "실질적 비핵화가 될 때까지는 제재를 계속해야 한다"는 거부 답변을 들었다.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문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 것은 한국이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뜻도 담고 있다. 무엇을 하든 대북 제재만은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일보(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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