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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선을 넘다] [러시아 침략 명분이 ‘평화’, 이게 국제 정치 ‘평화’의 본질] ....

뚝섬 2022. 2. 23. 09:11

 

[러시아 침략 명분이 ‘평화’, 이게 국제 정치 ‘평화’의 본질]

[50년 전 닉슨과 마오쩌둥 밀담]

[푸틴, 돈바스 진군 명령… 국제공조 참여가 北 도발도 막는 길]

[키예프 루스]

 

 

 

러시아 침략 명분이 ‘평화’, 이게 국제 정치 ‘평화’의 본질

 

22일(현지시각) 친(親)러시아 반군이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 러시아군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이 진입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가 21일 우크라이나에 군 병력을 진입시켰다.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 지역에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병력 파견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그 본질이 이웃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략한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 국영 보도기관들은 우크라이나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지만 조작된 뉴스였다.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으로 대응하면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전면 공격에 나설 것이다.

 

러시아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8년 조지아 침공도 분리·독립을 추진하던 남오세티야에 평화 유지군을 파견한다며 시작했다. 조지아 정부군이 반격하자 이를 이유로 조지아에 대한 전면적 군사 공격을 했다. 결국 남오세티야는 러시아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 때도 러시아는 크림반도 내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보냈다.

 

1973년 베트남전 종전에 합의한 파리협정도 이름은 ‘평화협정’이었다. 미국과 남·북 베트남은 종전을 약속하고 미군은 철수했다. 협정 주역이었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북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둑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그 후 북베트남의 군사 공세가 시작됐고 2년 후 남베트남은 항복했다. 이것이 ‘평화 협정’의 결과였다.

 

평화는 소중한 가치이지만 국제 정치에선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나 구실로 흔히 이용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구공산권 국가들은 평화를 정치 전략의 도구로 삼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5년 동안 ‘남북 평화’를 내세웠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인됐다면서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두 번의 미·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모두 ‘평화’를 외쳤지만 김정은에게 평화의 뜻은 핵 폐기가 아니라 핵을 보유한 채 대북 제재를 허무는 것이었다. 같은 ‘평화’라는 말을 두고 생각은 정반대다. 대선이 끝나면 북한의 ‘평화 공세’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 평화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말이 아니라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조선일보(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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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닉슨과 마오쩌둥 밀담

 

50년 전인 1972년 2월 22일 마오쩌둥(왼쪽)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을 공식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동서 데탕트의 물꼬를 트는 계기였다./신화/AFP 연합뉴스

 

1968년 소련이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탱크로 짓밟았다. 미국 등 서방은 충격을 받았다. 1969년 중국과 소련이 우수리강과 신장 등 국경에서 무력 충돌했다. 4300㎞가 넘는 중·소 국경에 150만 군대가 대치하더니 ‘핵 공격’ 위협까지 주고받았다. 미·중 모두 소련의 패권을 견제해야 했다.

 

▶50년 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마지막 날 ‘황제’를 만날 것이란 예측을 깨고 도착 몇 시간 만에 마오쩌둥과 비공개 회담했다. 소련 얘기는 서로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오는 뜬금없이 “중국 군대는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닉슨이 골치 아파하던 베트남전에 6·25 때처럼 중공군이 참전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마오는 “우파를 좋아한다”고도 했다. 당시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우파 청산’을 해놓고 ‘우파인 미 공화당 집권이 즐겁다’고까지 했다.

 

▶닉슨은 “일본이 국방을 위한 군사력이 없는 편이 더 나을까”라고 물었다. 일본 재무장에 대한 마오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닉슨 방중 결과인 상하이 코뮤니케(공동선언)는 ‘대만이 중국의 일부’이고 ‘미국은 대만 주둔 군대를 감축할 것’이란 내용이 핵심이다. 닉슨 방중에 앞서 대만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유엔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미·중 비밀 협상으로 대만의 안보와 독립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닉슨은 마오에 이어 저우언라이를 만나 “남이든 북이든 한국인은 충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호전적인 사람들이 우리 두 나라(미·중)를 곤궁에 빠뜨리는 사건을 일으키지 않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한반도가 (미·중) 갈등의 장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했다. 중공군에 맞서 같이 피 흘렸던 동맹국 맞나 싶은 말이다. 저우는 닉슨의 주한미군 감축에 감사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방중 1년 전 닉슨이 주한미군 2만여 명을 뺐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이런 밀담 내용을 까맣게 몰랐다.

 

▶닉슨 방중 50주년인 21일 닉슨 방중을 수행했던 미 국무부 전 차관보는 “시진핑 주석의 개인 숭배 부활과 철권 통치가 마오쩌둥과 비슷하다”고 비난했다. 닉슨 방중이 열었던 미·중 ‘데탕트(긴장 완화)’가 지금은 꿈같은 얘기로 들린다. 이제 중·러가 밀착해 미국을 견제한다. 시진핑·푸틴 정상 회담만 40회에 육박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때나 지금이나 세계는 ‘스트롱맨’들의 세상이란 것이다. 지금 우리 머리 위에서 이들이 어떤 밀담을 나누는지 알 수 없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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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돈바스 진군 명령… 국제공조 참여가 北 도발도 막는 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 지역인 돈바스 지역(도네츠크, 루한스크)의 독립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들 지역에 러시아 군대를 파견해 러시아 정부가 ‘평화유지 활동’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스크바=AP 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군의 진입을 명령했다. 돈바스에 세워진 친러 분리주의 세력의 자칭 ‘인민공화국’ 2곳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에서다.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주권 침해라며 즉각 단계적 제재에 착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국가안전보장회의·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연석회의를 주재하고 “한국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우크라이나 문제의 평화적 해결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의 돈바스 파병 명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서막일 것이다. 돈바스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래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 세력 간에 교전이 끊이지 않던 지역이다. 푸틴은 크림반도 합병 때처럼 돈바스의 두 공화국을 합병해 러시아연방에 편입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군이 돈바스에 진입하고 우크라이나군이 대응하면 본격적인 무력충돌, 전면 전쟁의 개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푸틴은 ‘평화유지’를 내세웠지만 우크라이나 영토와 주권을 유린하는 폭거를 가리기 위한 노림수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그간 돈바스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하며 자국민으로 취급해 왔다. 그래서 러시아군의 돈바스 진입이 ‘침공’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도 예상된다. 하지만 주권국 영토 침략이라는 중대한 국제법 위반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 금융·경제 제재를 경고해 왔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한국에도 당장 발등의 불이 됐다. 정부는 교민의 대피·철수계획 시행에 들어갔고 에너지 원자재 등 공급망 차질과 세계 금융시장 불안 같은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을 주시하고 있다. 미국 주도로 러시아에 대한 수출규제 등 제재 시스템이 본격 가동되면 우리 기업들의 피해를 감수하는 국제적 제재 대열에 동참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나아가 신냉전 대결을 틈탄 북한의 모험주의적 도발 가능성을 경계하며 엄중한 대북 경고도 해야 한다. 정부가 평화적 해결 노력에의 동참 수준을 넘어 도발자 응징을 위한 국제공조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동아일보(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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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우리가 지켜준다’는 강대국 말 믿고 방심했다가 존망위기에… 이런 만시지탄 또 있을까.

 

-팔면봉, 조선일보(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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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1100여년 전 세워진 '루스의 나라'… 두 국가의 뿌리

 

①2016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옆 광장에 세워진 17m 높이의 동상.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키예프 루스’를 통치했던 블라디미르 대공이에요. ②1899년 루 스인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루스는‘항해술이 뛰어난 사람’을 뜻해요. ③키예프 루스를 통치한 스뱌토슬라프. ④어린 스뱌토슬라프를 대신해 섭정을 한 어머니 올가. /위키피디아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을 두고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는 2016년 수도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크렘린궁 성벽 바로 옆 광장에 17m 높이의 동상 하나를 세웠는데요.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대공의 동상이었어요. 키예프 루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9세기 무렵 세워진 국가예요.

지난해 7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은 모두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고대 '루스'의 후손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여기서 '루스'는 키예프 루스를 의미해요.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를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키예프 지역을 '러시아의 뿌리'라고 여겨요.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을 키예프 루스의 후손이라고 생각해요.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해 국가명을 '루스 우크라이나'(Rus-Ukraine)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어요. 키예프 루스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10년간 영토 확장한 '키예프의 광개토대왕'

키예프 루스는 슬라브족 중에서도 동슬라브족이 세운 국가예요. 루스는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인데요. 오랜 세월 이웃의 다른 민족들과 싸우며 동슬라브족은 단결하게 됐고, 9세기 초 키예프 루스의 영토는 동슬라브족의 거의 절반을 통합할 정도로 커지게 됐어요.

그런데 9세기 중엽 이 땅에 바이킹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나타납니다. 바이킹의 지휘자 중 한 명인 올레크는 부하들과 함께 키예프를 점령하고, 대공이 돼 본격적으로 국가 기틀을 마련해요. 하지만 키예프 루스는 단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공국이 연합한 형태였어요. 통합이 강화되는 데 있어 이후 여러 대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그 첫 번째 인물이 스뱌토슬라프였어요. 그는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정복한 군주로 유명해서 '광개토대왕'에 비유되기도 해요. 스뱌토슬라프는 아버지가 다른 부족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올가가 섭정했는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귀족들에게서 아들을 보호해줬죠. 그는 962년 실권을 잡으며 정치 전면에 등장합니다. 스뱌토슬라프는 궁보다 전쟁터에 있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 '전쟁의 왕'이었습니다. 10년간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치르며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크게 넓혔어요. 동쪽으로 볼가강과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죠.

968년부터는 발칸반도도 공격했어요. 불가리아 왕국의 득세를 우려한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으로 불가리아 왕국을 공격해 수도를 장악했죠. 발칸반도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 했던 스뱌토슬라프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려고까지 했다고 해요. 하지만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키예프가 세력을 넓히려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결국 한때 동맹을 맺었던 사이었지만 두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집니다.

패자는 스뱌토슬라프였어요. 971년 키예프 루스는 크림반도와 발칸반도를 모두 포기하고 비잔틴제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비잔틴제국과 강화해요. 키예프로 돌아가던 스뱌토슬라프는 다른 부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는데,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고유 풍습에 따라 스뱌토슬라프의 해골에 금을 입혀 술잔을 만들었다고 해요.

비잔틴제국에서 그리스정교 받아들여

전사한 스뱌토슬라프의 막내아들이 바로 블라디미르 대공입니다. 그는 통치자로서 키예프 루스를 정치·문화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죠.

그의 치세 때 벌어진 중요한 일을 하나 꼽자면 비잔틴제국에서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인 거예요. 그리스정교는 가톨릭·개신교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종파로 꼽히는데요. 블라디미르는 989년 비잔틴제국의 공주 안나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이고, 백성들도 이 종교를 믿게 했어요.

이 시기 그리스정교의 영향으로 교회슬라브어인 키릴문자가 개발됐고, 향후 건축과 예술이 한층 발전하는가 하면 법률이 진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후 백성들의 삶을 잘 살피고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도 해요.

혼인 정책으로 유럽과 교류

키예프 루스는 블라디미르의 아들 대에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1036년 블라디미르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야로슬라프가 다른 형제들과의 치열한 전쟁 끝에 통치자로 등장했어요. 그는 수많은 그리스 서적을 독파하며 '현자'로 불렸던 인물이에요.

그는 잇따른 지역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주민들을 엄격하게 다스렸어요. 한편으로는 영토 확장과 안정에도 힘을 썼죠. 대외적으로는 유럽 여러 왕실을 대상으로 혼인 정책을 취하며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했어요. 야로슬라프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결혼했고 세 딸을 노르웨이·헝가리·프랑스 왕에게 시집보냈어요. 세 아들은 유럽의 공주들과 결혼시켰죠.

야로슬라프는 최초의 법전을 제정하고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는 등 교육·문화 발전에 앞장섰어요. 수도 키예프는 수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키예프의 중심부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소피아 대사원이 세워지기도 했죠. 또 교회를 비잔틴교회에서 독립시키고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며 지금의 러시아 정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어요

하지만 야로슬라프의 손자이자 비잔틴제국 황제의 외손자였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치세를 끝으로 키예프 루스는 내리막길을 걷게 돼요. 12세기 초 키예프 루스는 몇몇 독립된 공국으로 분열됐고, 각 공국의 공후가 자신의 공국을 다시 아들들이나 형제들에게 나눠 주면서 여기저기 소공국이 생겨났죠.

무역로의 변화도 쇠락의 요인 중 하나였어요. 11세기 이후 유럽과 소아시아, 유럽과 비잔틴제국을 잇는 무역로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유럽에서 성장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를 통해 비잔틴제국과 소아시아와의 무역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키예프를 거쳐 갈 필요가 없어졌고, 상업 중심지로서의 키예프 지위도 약화됩니다. 이후 키예프 루스는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프랑스가 미개하다고?]

야로슬라프의 딸인 안나는 프랑스 국왕이었던 앙리 1세에게 시집을 갔는데요. 그녀는 18살 때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등을 구사했다고 전해져요. 안나는 1060년 앙리 1세가 세상을 떠나고 7살인 아들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6년간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합니다.

안나가 1050년 키예프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제가 와 있는 나라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몰라요. 주택은 칙칙하고, 교회는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해요"라는 내용이 등장해요. 당시 키예프 루스의 높은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프랑스는 그 이후인 12세기부터 문화적 전성기를 이뤘다고 합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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