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40일, 점차 드리우는 0選의 그림자
조각 과정서 아쉬운 정치인지 감수성
묻지마 식 탈정치가 과연 절대선인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전까지 ‘선출직 0선’이라는 사실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이 모두 있다. 우선 플러스 요인. 여의도에 빚진 게 없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정치를, 더 정확히는 과감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주변의 우려에도 경선 과정에서 김종인과 결별하고 막판에 안철수와 별다른 협상도 없이 전격적인 단일화를 이뤄낸 게 그러하다.
하지만 당선 이후 40여 일 동안 용산 집무실 이전 결정과 인선 논란을 보면서 이제는 0선의 그림자도 드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기존 정치적 문법과 무관하게 당선되어서인지 여의도가 관행적으로 중시해 온 안배, 고려, 여론 살피기 등을 그다지 감안하지 않는다. 그 대신 효율,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 자신과의 호흡이 핵심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했다. “국정운영이라는 게 대단한 뭐가 있다기보다는 상식을 갖고 전문가, 관료 중 능력 있고 검증된 사람을 잘 뽑아 쓰면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원론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최근 인선 등을 보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물론 효율이나 성과는 중요하다. 공정, 상식 못지않게 문재인 정부에서 간과된 가치들이다. 문제는 여기에 집중하려다 보니 기존의 정치 문법에서도 물려받아야 할 것들이 동시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중 핵심은 최고 지도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정치인지 감수성이다.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정치 초짜라는 사실을 드러내왔다. 오히려 자신의 브랜드로 삼았다. “내가 정치언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꿔 말하면 기존 정치적 화법, 상황 인식을 몰라도 첫 번째 선출직 도전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자기 스타일의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당선인이 간과하고 있는 정치인지 감수성의 요체는 뭘까. 내가 사실이라 믿는 것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라고 필자는 본다. 윤 당선인이 능력을 보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생각하더라도, 사람들은 적폐청산 수사를 위해 최측근 인사를 발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선인은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범법 사실 이전에 새 정부 조각에서 조국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긴다. 이런 괴리가 길어지면 민심과 역주행하게 되고, 사람들은 당선인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국정은 기업도 검찰도 법정도 아니다. 효율, 성과, 법리적 팩트만으로는 온전히 꾸려가기 어렵다. 정치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고차 방정식이다. 수십 년간 쌓인 정치 혐오가 0선의 윤 당선인을 불러냈으나, 그에게 여전히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게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윤 당선인이 기자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고 거의 혼밥을 하지 않을 정도로 소통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만남 자체가 목적이거나 보여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나고 밥 먹는다고 통치를 위한 정치인지 감수성이 저절로 키워지는 건 아니다. 당선인이 세상과의 진짜 소통을 통해 0선의 그림자를 서서히 거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승헌 부국장, 동아일보(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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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새 이름
로마의 중심부 팔라티노 언덕에는 로마 황제들이 500년간 통치했던 팔라티노 황궁이 있다. 황궁엔 새 이름이 자주 붙었다. 도미티아누스와 세베루스는 자기 이름을 붙인 황궁을 새로 지었다. 네로는 황금 궁전을 세우고 나서 ‘도무스 아우레아’라고 부르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 334m 절벽에 황궁을 짓고 ‘빌라 요비스(제우스의 집)’라고 불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집무실 이전을 준비중인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뉴시스
▶미국 백악관(White House)은 원래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이라 불렸다. 미·영 전쟁 때 영국군이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탄 외벽을 백색 석회 도료(백악)로 단장하면서 이름이 이렇게 바뀌었다.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인 ‘엘리제(Élysée)궁’은 샹젤리제 거리와 가까워 이 이름이 붙었다. 엘리제는 그리스 신과 영웅이 죽은 뒤 가는 천국을 뜻하기도 한다. 영국 총리 집무실 ‘다우닝가 10번지’는 거리 명을 그대로 땄다. 일본과 독일 총리 집무실은 ‘관저’ ‘연방총리청’이라고 불린다.
▶중국 주석이 거주하며 집무를 보는 곳은 ‘중난하이(中南海)’라고 부른다. 베이징의 큰 호수인 ‘중해’와 ‘남해’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다. 15세기 이반 대제 때 지은 러시아의 대통령궁 ‘크렘린(Kremlin)’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나 요새라는 뜻이다. 북한 김일성의 집무실은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렸다. 하지만 김정일과 김정은의 집무실은 노동당 1호 청사(본부 청사)로 불린다. 그 지하 깊은 곳에 진짜 집무실이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북한 주석궁을 보고 호화 대통령궁을 지은 뒤 ‘인민궁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세계에서 셋째로 큰 건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때 집무실인 경무대(景武臺)는 경복궁(景福宮)과 그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다고 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의 파란 지붕에 착안해 청와대(靑瓦臺)로 개칭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새 집무실 명칭이 무엇일지 화제다. 인수위 사람들은 용산(龍山)과 청와대(Blue House)를 합성해 ‘DH’(Dragon House)나 ‘용와대’라 부른다고 한다. “BH에서 DH로~”라는 건배사도 있다.
▶인수위는 대통령 집무실의 새 이름을 공모하고 있다. 친숙하면서 의미도 담기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지금까진 집무실을 단순히 ‘청(靑)’이라 표기했다. 짧고 쉬웠다. 그런데 앞으로 ‘용(龍)’이라고 하기는 이상하고, ‘대(大 또는 臺)’나 영문 ‘DH’도 어색한 것 같다.
-배성규 논설위원, 조선일보(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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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건힐

주한 미군들은 한국어 지명을 발음하기 쉽게 영어식으로 자주 바꾼다. 미 보병 2사단 부대가 있던 동두천(Tong Du Cheon)은 이니셜만 따서 TDC라고 한다. 용산(龍山)은 지명의 뜻을 영어로 옮겨 ‘드래건힐(Dragon Hill)’로 부른다. 남산은 산(mountain)보다 언덕(hill)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산 미군 기지의 사우스포스트엔 드래건힐 호텔이 있다. 한국에 배속된 미군이 자대에 배치되기 직전 머무는 곳이어서 미군은 드래건힐이라는 지명에 꽤 익숙하다.
▷다음 달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겨간다. 드래건힐 호텔에서 직선거리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은 기존 청와대(Blue House)의 약칭인 ‘BH’를 대신해 요즘 ‘DH’라는 말을 자주 쓴다고 한다. 용산 시대를 상징하는 임시 용어인 셈이다. 인수위 측은 다음 달 15일까지 공모를 거쳐 올 6월 초쯤에 대통령실의 공식 명칭을 발표할 예정이다. 영어 약칭도 발표할 수 있다.
▷용산 대통령실의 모델은 미국 백악관이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취임 2년 뒤인 1792년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의 사후인 1800년에 완공됐다. 공식 명칭은 ‘대통령의 집(President‘s House)’이었다. 이름처럼 대통령 집무실 겸 숙소였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때 하얀 건물이 새까맣게 불에 탄 적이 있는데, 그해 신문에서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1901년 리모델링을 끝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을 공식 명칭으로 채택했다.
▷청와대 경내에는 숙소동과 집무동이 모두 있지만 용산 대통령실엔 집무동만 있다. 미군 기지가 추가로 반환되면 집무동 인근에 관저를 신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시점을 예상하기 어렵다. 당분간은 차로 3∼5분 거리인 한남동 합참의장 공관이 대통령 숙소가 된다. 일본은 총리가 집무를 보는 관저(官邸)와 숙소인 공저(公邸)가 각각 있다.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프랑스의 엘리제궁 등 유럽은 대부분 관저와 집무실이 한곳에 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에서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로 옮겼을 때 1층은 집무실, 2층은 숙소였다. 용산 시대는 74년 만에 대통령이 일하는 곳이 곧 대통령의 집인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주의 시절을 거치며 청와대에는 구중궁궐 속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생겼고, 민주화 이후 대통령은 집무실 이전을 시도했다. 찬반 논란 속에 용산 이전을 고집한 윤 당선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용산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정원수 논설위원, 동아일보(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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