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가야금 배우는 외국 아이들] [ ..‘보통 국가’ 일본.. ] .... [첫 문장]

뚝섬 2022. 10. 25. 09:30

[가야금 배우는 외국 아이들]

[특별하지 않은 ‘보통 국가’ 일본과의 대면] 

[적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첫 문장]

 

 

 

가야금 배우는 외국 아이들

 

[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최근 브라질에 살고 있는 유럽 친구가 대뜸 물었다. 도대체 블랙핑크가 누구냐고.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중학생 딸들이 유튜브로 한국어를 배우고 인터넷에서 가야금을 구매하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K팝에 열광하고, 한국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글로벌 영화제 상들을 휩쓸고 있는 걸까? 물론 아티스트와 작품이 훌륭하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무작정 ‘국뽕’에 빠지기 전 생각해보자. 세상은 크고 좋은 작품은 많다. 하필 지금 순간 대한민국일까?

 

20세기 초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선 폭력을 넘어 ‘문화적 패권’을 통해서도 권력 유지와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부터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기획적으로 K팝과 한류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K콘텐츠 성공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개인의 선택은 대부분 우연과 필연의 결과이지만, 뇌는 언제나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이유 상상해내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를 장악하던 1980년도 J콘텐츠 역시 각광받았다. 역겨운 음식으로 여겨졌던 날생선은 최고급 요리로 인기를 끌었고, 초비만 남성들의 몸싸움에서 고상한 철학적 개념을 발견하려고들 했다. 비슷하게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꿈과 희망을 키웠고, 2000년 전 세계인들에게 ‘메이드 인 로마’는 로망의 대상이었다.

 

결국 K콘텐츠의 성공은 어쩌면 한국산 휴대폰과 반도체와 자동차를 구매한 세계인들 머릿속 뇌의 착시현상을 기반으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번 내 돈을 주고 구매한 물건을 만들어낸 나라라면 문화가 후질 리 없고, 역으로 그 나라 제품은 더욱 훌륭해 보인다. 뇌의 착각과 콘텐츠의 실질적 퀄리티 간의 순환구조를 유지해야만 한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 헤게모니로 성장할 있을 것이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조선일보(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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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보통 국가’ 일본과의 대면

 

[박정훈 칼럼]

오랫동안 일본은 ‘특별한’ 나라였다
이제 우리는 군사·경제적으로도 시스템도 평범해진

보통의 일본과 마주 서게 됐다 

 

지난 8일 아베 전 총리가 선거 유세 중 피격 당하는 순간이 유튜브에 올랐다.

 

도쿄 특파원 근무 후 귀국한 것이 2002년 초였다. 일본 취재 경험을 토대로 ‘한·일 산업 역전’ 기획을 해보자고 제안했더니 경제부 선후배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은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게 그 시절 상식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무슨 재주로 일본을 따라잡느냐며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했다.

 

일본은 조용하고 평온한 나라였다. 그런 곳에서 살다 온 기자에게 한국은 하도 변화 속도가 빨라 눈이 팽팽 돌아갈 지경이었다. 당시 한국 산업계는 디지털 전환이 한창이었다. 네이버 같은 신흥 기업들이 속속 탄생하고 전통 제조업도 디지털 혁명의 격류에 올라타 사업 모델 자체를 완전히 재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천하의 소니며 마쓰시타가 쇠락하고 삼성·LG가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네이버의 ‘라인’이 일본의 국민 메신저로 군림하게 될 것임을 어떻게 내다볼 수 있었겠는가.

 

오랫동안 일본은 우리에게 ‘특별한’ 나라였다. 이 말엔 부러운 선망의 대상이란 의미와 함께 이질적이고 이상한 존재란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일본은 부유한 선진국의 상징과도 같았다. ‘메이드 인 재팬’은 신뢰의 대명사였고 일본식 모델은 국가 발전의 롤 모델 역할을 했다. 강력한 경제, 안정된 사회 질서, 워크맨·가라오케로 상징되는 혁신 능력, 남을 배려하는 국민성은 언제나 감탄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피곤한 이웃이기도 했다. 칼의 DNA’가 새겨진 민족성은 우리의 경계심을 자극했고, 반성하길 거부하는 왜곡된 과거 인식은 우리를 분노케 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일본은 ‘보통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일 관계 역시 ‘특별한 일본’을 전제로 구축돼 있었다. 일본엔 강자(强者)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일본의 기술·지식 이전과 자본 지원, 한국 산업계의 ‘일본 베끼기’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 인식은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가해자로서 최소한의 부채 의식은 갖고 있었다. 역사 왜곡이나 정치인 망언(妄言)에 우리가 반발하면 듣는 척은 했다. 이제 모든 전제가 바뀌었다.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롤 모델이 아니다. 20년 전 기자가 귀국할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우리의 3배였다. 지금은 거의 비슷하다. 20년 사이 우리의 소득이 3배 늘어났지만 일본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100여 년을 축적한 일본의 지적·물적 자산과 과학 기술력은 여전히 강력하고 일본이 중요한 나라임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과거처럼 압도적이진 않다.

 

삼성 ‘갤럭시’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동안 일본은 변변한 스마트폰 브랜드조차 못 만드는 나라가 됐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차와 현실증강 게임 ‘포켓몬고’ 이후 세계를 사로잡은 일본발 혁신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배출했던 일본 영화는 ‘오징어 게임’으로 대표되는 K콘텐츠에 밀려났고, 일본 ‘망가’는 한국 웹툰에, 닌텐도 게임기는 한국형 온라인 게임에, J팝은 K팝에 무릎을 꿇었다. 선진적이라던 일본식 시스템은 코로나 팬데믹에 의해 허상을 드러냈다. 확진자 집계를 비롯한 모든 행정 절차를 구닥다리 팩스에 의존하는 일본의 후진성이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한·일의 경호 역량을 비교한 글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소주병이 날아들었을 때 한국 경호원들은 완벽하게 대응해 추가 테러를 막았다. 아베 전 총리의 경우 첫 번째 총성 후 3초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경호에 실패해 두 번째 총탄에 치명상을 허용했다. 일본이 자랑하던 매뉴얼 대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안전 면에서도 일본은 평범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은 군사·안보적으로도 특수한 나라였다. 톱클래스의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평화헌법에 의해 자위대는 ‘군대’가 아닌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자민당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가 ‘보통 국가론’을 주장한 것이 1990년대 초였다. 다른 보통의 국가들처럼 안보의 속박을 벗어던지자는 일본 보수파의 염원은 개헌 세력이 중·참의원 의석 3분의 2를 확보함으로써 가시권에 들어왔다. 일본이 헌법을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전 시스템 면에서도 특별하지 않은 ‘보통 국가’ 일본과 마주 서게 됐다. 침체를 겪는 나라는 내향적이 되고 배타성을 띠기 쉽다. 일본에서 들끓는 ‘혐한(嫌韓)’ 정서도 한국에 따라 잡혔다는 집단 우울증의 분출과 다름없다. 한일 관계를 풀어 나가는 데 우리가 좀 더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국력 저하로 예민해진 일본을 끌어안고 우리가 앞장서 이끌어가는 큰 그림의 전략 외교가 필요하다.

 

-박정훈 논설실장, 조선일보(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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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2일 도쿄의 한 신사에서 열린 장례식후 아베 전 일본총리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시민들의 애도속에 떠나고 있다./로이터 뉴스1

 

1945년 4월 12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급서한다. 아직 독일·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 이튿날 일본의 영어 선전 매체인 ‘동맹통신’은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방송한다. “우리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이 오늘날 미국을 전쟁에서 우세한 지위로 이끌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해 미국 국민들이 느낄 상실감을 이해하며, 깊은 공감(profound sympathy)을 표하는 바이다.”

 

막 총리에 취임한 스즈키는 에도시대에 출생한 ‘마지막 무인(武人)’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정치와 무관한 그가 78세의 고령에 총리직을 수락한 것은 군부의 ‘성전(聖戰) 완수’ 움직임을 견제하고 종전을 추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적국 지도자의 죽음 앞에 적개심을 잠시 내려놓은 채 고인의 리더십을 칭송하고 애도를 표한 스즈키의 담화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반면 독일의 히틀러는 “이 역사상 최악의 전쟁범죄자는 지은 죄에 상응하는 운명에 처해졌다”며 루스벨트의 죽음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나치의 폭정을 피해 미국에 피신 중이던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은 독일 국민 대상 라디오 연설에서 스즈키의 조의 표명을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도(gallantry)로 표현하면서, “독일이 이토록 반문명적인 비참한 상태로 추락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독일의 비극”이라며 독일인들이 나치 체제의 비인도성을 깨달을 것을 촉구했다.

 

며칠 전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비극적인 사건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하는 한국 내의 반응은 다양한 듯하다. 보수 강경파로서의 이미지가 한국인들이 그의 죽음을 흔쾌히 애도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스스로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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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김훈 장편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는 ‘꽃이’로 할지 ‘꽃은’으로 할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조사의 미묘한 차이를 심사숙고할 만큼 첫 문장에 정성을 들였다는 뜻이다. 많은 작가가 첫 문장 쓰기의 부담을 토로한다.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라는 벨기에 소설에 나오는 작가는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자 괄호 처리하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 똑같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 모든 문장을 괄호 처리한다. 첫 문장 빼고 시작하려다가 아무 내용 없는 소설을 쓰고 만 것이다.

 

소설 첫 문장은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암시한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은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 선언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주의를 집중시켜 독자를 붙잡아 두는 것도 첫 문장의 임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그런 경우다.

 

▶번역자도 첫 문장 번역에 소설가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인다. 톨스토이 장편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엔 번역자마다 차별화하려는 고심이 담겨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열린책들) 등으로 표현했다. 시중에 10여 종이 나와 있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엔 김석희·김욱동 등 유명 번역가에 인기 소설가 김영하도 가세했다. 소설 첫 문장 번역만 뽑아 독자 시각으로 품평한 사이트도 있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친코’ 첫 문장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이다. 2018년 나온 첫 번역본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였다. 판권이 바뀌며 이달 말 새로 번역돼 나오는데,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첫 문장이 바뀌었다. 이민진은 “두 번역 모두 존중한다”고 했다.

 

▶소설 ‘파친코’는 식민과 전쟁의 고통을 겪고 일본에 건너간 한인 4대의 삶을 다룬다. 냉대와 차별,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을 연이어 겪지만 눈물을 흘린 뒤 그 눈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첫 문장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망국, 분단, 전쟁, 한강의 기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근대사 자체가 ‘역사는 한국을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닌가.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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