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깊은 반성’ 반복한 일왕의 전후 77주년] [국민을 향해 닫아건 門]

뚝섬 2022. 8. 17. 05:59

[‘깊은 반성’ 반복한 일왕의 전후 77주년]

[국민을 향해 닫아건 門]

 

 

 

‘깊은 반성’ 반복한 일왕의 전후 77주년

 

역대 총리 언급하던 ‘반성’ 아베 시절 사라져
유명무실 비판 있지만 그나마 남은 평화 보루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지 50주년을 맞았던 올해 5월 15일, 나루히토(德仁) 일왕은 기념식에서 “앞선 대전(제2차 세계대전)에서 비참한 지상전의 무대가 됐고, 많은 이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렸다”고 언급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전쟁에서 지상전 무대가 된 오키나와는… 오랫동안 미국 통치에 놓였다”고 말한 것과는 단어 선택이 달랐다.

일본의 과거사를 모른 채 기시다 총리 기념사만 들으면 평범한 전쟁이 있었고 일본 땅이 억울하게 타국에 지배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왕의 말까지 들으면 무모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부족하게나마 생각하게 한다. 올 7월 93세로 세상을 떠난 오키나와전 법정 증언자 긴조 시게아키 전 오키나와기독대 학장은 “일본군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뒤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다. 수류탄 불발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으로 가족과 이웃을 죽였다”고 집단자결을 증언했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국가가 자국민과 이웃나라에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끼치는지 77년 전 일본이 보여줬다.

2차 대전 패전 77주년을 맞은 15일, 나루히토 일왕은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매년 이어오는 표현이다. 일본 정치권에는 역사를 직시하면 굴욕을 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상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이런 가운데 일왕은 공식 석상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을 언급하는 몇 안 남은 인물이 됐다.

 

사실 일왕가의 패전일 반성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2차 대전 패전 70주년이던 2015년 8월 15일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 언급이 패전일 반성의 시작이었다. 2015년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가 미일 방위협력지침과 안보법제를 개정하면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석 개헌’을 강행했던 해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역대 총리가 패전일에 직접 언급하던 반성이라는 단어는 아베 전 총리가 두 번째로 취임한 2013년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일왕이 ‘깊은 반성’을 처음 언급한 데 대해 일본 언론들은 “전후(戰後) 70년을 맞아 전몰자 추도와 평화 계승에 위기감을 느낀 증거”라고 지적했다. 평화헌법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아키히토 전 일왕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일본 평화의 최후 보루가 됐다.

일각에서는 헌법상 정치 개입이 철저히 금지된 상징적 존재인 일왕의 메시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지적이 있다. 반성 언급과 상관없이 집권 자민당과 우익 세력들은 한국을 향해 사과 피로증을 운운하며 민낯을 드러낸다. 일왕의 발언에 논란과 해석을 삼가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정부와 국민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야 할 반성이 형해화됐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그나마 일왕의 발언이 있어서 올해 8월 15일에도 ‘깊은 반성’이라는 무게감 있는 단어가 일본의 신문, TV, 인터넷에서 굵은 활자와 자막, 또렷한 육성으로 흘렀다. 일본 국민들로서는 ‘우리가 마지막 반성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는 위안을 할 수도 있었겠다. 퇴위한 왕의 추도사를 되풀이하는 것 말고는 과거 반성과 사죄를 할 줄 모르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현실은 씁쓸하다. 하지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서 1년에 한 번은 뒤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남은 것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져 본다.

 

-이상훈 도쿄특파원, 동아일보(22-08-17)-

_______________

 

 

국민을 향해 닫아건 門

 

일제 때 끊긴 창경궁과 종묘
12년 공사해 다시 연결했지만 둘 사이를 잇는 북신문은 닫혀
克日 상징으로 열고 기념해야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제가 단절시켰던 창경궁과 종묘의 연결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경궁-종묘 연결 현장 내 북신문 앞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2022.07.22

 

창덕궁과 창경궁은 원래 동궐(東闕)로 불리던 한 공간이었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창경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다. 일제 때 종묘 관통 도로(현 율곡로)가 나면서 두 동강 났던 것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복원 공사를 시작해 지난 7월 마무리했다. 12년 걸렸고 세금 1000억여 원이 투입됐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율곡로를 지하에 넣었고 그 위에 일제가 허물었던 종묘 담장을 되살렸다. 북신문(北神門) 복원은 이 모든 과정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그 문을 통과해야 창경궁과 종묘를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써 다시 세운 이 문은 지금 굳게 닫혀 있다. 지난달 21일 ‘창경궁 종묘 연결 복원 사업 시민 개방 행사’ 때 잠시 열렸을 뿐이다.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주말에 현장을 찾아가 만나봤다. 대부분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해 놓고 문을 닫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었다. “복원 소식을 듣고 일산에서 왔다”는 부부는 “연계 관람이 되는 줄 알고 창경궁에서 매표해 북신문 앞까지 왔는데 종묘로 넘어갈 수 없다니 속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종묘에 들어가 봤다. 북신문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 한 장 없었다. 북신문 앞은 더 기가 막혔다. 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줄로 막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출입금지’라는 팻말까지 걸어 놨다.

 

옛 모습을 되살린다고 다 복원이 아니다. 원래 기능까지 되살려야 진짜 복원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니조성 마루는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자객의 침입을 알아채기 위한 설계라고 한다. 그곳을 찾는 관광객은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루 위를 걸으며 자기 귀로 확인한다. 복원이 의미를 지니려면 이처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창경궁은 자유관람이지만 종묘는 시간제 관람이어서 북신문을 통과하는 연계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화재 당국 설명이다. 그러나 입장 인원과 횟수를 제한했던 창덕궁도 국민 요구에 따라 자유관람으로 전환한 전례가 있다. 지금은 창덕궁으로 들어가든 창경궁으로 입장하든 함양문에서 추가 관람료만 내면 두 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북신문이 그 전례를 따르지 못할 이유가 뭔가. 종묘도 주말에는 창경궁처럼 자유관람제로 운영되니 주말 개방부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가 종묘 관통 도로를 내며 담장을 훼손했을 때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서슬 퍼런 그들조차 둘 사이를 아주 끊지는 않겠다며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육교를 놓아 민심을 달랬다. 그런데 우리는 옛 모습 복원한다며 그 육교를 허물더니 막상 되살린 북신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종묘 입구에 ‘상호 통행일 미정’이란 안내판을 내걸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세금 1000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애써 복원한 만큼 시민의 관심을 환기하는 게 세금 쓴 보람을 찾는 길이다. 대대적으로 홍보해도 모자랄 판에 문을 꼭꼭 닫아걸고 어떻게 시민이 관심 갖기를 바라겠는가. 12년 공사하는 사이 관람 시스템을 개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심지어 문화재청 내년 예산에 북신문 개방에 따른 매표 인력 충원 계획조차 잡혀 있지 않다.

 

광복 이후 우리는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았고 일부에선 넘어서고 있다. 지난 70여 년 극일(克日)을 위해 땀 흘린 결과다.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잇고 북신문을 세운 것은 그 눈부신 성취를 자축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제가 8·15였다. 그날 북신문을 열고 축하 행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북신문 개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내년 8·15 때는 활짝 열린 북신문 앞에서 광복과 건국, 이후 우리가 이룬 도약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