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점령지 “병합 찬성” 99%?]
[푸틴의 마지막 치킨 게임]
[투명 투표함]
[‘드니프로강의 기적’]
러 점령지 “병합 찬성” 99%?

2002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집권 연장 여부를 놓고 진행된 주민투표 찬성률은 100%였다. 쿠바에서는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총서기가 2008년 선거에서 99.4%의 지지율을 얻었다. 북한에서 제14기까지 치러진 대의원 선거는 모두 투표율 99%에 찬성률 100%를 기록했다. 직접투표, 비밀투표 등 원칙을 규정해 놨지만 이대로 진행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총칼의 위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독재 체제를 연구해온 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포와 폭력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와 주민투표를 앞세워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연출 기법 중 하나다. 아이티와 콩고, 베트남 등에서도 과거 95∼99%가 넘는 찬성률이 나왔다. 100%를 넘어서는 기이한 투표율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투표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에 점령한 지역 4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최대 99%로 집계됐다고 한다. 투표는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헌병과 선관위 직원이 가가호호 찾아가 투표용지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투표소에는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의 상징인 해골 모양 마크를 단 군인이 경계를 섰다. 배치된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지하실로 끌려가는 직행 티켓”이라는 게 한 우크라이나 언론이 외신에 전한 분위기다.
▷병합 대상 지역 중 이미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루한스크는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곳이어서 일찌감치 ‘가결’이 예상됐던 곳이기는 하다.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 수만 명은 이미 다른 곳으로 탈출한 상태다. 남은 유권자 가운데 투표에 반대하는 이들은 집에 없는 것처럼 커튼을 치고 집에 전등을 꺼놓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침묵은 투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찬성률은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가 무리수를 써가며 우크라이나 동남부 병합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화력 보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병합 지역이 공격받게 되면 ‘영토 수호’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새 병합지와의 조약 체결, 병합의 합헌 여부 검증, 의회와의 협의 및 비준 동의, 대통령 최종 서명 등 절차를 준비 중이다. 핵전쟁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는 ‘땅따먹기 쇼’가 21세기 지구촌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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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독일 잇는 천연가스관 3개에서 대형 가스 누출 사고. 파괴와 공격으로 이득 얻으려는 그자가 범인.
-팔면봉, 조선일보(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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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마지막 치킨 게임
[임용한의 전쟁사]

푸틴이 마지막 대반격을 시도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핵 위협과 30만 동원령이라는 상당히 센 카드를 내놓았다. 러시아는 현 점령지에서 러시아 편입 투표를 강행하고 있다. 러시아는 본토가 침략당하면 핵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해 왔다. 투표를 거쳐 이곳이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하는 순간, 핵 사용의 명분을 얻게 된다.
전쟁 시작부터 러시아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오판했다. 그럼에도 동원령은 자제해왔다. 동원령은 푸틴의 지지율을 급락시킬 수 있다. 통계상으로 잡히지 않아도, 전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더라도 희생자가 증가할수록 러시아 국민의 불만과 독재자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 갈 것이다.
30만 동원령을 내려도 러시아가 실제 전장에 투입할 병력은 얼마나 될까? 병력 수를 늘릴수록 이미 한계에 달한 장비와 화력, 군수 지원은 열악해지고, 스탈린식 전쟁을 닮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동원령은 푸틴에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입구이며, 푸틴이 동원령까지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동원령이 떨어졌다. 어쩌면 푸틴이 원하는 것은 ‘나는 어떤 비합리적 행동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그 자체가 비합리적 선택이며, 모든 해결책 중에서 최악의 수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과정, 전략·전술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교한 판단과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와 생명을 집어삼키는 전쟁은 결국은 분노와 불안에 잠식당하게 되고, 전쟁의 수행 방식조차 이성의 끈을 놓게 된다.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것이 독재자의 최후의 전술이다. 혹시 계산된 협박이라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우크라이나군의 성급한 공격을 유도하려는 희망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군을 한 번 크게 소모시키고,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협박으로 전쟁 포기를 얻어내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이 성공할 수 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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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투표함
고대 그리스에선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등 국가에 해를 끼칠 자를 국외로 쫓아내는 ‘도편(陶片)추방제’가 있었다. 시민들이 도자기 조각에 이름을 적어 내는데, 6000표 이상 받으면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그런데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 추방의 제물이 됐다. 최근 고고학자들이 그의 이름이 적힌 도편들을 조사한 결과 많은 도편이 한 사람 글씨체로 쓰인 사실이 발견됐다. 정적(政敵) 제거를 위한 투표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23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한 주택가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와 합병을 묻는 주민 투표용지를 투명 투표함에 넣고 있다./TASS 연합뉴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다. 당시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온갖 꼼수가 동원됐다. 투표함의 4할을 이기붕 표로 미리 채워 놓는 ‘4할 사전 투표’, 사망자를 선거인 명부에 끼워 넣는 ‘강령술’, 개표 검표원을 매수해 야당 표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줍는 척하며 지장을 잔뜩 찍어 무효 표로 만드는 ‘피아노표’(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한다는 뜻) 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1992년 군 부재자 투표에서도 ‘여당 후보 찍기’ 부정선거가 폭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독재국가에선 지금도 반문명적 부정선거가 횡행하고 있다. 북한에선 투표 방식이 단일 후보에 대한 찬성과 반대뿐이다. 투표 용지 앞면은 후보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은 ‘찬성’이 적혀 있다. 찬성은 그냥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면 되지만, 반대할 경우 후보 이름 옆에 X표를 해야 한다. 100% 찬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들어서도 볼리비아, 페루, 키르기스스탄 등에서도 부정선거가 탄로나 대통령이 쫓겨나는 정치 혁명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밀리자 푸틴 대통령이 군 동원령을 내리고,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의 편입을 위한 주민 투표를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투표함이 ‘투명 투표함’이어서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기표를 마친 투표 용지를 선관위 직원에게 펼쳐 보이고, 접지도 않은 채 투명 투표함에 넣는 장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공개투표나 다름없다.
▶투명 투표함은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한 번에 2~3개 투표 용지를 넣는 부정 투표를 감시하기 위한 장치다. 단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투표 용지를 별도 봉투에 담아 함에 넣는다. 같은 투명 투표함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공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무덤이 될 수 있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저열한 공격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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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프로강의 기적’
지난 7월 초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복구 회의’에 우리 정부가 참여해 많은 기사가 쏟아졌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당시 우리 정부 대표로 이도훈 외교부 차관과 오성익 국토부 과장 등이 쿠브라코프 우크라이나 인프라 장관과 회동했을 때 묵직한 선물 하나가 우크라이나 측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대표단이 조용히 전했던 선물은 ‘더 코리아 스토리(The Korea Story)’라는 808쪽짜리 영문책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설계하고 이끈 국내 1호 ‘테크노크라트’ 고(故)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저서다. 그는 이 책에 한국 경제·산업 발전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책은 정책 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사례별로 소개하며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시아 변방의 소국이 산업 강국으로 탈바꿈한 건 운이 좋아서도 다른 나라 도움을 받아서만도 아니란 걸 깨닫게 한다. 오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오 국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막상 정책 결정 때는 ‘무엇이 최선이냐’를 놓고 대통령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치열하게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게 찍어간 점이 이어져 지금의 한국이 됐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설계한 국내 1호 ‘테크노크라트’ 고(故)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저서 'The Korea Story'. 이도훈 외교부 차관과 오성익 국토부 과장은 지난 7월 우크라이나 전후 국가 재건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에서 쿠브라코프 우크라이나 인프라 장관에게 전한 '선물'이 바로 이 책이다. /노석조 기자
이 책 선물 이야기는 오 과장이 출장 복귀 며칠 뒤 7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ALC) 세션에서 털어놓았다. 이 자리엔 우크라이나 국회의원들과 주지사 등이 참석했다. 객석에 있던 오 과장은 70여 년 전 분단 상황에서 자신의 조부가 희생된 사연을 꺼내며 “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험이 우크라이나가 전후(戰後) 재건 사업을 할 때 도움이 됐으면 해 ‘한강의 기적’ 이야기를 담은 ‘더 코리아 스토리’라는 책을 선물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인사뿐 아니라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 등 객석에 있는 여러 나라 정·관·재계 인사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가 고교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의 발전 과정을 넣도록 교과서 서술 지침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전까지 이 나라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은 없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의 아픔을 겪고, 국방의 중요성, 국가 재건의 절실함을 몸소 깨달으면서 ‘한강의 기적’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 한국이 당한 북의 남침을 승인·지원한 장본인이 스탈린이고, 우크라이나 침략을 감행한 당사자는 ‘21세기 스탈린’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단기간에 한반도가 적화될 것이라 오판했던 스탈린처럼 푸틴도 개전 때 계획과 달리 전쟁이 길어지고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가 거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도를 펼쳐봤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도시를 가르는 드니프로강이 있다. 반세기 전 한강의 기적처럼 ‘드니프로강의 기적’이 실현됐으면 좋겠다.
-노석조 기자, 조선일보(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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