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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의 극성 정치 팬덤, 예수님이 와도 손 못 쓸 걸요?”]

뚝섬 2022. 11. 5. 10:31

[‘이태원 참사’의 정치화… 고인과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

[“민주당의 극성 정치 팬덤, 예수님이 와도 손 못 쓸 걸요?”]

 

 

 

이태원 참사’의 정치화… 고인과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

 

[서민의 문파타파]


희생자들 애도하는 대신 가짜 뉴스 퍼뜨리는 사람들

 

“2022년 2월, 여의도 이룸센터 앞, ‘빈곤을 철폐하자’는 목소리와 함께 송파 세 모녀 8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추모제를 열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빈곤층을 방관하는 사회에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분들이 ‘송파 세 모녀’를 기억할 것이다. 2014년 2월 26일, 서울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 1층에 살던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한 사건 말이다. 몸이 아팠던 큰딸과 병원비를 대느라 신용불량자가 된 둘째 딸이 돈을 벌지 못했기에, 그들은 어머니가 식당에 나가 벌어오는 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출근길 빙판에 넘어져 출근을 못 하게 되자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번개탄을 피웠다. 70만원이 함께 들어있던 편지는 그들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였다. “주인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입니다.” 이들의 죽음이 충격을 준 이유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 여러 시민단체가 매년 추모제를 열며 이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 뒤에도 계속 벌어졌다. 예컨대 2019년 성북구 다세대 주택에서 70대 노모와 40대 세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2021년 7월 5일, 강서구 화곡동의 다세대 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강서구 일가족 3명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60대 어머니와 30대 아들, 40대 조카 등 한집에서 살며 힘겹게 생계를 잇던 이들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이 끊기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숨지기 직전 20만 원이던 월세를 10만 원으로 깎아 달라고 했다는 뒷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일가족 자살이 2019 16, 2020 14, 2021 8건이나 발생했다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복지의 사각지대는 이렇듯 넓다. 하지만 ‘성북 네 모녀 2주기’ 등으로 검색해 봐도 아무런 자료가 없는 걸 보면, 송파 세 모녀와 달리 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단체는 없는 듯하다.

 

다른 일가족의 죽음에 소홀한 비단 시민단체만은 아니다. 2014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이었던 한정애 의원은 송파 세 모녀 사건을 브리핑하다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그 이후 보내온 서면 브리핑에서 그녀는 “이번 사건이 안타깝다”며 ‘축소되고 왜곡되는 복지 정책’을 질타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후 발생한 다른 일가족 자살 사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흔적은 없다. 심지어 2021년 발생한 일가족 3명의 죽음은 그녀의 지역구 (강서 병)와 밀접한 화곡동에서 벌어졌는데도 말이다. 강서구 사건의 파장이 송파 세 모녀에 미치지 못하고, 2021년엔 한정애가 환경부 장관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해도, 그녀의 선택적 감수성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심도 든다. 혹시 사건들이 문재인 정권 시절에 벌어졌기 때문에 몰라라 것은 아닐까.

 

2022년 10월 29일, 대한민국에 커다란 비극이 벌어졌다. 핼러윈을 즐기려던 젊은이 156명이 희생된 것이다. 모든 사고가 그렇듯, 이번 사건에서도 ‘이랬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경찰이 공개한, 당일 112에 걸려온 신고 내역은 그날의 참사를 예견하고 있기에 더 안타깝다. “그 골목이 지금 사람들하고 오르고 내려오고 하는데 너무 불안하거든요. 그니까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당할 것 같아요.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거 인파 너무 많은데 통제 좀 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사람들 지금 길바닥에 쓰러지고 막 지금 너무 이거 사고 날 것 같은데, 위험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막 압사당할 것 같아서… 좀 부탁드릴게요.”

 

경찰은 신고에 대응하지 못했을까. 지금까지 별 사고가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경찰의 부실한 대응을 지적하고, 행안부 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가짜뉴스를 동원해 가며 사태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행위는 규탄받아야 마땅하다.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는 바람에 이번 참사가 났다는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위원장의 SNS 게시물이나, “예전에는 폴리스라인을 치고 한쪽으로만 통행하게 했다”는 한국판 괴벨스 김어준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안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한 2014년, “우리 복지제도가 참 민망하다”고 SNS에 썼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이와 비슷한 사건이 수십 건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하지 않았나. 이번 이태원 참사의 근본 원인은 코로나가 끝나 예년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린 탓, 지금 대통령이 문재인이었다면 이번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장담할 있을까.

 

2017년 5월,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데는 그보다 세월호 사고가 큰 역할을 했다. 이게 직접적인 탄핵소추 사유가 된 것은 아니지만, 헌재의 탄핵 결정문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명시돼 있다. 대통령이 세월호 희생자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 일종의 자기고백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래서일까. 좌파들은 이번 이태원 참사를 제2의 세월호로 만들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재난을 정치화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찾는답시고 9차례나 조사를 벌이는 바람에 많은 돈과 인력이 낭비됐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지금 이태원 참사에 대해 국민이 한마음으로 애도하지 못하는 것도 그때의 후유증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유가족이다. 오랜 기간 좌파들에게 이용당한 나머지,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진상 규명을 외치는 분들이 상당수이지 않은가.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일은, 그게 어느 정권 하에서 벌어졌든, 그 자체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안전망을 고치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그분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니까.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조선일보(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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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극성 정치 팬덤, 예수님이 와도 손 못 쓸 걸요?”

 

뇌종양 투병 2 인생
‘1
세대 정치 평론가유창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정치 1번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유창선은 시종일관 편안한 표정이었다. 국회는 그가 반평생 동안 관찰하고 분석해온 곳. 그는 극한 대립에 빠진 요즘의 정치에 대해 “참담하다”면서도 “내겐 아직 온당치 않은 정치를 짚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있다”고 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슬픔과 애도의 시간조차 건너뛰고 곧바로 정권의 문제로 끌고 가는 이런 모습들에서재난의 정치화 목격하게 된다.’ ‘강경보수로 회귀하는 듯한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의 모습은 그동안 공들였던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민주당에 이재명이라는 존재는 움직일수록 깊이 빠져드는 늪과도 같다.’

 

유창선(62)은 한국의 1세대 정치 평론가다. 1990년대부터 정치 평론을 해온 그는 지금도 활발한 현역이다. 많은 평론가가 ‘관전자’ 역할을 넘어서 ‘선수’가 되곤 하는데, 그는 30년 가까이 관전자 자리를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 그는 신문·인터넷 매체 등 8곳에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수많은 칼럼이 나온다. 최근에는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정치권의 태도, 윤석열 정부의 ‘우향우’ 행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 등을 다뤘다. 페이스북, 블로그 등에 올리는 글까지 합치면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정치 이슈에 대해 글을 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론을 생업으로 삼은 25년 중 그가 일을 쉰 건 약 3개월뿐이었다. 2019년 2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종양은 뇌 중에서도 꽤 위험한 위치인 연수에 있었다. 연수는 호흡 등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율 신경 기능이 집약된 부위. 10시간 넘게 진행한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후유증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혀가 마비돼 말이 나오지 않았고, 식도 괄약근이 열리지 않아 물 한 모금도 삼킬 수 없었으며, 눈은 복시 증상이 생겨 글자가 둘로 보였다. 8개월에 걸친 재활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상에서도 글을 썼다. 누워서 휴대폰에 한 자 한 자 입력하는 식이었다. 그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썼다고 했다.

 

유창선은 최근 에세이집 ‘나를 찾는 시간’(도서출판 새빛)을 냈다. 청명한 가을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그를 만났다. 뇌종양 후유증으로 말투가 약간 어색했지만, 표정은 편안했다.

 

◇ ‘동네 아저씨 사는 행복

 

-몸 상태는 어떤가.

 

“많이 회복됐다. 옛날 같았으면 손도 못 대고 그냥 죽는 병이라고 한다. 소소한 후유증이 남았다. 혀 마비가 살짝 남아서 말이 약간 어눌하고, 음식물 삼키기가 조금 불편하다. 운동을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있다.”

 

-새 책의 부제가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더라.

 

“60대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기사에서 내 나이가 나오면 어색하다(웃음). 늙어간다는 것은 청춘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일이라는 점에서 슬플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는 점에서 꼭 우울한 일만은 아니다. 나는 예순이 옴과 동시에 투병했다. 병원을 나서니, 평생 살아보지 못했던 고즈넉한 삶에 대한 설렘이 찾아오더라.”

 

-병상에서도 글을 쓴 이유는.

 

“내가 살아서 존재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사실 ‘이제는 뭐 하고 살지?’ 하는 걱정이 있었다. 주업이 방송이었는데, 말이 안 나오니 평론 일을 다시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은 쓸 수 있었다. 전에는 (방송·강연 등으로) 여기저기 다니느라 글을 차분히 쓸 수 없었는데, 아프고 나서는 진득이 앉아 글에 정성을 쏟을 수 있게 됐다. 아픈 이후 책을 세 권 냈고, 지금도 한 권 쓰고 있다. 가제가 선동은 이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다. 광우병, 세월호 등 민감한 얘기를 다룰 것이다.”

 

-일과가 어떻게 되나.

 

“오전 6시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노트북 가방을 메고 카페로 출근한다. 점심 먹을 때 빼곤 글을 쓴다. 오후 3~4시 정도엔 일을 끝내고, 1시간가량 운동한다. 저녁을 일찍 먹고, 아내와 함께 산책한다. 이게 너무 좋다. 부부가 같이 좋은 길을 걷는 것, 나이 먹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아닌가 싶다. 여름철에는 러닝을 열심히 했다. 처음엔 500m 달리고도 숨이 찼는데, 이젠 5km 정도는 거뜬히 뛴다.”

 

유창선이 지난달 마라톤 대회(5㎞)에 참석한 모습. 투병 이후 달리기의 매력에 빠진 그는 “처음엔 500m 달리고도 숨이 찼는데, 이젠 5㎞ 정도는 거뜬히 뛴다”고 했다. 사진 상단에 새긴 문구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달리기광(狂)으로 알려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묘비에 새기고 싶다고 한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창선 제공

 

-방송이 그립지는 않은가.

 

“전혀. 가끔 시사 방송을 보면, ‘내가 예전에 저걸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다. 요즘엔 방송에 평론가들이 편을 갈라서 나오더라. 억지 부리기 경쟁을 하는 느낌이 때도 있다.”

 

-투병 중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평생 정치에 매달렸다. 한때는 내가 몸담았던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목숨 걸다시피 적도 있다. 그런데 (정치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가 참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망함이라고 할까. 행복은 뜨거운 광장이 아니라, 고즈넉한 개인의 속에 존재하더라. ‘동네 아저씨’로 살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평온을 느끼고 있다.”

 

정권이 바뀌자, 마이크를 내려놔야 했다

 

유창선은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독재는 옳지 않고, 민주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79학번이 된 그는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운동권 서적 출판으로 몇 개월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1년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고, 이부영 의원의 보좌관을 지내며 여의도 정치에 발을 들였다.

 

-어쩌다 정치 평론가가 됐나.

 

“1997년인가, 정관용(현 국민대 특임교수)씨가 라디오 진행을 맡았다면서 출연해서 정치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 떨려서 못 한다고 손사래를 쳤더니 별것 아니니까 한 번만 나와달라고 해서 결국 갔다. 긴장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PD가 매우 잘했다고 하더라. 이후로 다른 방송들에서도 섭외 전화가 몰려왔다. 하고 싶은 얘기를 많은 사람 앞에서 자유롭게 하는 게 매력 있더라. 출연료도 꼬박꼬박 주니까 더 좋았고, 하하! 마침 ‘노풍’이 불면서 덩달아 시사 바람이 불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인터넷 생중계를 하면서, ‘대박’이 났다. (경선이) 끝나고 나니 스타가 돼 있더라.”

 

-무척 바빠졌겠다.

 

“노무현 정부 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종일 방송만 하러 다녔다. 노트북 가방을 들고 보따리 장사처럼 다녔다. 그땐 (방송) 채널이 많지도 않았을 때인데, 고정 방송이 하루 5~6건이나 됐다. ‘채널만 돌리면 유창선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 당시 물가 수준으로 연봉이 억대였으니 수입도 꽤 괜찮았다.”

 

-직접 정치를 하고 싶진 않았나.

 

“나는 이미 정치권 생활을 해보고 ‘내 옷이 아니다’ 판단하고 나온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려면 싫어하는 사람하고도형님’ ‘아우하며 지내야 한다. 나는 그런 걸 못하는 사람이다. 사실 나는 ‘자칭 평론가’들이 방송을 출마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방송으로 조금 알려지면 선거 나가고, 떨어지면 다시 와서 방송하고…. 그러다 보니 방송이 정파 스피커들이 나와서 충성 경쟁하는 곳으로 변질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국회의원 되고 장관 된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권력이 5년을 가지 못하는 세상에서 권력 무상의 광경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치 평론의 한길을 걸어온 내가 가장 복 받은 사람 아닐까. 어쨌든 방송에 애정이 깊었는데, 타의로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을 때는 참 당혹스럽고 분했다.”

 

-타의로 방송을 접어야 했다고?

 

정치 평론가란 일이 더럽다. 외풍을 심하게 타기 때문이다. 2007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내가 이전 정권 때 방송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몇 군데에서 하차시키더라.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설 때 달라지기를 기대했는데 웬걸, 더 심했다.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친문 스피커들이 방송을 독차지했다. 경악스러웠다. 이명박 정권보다 문재인 정권의 배제 정서가 더 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보수 정권 시절에는 모 방송사에서 너무 강하게 (정부) 비판하지 마세요란 주문을 받긴 했지만, 출연은 계속했다. 그런데 문 정권이 들어서자 바로 잘렸다. 나뿐만 아니라, 중도 성향 출연자는 다 배제됐다. 친문 일색 방송으로 일사불란하게 재편되는 걸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편을 들지 않은 이유는?

 

“나는 ‘친노’로 분류됐던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대통령을 비판하자노빠들은 나를 배신자 취급했다. 친문이 날 공격한 것도, 내가 그들 입맛에 맞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지지층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만 했다면 스타가 됐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무리 짓는 삶을 거부하고, 나를 지키는 외로운 자유를 택했다. 방송이 줄면서 SNS나 인터넷 개인 방송 등을 통해 생업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 SNS에서 사람들은 ‘누구 편이냐’고 물으며 난폭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진영 대결에 대한 환멸이 깊어졌다.”

 

-평론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공정이다. ‘적어도 사람은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믿음을 독자들에게 줘야 한다.”

 

-유튜브 등에 자극적이고 편향된 정치 방송이 많은데.

 

“우리 정치가 진영 대결 구도이기 때문에 그런 방송이 득세한다. 우리는 , 저쪽은 이라고 여기는 이분법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상대편을 욕하고 보는 거다. 이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해결될 텐데, 요원하다.”

 

한국의 1세대 정치 평론가 유창선이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정치 평론의 온도는 36.5

 

유창선은 현안을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놨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선 정부의 대응을 꼬집었다. “신고가 잇따랐는데도 경찰이 (현장을) 방치했던 것은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참사 초기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면피성 발언에만 급급했던 것도 대단히 부적절하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참변을 당했는데 주최자가 있고 없고를 따질 일인가.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는 최종 책임자가 돼야 한다” 그는 덧붙였다. “진영 증오가 격화되는 것이 우려된다. 그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놓고 정치적 싸움에 매달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재난의 정치화가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진다는 것을 세월호 때 이미 경험했지 않나”라고 했다.

 

-당신의 현재 정치적 태도는 뭔가.

 

여야 모두에 우려를 갖고 있다. 여권에 대해서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국정 운영에 실망했다. 예컨대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 같은 경우,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다. 민심에 대한 감이 여전히 무딘 것 같다. 민심을 무섭게 여기는 지도자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래도 여권은 비판이 쏟아지면 우왕좌왕하면서도 고치려는 모습이 보인다. 반면 민주당은 너무 확신에 있어 무섭다. 비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초강경 일변도 야당은 처음 본다. 민주당은 지금 증오와 저주의 정치를 하고 있다. 뉴스에 나오는 민주당 사람들 얼굴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적개심이 정치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

 

그는 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에 반발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했고, 김건희 여사 특검 등을 요구하는 것은 “비열한 정치”라고 했다.

 

-민주당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뭔가.

 

내가 사랑했던 민주당은 기득권 유지, 진영 정치에 몰두하는 당이 돼버렸다. 정권 초기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대통령은 충분히 탈진영, 탕평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지지층 목소리만 듣는 대통령이 돼버렸다. 그러면서 민주당 내 극성 팬덤의 마녀사냥식 조리돌림 문화는 더 강해졌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 인간을 파괴하는 인격 살인이 횡행했다. 말로는 ‘사람이 먼저’라면서…. 극성 팬덤은 예수님이 와도 어떻게 손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치를 30년간 지켜봤다. 나아지고 있다고 보나.

 

절망스럽게도, 한국 정치는 퇴보했다. 민주화 이후, 내가 바란 것은 공존 정치다. 하지만 년간의 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산다는 극한 대결 정치였다. 누구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컸던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광경이 참담할 뿐이다.”

 

-주로 쓴소리를 하는데, 칭찬하고 싶은 정치인은 없나.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 ‘김건희 특검법’을 반대하는 행보를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맹목적으로 진영에 따라 선악을 나누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정치인이 참 반갑더라.”

 

-정치를 늘 관찰하는 일이 피로하지는 않은가.

 

“젊어서는 항상 비판의 날을 세우고, 내 신념을 설파하느라 힘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너무 뜨거운 삶이 좋은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인간의 체온인 36.5도만큼만 유지하려고 한다. 비평하되 목청을 높이진 않는 거다. 이게 가능해진 것은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말하고, 글 쓰는 게 행복하다.”

 

-꿈이 있다면.

 

다음 총선에서 국민이 극단적 강경파 정치인들을 심판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개인적 꿈은 달리기를 좀 더 잘하고 싶다는 것? 아내와 유럽 조용한 마을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기도 하다.”

 

-이옥진 기자, 조선일보(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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