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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지막 연탄 공장] [문 닫는 1호 탄광, 저무는 연탄 시대] ....

뚝섬 2024. 9. 6. 05:59

[서울의 마지막 연탄 공장]

[문 닫는 1호 탄광, 저무는 연탄 시대]

[가스계량기 눈치 안 보고 등짝 한번 지져보고 싶네] 

[다시 한옥에 살 결심]

 

 

 

서울 마지막 연탄 공장 

 

일본 규슈 지방에선 무연탄을 벽돌 형태로 빚어서 구멍을 2~3개 뚫어 난방에 썼다. 그 모습이 연근을 닮아 ‘연꽃 연탄’으로 불렸다. 1900년대 초 한반도와 중국으로 퍼졌다. 지금처럼 원통형에 구멍을 뚫은 연탄이 한반도에 등장한 해는 1932년이었다. 구멍 9개를 뚫어 구공탄이라 했다. 이후 구멍 19~49개 등 다양하게 변형됐지만 원통형이면 모두 구공탄이라 부를 만큼 연탄의 대명사가 됐다.

 

▶연탄은 산업화 시절 우리 사회의 대표 연료였다. 외화 없이 경제개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엔 석탄을 주 연료로 하고 수입 석유를 보조로 사용하는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을 택했다. 탄광촌에선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가 돌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민둥산을 없앤 일등 공신도 연탄이었다. 연탄으로 농촌에서 더 이상 나무를 땔감으로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연탄은 창작의 연료이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애니메이션 ‘아기 공룡 둘리’에 연탄을 소재로 쓴 노래가 나온다. ‘맛 좋은 라면은 어디다 끓여/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 나네’로 시작하는 삽입곡 ‘라면과 구공탄’은 당시 아이들 사이에 최고 히트곡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로 시작하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국민 애송시가 됐다.

 

▶연탄은 연기가 없고 천천히 오래 타기 때문에 온돌을 쓰는 우리 난방과 궁합이 잘 맞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해마다 수백 명이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었다. 1982년 한 해에만 6239건의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7400명 넘게 다쳤고 497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스에 중독돼 머리가 아프면 동치미 국물을 마셨고 병원은 고압산소치료기를 들여놓고 구급차에 실려오는 환자를 받았다. 가정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구들의 빈틈을 메우고 연기 배출기를 굴뚝에 달았다. 잠조차 목숨 걸고 자야 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보일러가 등장하며 비로소 줄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탄 공장이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지난 7월 연탄 생산을 중단했고 지금은 철거 중이다. 한때 서울에만 공장 18곳에서 하루 1000만 장을 찍었고 서민의 따뜻한 겨울을 책임졌지만 국민 삶이 윤택해지며 설 땅을 잃었다. 이제 서울에서 연탄 때는 가구는 1800곳, 전국적으로도 7만여 곳에 불과하다. 안도현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면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다. 어려운 시절 겨울에 따뜻한 온기를 주었던 연탄을 감사하며 추억에 담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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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연탄 공장

 

오늘도 새벽 4시에 깨어난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 캡처

 

서울 신이문역 근처 중랑천 변에 낮게 웅크린 건물이 있다. 하늘색 지붕을 가진 삼천리이앤이(옛 삼천리연탄). 1968년부터 가동된 공장이다. 지난 4일 오전에 가 보니 적재함이 텅 빈 트럭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공장에서 연탄을 찍어내는 소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크렁크렁(쿨럭쿨럭) 노인의 기침 소리처럼 들렸다.

 

탄광은 1년 내내 돌아가지만 연탄은 겨울 한철 장사다. 동이 트기 전부터 ‘물건’을 기다리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트럭들의 긴 행렬이다.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한 소매상이 말했다. “시흥 연탄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 서울에 연탄 공장은 이곳뿐이다. 유류비와 가스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3.65kg인 연탄 한 장은 약 8시간 탄다. 1960년대에 전국 연탄 공장은 400여 곳에 달했다. 쌀과 함께 생필품이던 시절이다. 연탄은 서민과 애환을 함께한 ‘국민 연료’였다. 당시 서울시민이 하루에 800만~1000만장을 사용했는데, 삼천리연탄이 매일 200만장을 생산했다.

 

연탄은 빵과 닮은 구석이 있다. 무연탄 90%에 물 10%를 섞어 반죽한 뒤 연탄을 찍어낸다. 밀가루와 물로 굽는 빵 공장과 비슷하다. 10월부터 일손이 바빠져 이듬해 2월까지 성수기가 이어진다. 1000~2000장씩 트럭에 실린 연탄은 가정으로 절반, 식당이나 비닐하우스 농가로 나머지 절반이 배달된다고 한다. 연탄 트럭 기사가 도매상·소매상에 배달원 역할도 한다.

 

연탄 한 장은 평균 850원. 지역이나 인건비, 배달 조건에 따라 최종 소비자 가격은 더 높아질 수 있다. 무연탄을 공장으로 수송하는 비용을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데 10여 년 동안 동결돼 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판매 물량은 줄고 고정비용은 그대로다.

 

22공탄(구멍 22개)을 생산하는 삼천리이앤이는 하루에 15만~20만장을 찍어낸다. 연탄은 구멍이 많을수록 무게는 가벼워지고 화력은 세진다. 김두용 전무는 “공장 앞에 전날 밤 9~10시부터 대기하는 기사들도 적지 않다”며 “트럭 안에서 자고 연탄을 한두 번 더 실어 나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른기침 소리처럼 들렸다. 서울의 마지막 연탄 공장은 오늘도 새벽 4시에 깨어난다.

 

연탄 출하장에서 분주하게 연탄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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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는 1호 탄광, 저무는 연탄 시대 

 

소설가 박민규는 새벽마다 곤한 잠을 뿌리치고 연탄불 갈러 나가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서울서 오빠와 자취하던 신경숙은 저녁마다 불붙은 연탄을 사러 긴 줄을 서면 ‘일하랴 학교 다니랴 애쓴다’며 맨 먼저 챙겨주던 구멍가게 아저씨를 떠올렸다. 연탄배달 하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들켜 도망치던 골목길을 회상한 출판인도 있다. 명사 24명이 쓴 에세이집 ‘연탄’은 서민과 애환을 함께해 온 ‘국민 연료’의 추억을 일깨운다. 국내 1호 탄광 화순광업소가 30일 폐광한 데 이어 광주·전남 지역의 마지막 남은 연탄공장인 ‘남선연탄’이 곧 문을 닫는다.

연탄 때는 집이 대세가 된 건 1960년대다. 산림녹화 5개년 계획으로 벌목이 금지되고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땅속 무연탄을 캐다 기계에 넣고 찍어 내면 되니 값이 쌌다. 하루 두세 번 갈아주면 방은 하루 종일 따뜻했고 무연탄이라 연기도 나지 않았다. 여성들은 연탄 덕분에 부엌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불 때고 요리하는 노동에서 해방됐다. 1960년대 후반엔 연탄공장이 서울에만 150개, 전국엔 400개가 넘었다.

▷그래도 수요를 대기 어려웠다. ‘김장은 못 해도 굶어죽지 않지만 연탄은 없으면 얼어 죽는다’며 집집마다 연탄을 쟁여두던 시절이다. 통행금지 시간에도 연탄 수송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한파가 몰아친 60년대와 석유파동 이후인 70년대 ‘연탄 파동’이 닥치자 대통령은 “장관직 내놓을 각오하라”며 닦달했다. 당시 동아방송 연말 ‘10대 뉴스 맞히기’ 공모전의 1등 상품이 연탄 1000장이었다.

 

▷‘아궁이 혁명’을 일으킨 연탄 시대는 보건의료 위기의 시대다. 연탄가스 중독 사망률이 제1, 2종 전염병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처음엔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던 정부는 ‘사회적 질병’으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연탄가스 마시면 김칫국을 마시던 시절이었는데 서울시가 제독제 발명 공모전에 상금 1000만 원을 내걸었다. 정부는 식당과 여관에 가스 경보기를 설치하고 보건소마다 산소호흡기를 비치했다. 가스에 중독된 남매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치료기는 하나. 자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이는 부모가 적지 않았다.

▷남선연탄의 폐업으로 전국에 남은 연탄공장은 강원도 6곳을 포함해 24곳, 연탄 때는 집도 8만 가구밖에 안 된다. 초속 7m 엘리베이터로 수백 m 땅 밑에 내려가 석탄을 캐고, 연탄을 만들고, ‘소설과 대설과 동지를 가로질러 연탄불 갈았던 어머니’들 덕분에 산림녹화도 산업화도 성공했다. 탄광과 연탄공장의 연이은 폐업 소식에 새삼 ‘연탄으로 길러진 세대’였음을 깨닫는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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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계량기 눈치 안 보고 등짝 한번 지져보고 싶네

 

[살림하는 중년 남자]

 

가끔 가는 삼겹살 집은 테이블마다 연탄불 위에 철판을 놓고 구워 먹게끔 해놓았다. 앉자마자 한껏 달궈져 있는 철판에 바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주문을 하면 일단 비계 한 덩어리를 준다. 그걸로 철판에 기름을 먹이고 있으면 고기를 가져다준다.

 

주인에게 요즘 연탄 한 장에 얼마냐고 물으니 1000원이란다. 한 장이면 하루 종일 한 테이블을 달굴 수 있고 화력도 세서 가스보다 효율이 높다고 했다. 다만 연탄재는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려야 하는 게 좀 번거롭다고 했다. 연탄 공장이 많이 사라졌지만 식당에 대량으로 납품하는 업체들이 여전히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도 연탄 아궁이가 있었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는데 한밤중에도 연탄 광에서 새 연탄을 가져다 불을 갈곤 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됐을 때 어머니는 연탄 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연탄은 두 개가 세로로 쌓인 채 탔는데, 집게로 두 개를 다 빼낸 뒤 하얗게 재가 된 아래쪽 연탄은 버리고 위쪽 연탄을 아궁이에 먼저 넣은 다음 그 위에 새 연탄을 쌓으면 됐다. 이때 집게로 새 연탄을 단단히 잡고 공기가 통하도록 연탄 구멍을 잘 맞춰서 쌓는 게 관건이었다. 아궁이를 똑바로 내려다 보며 연탄을 갈다가 매캐한 가스가 코를 찔러 고개를 돌리곤 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연탄으로 데운 안방 아랫목은 장판이 탈 만큼 뜨거웠지만 윗목은 얼음장처럼 추웠다. 대개 식구들 모두 아랫목에 모여 밥도 먹고 TV도 봤는데, 시험 성적표가 나온 날만큼은 윗목에 꿇어앉아 있었던 기억도 난다. 요즘처럼 눈이 많이 오는 한겨울엔 집집마다 연탄재를 갖고 나와 깨뜨려서 골목에 뿌렸다. 길이 지저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그 방법이 최고였다.

 

요즘 아파트 대신 단독 주택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거나 아예 새로 집을 짓는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방 한 칸을 온돌방으로 만든다. 장작을 트럭으로 주문해 쌓아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굴뚝 관리며 재 청소가 보통 일이 아니겠지만 한겨울 온돌 아랫목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모양이다.

 

시골 사는 선배네 집에 황토 온돌방이 있어 하루 묵은 적이 있다. 너무 더워서 윗목으로 달아날 만큼 방바닥이 뜨거웠다. 요즘처럼 다용도실 들락거릴 때마다 가스 계량기를 쳐다보곤 하는 계절에는 연탄이든 장작이든 활활 때서 등짝을 지져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 좋다, 아이구 좋다 하면서.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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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옥에 살 결심

 

[공간의 재발견]

 

내 이럴 줄 몰랐다. 매해 겨울 그렇게 성가시고 힘든 시간을 겪어 놓고도 다 잊어버리고 마냥 좋은 순간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한옥은 그간의 한옥살이를 통틀어 창호(새시)가 있는 첫 번째 집이었다. 제법 번듯하고 탄탄하게 지어 손 갈 일이 많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영하 15도로 추락하는 기온을 못 버티고 세탁기가 얼었고 지붕에서는 찔끔 비도 샜다. 아, 이사할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않던 한옥의 겨울, 크고 작은 소동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단독주택에서 살다 근처 한옥으로 이사 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서울 서촌에 있는 작은 생활형 한옥이다. 북촌의 번듯한 한옥이라면 이런저런 일도 덜 생기겠지만 이곳에서는 수시로 집을 살피고 관리해줘야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의젓한 어른이었다가 겨울만 되면 어린아이나 노인이 되는 것 같달까? 챙기고 단속해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진다. 이전 한옥에서는 혹한에 수도관이 얼어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승합차에서 내린 특수기동대 같은 분들이 마당을 1박 2일간 뚫은 적도 있다. 또 다음 한옥에서는 얼음물이 떨어지면서 나무문이 얼어 드라이어로 문을 녹이고 바깥으로 나간 적도 있다. 누가 그런 집에 살라고 했냐고? 맞다. 사서 하는 고생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옥으로 올 결심을 한 건 중독 때문이다. 한옥중독.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겨울을 겪고 마침내 봄이 오면 긴 고행이 끝난 것처럼 설레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 봄이다!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다. 밥도 굳이 밖으로 나와서 먹는다. 친구들을 불러 삼겹살을 굽고 캠핑 의자 갖다 놓고 볕 속에서 존다. 돗자리 깔고 누워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다 보면 저 안에서부터 샘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여름과 가을도 그렇게 별 탈 없이 흘러간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무 기둥에 발을 올린 채로 책을 읽고, 커피를 타 마당에서 바람을 쐬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이다. 이 모든 것은 이를테면 직접 경험.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한강과 남산 전망도 부럽지 않은 것이 그건 눈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한옥에서의 일상은 풍경과 계절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일. 찌릿찌릿 몸의 세포가 알알이 그 기쁨을 기억하고 그 기억 때문에 나는 다시 한옥으로 왔다. 모르겠다. 아직 고생을 덜해서인지 사건 사고를 포함한 온갖 희로애락이 내겐 살아있는 생활 감각이자 숨구멍 같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동아일보(2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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