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유럽 자기의 뿌리는 조선의 청화백자]
[집단 아사한 사기장 39명과 첨단 요업국가 조선의 몰락]
고려청자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보물' 다른 색의 흙 채워 화려함 더했죠
지난 10일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고려 시대 난파선 흔적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고려청자 87점이 발굴됐다고 밝혔어요. 지난 1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우리나라 문화유산과 미술 작품 330여 점 특별 전시가 열렸는데, 여기에 국보인 고려청자가 포함돼 눈길을 끌었죠. 과연 고려청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이 됐을까요?
청자는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예요. 도자기는 토기가 발전한 형태로, 둘 다 흙을 빚어 만들지만 도자기는 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요. 불 온도가 높아질수록 그릇은 단단해지고, 강한 불길 속에서는 재 성분이 그릇 표면에 얇은 유리막을 만들기도 합니다. 옛사람들은 이 효과를 내기 위해 재를 물에 풀어 만든 잿물(회유)을 토기에 발랐어요. 이렇게 만든 토기를 회유토기라고 부르며, 이 기술이 점차 발전해 청자가 등장합니다. 중국은 상(商) 왕조 때 회유토기가 등장했고, 당나라 말 더 단단하고 푸른 청자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국보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 표주박 모양 몸통에 연잎을 둘러싼 장식의 고려청자예요. 이번에 미국에서 전시됐어요. /국가유산청
우리나라는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우수했습니다. 가야 토기는 일본 토기 문화에 영향을 줬고,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통일신라 시기에 토기 기술이 도자기 단계로 점차 발전했어요. 그런데 통일신라 후반에 왕권이 약해지며 지방에서 권력을 잡은 호족이 등장합니다. 이때 해상무역도 활발해져 장보고처럼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는 호족까지 나타났죠. 그러면서 당나라 청자가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체적인 청자 제작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방법을 따랐지만, 점차 고려만의 기술이 뚜렷해졌어요. 고려 중기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든 고려만의 독자적인 상감청자가 발달합니다. 상감 기법은 표면을 얇게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의 흙을 채워 넣어 문양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려청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답니다.
하지만 1170년 무신정변으로 고려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자 청자를 굽던 가마들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어 몽골의 침입과 원나라의 정치 간섭, 일본 해적(왜구)의 약탈까지 겹치며 제작 환경은 더욱 나빠졌어요.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백자가 대표적 도자기로 자리 잡으면서 청자 생산이 점차 줄었고 결국 청자는 더 귀해졌어요.
대한제국 시기 일본인들이 도굴한 고려청자가 창경궁 안 박물관에 전시됐을 때, 고종이 이 도자기가 어느 나라 것인지 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것”이라고 답하자, 고종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그릇이 없다”며 놀랐다는 이야기죠. 고려청자를 보기 어려웠던 조선 말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 조선일보(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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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자기의 뿌리는 조선의 청화백자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유럽 자기의 뿌리는 조선의 청화백자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 방. 이 방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왕비 소피 샤를로테가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해 장식한 곳이다. 17세기 유럽은 토기나 도기는 자체 제작이 가능했으나 자기는 생산할 수 없었다. 1602년 유대 무역상들이 주도해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도자기 붐이 일자 유럽 각국은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렸고, 유럽의 왕이나 영주들이 이를 사들였다. /플리커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동양에 비해 과학이 뒤떨어져 있었다. 유럽은 자기 제조에 필요한 섭씨 1400도까지 불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유럽은 700~800도에서 구워지는 토기(clay ware)와 800~1000도의 도기(pottery)는 생산했지만 1300~1500도에서 구워지는 자기(porcelain)는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明이 망한 뒤 유럽~중국 무역 중단
1602년 유대 무역상들이 주도하여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도자기 붐이 일자 유럽 각국은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중국 광저우 도자기를 수입했다. 비단·중국차와 함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만 해도 매년 300만 개 이상의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다. 그러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과 유럽 간의 해상무역이 중단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의 도자기를 수입하려 1669년 ‘코레아(Corea)호’까지 건조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조선과의 무역은 무산되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 도자기를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험 주문 6만5000개를 일본이 소화하는 데 무려 2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88년에 발굴한 아리타(이마리) 자기는 전 유럽을 매료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타 자기는 임진왜란 때 붙잡혀간 조선 도공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고령토로 만든 조선 청화백자의 재현이었다. 색을 입힌 채색 자기도 등장했다. 이후 19세기까지 유럽에 팔린 일본 아리타 도자기는 무려 2000만점에 달했다. 이로써 일본이 무역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국부를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했던 코레아호에 대해 알아보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조선과 교역을 준비하다
일본의 막부 정권은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문호를 개방했다.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회복한 기유약조도 같은 해에 체결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도 무역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설치된 네덜란드 무역관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 관장은 1610년 11월 본사 최고 의결기관인 17인 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 일본 당국에 조선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재가를 요청했으며… 조선으로 가서 1년에 서너 차례 교역하자고 교섭을 벌였지만, 조선 왕국의 무역금지령과 쓰시마 영주의 반대로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비단, 표피, 약제 등이 가져올 이익을 고려해서 계속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실권자 마우리츠도 일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국과도 거래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이 진척이 없자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주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 총독 코엔은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을 히라도 무역관에 지시했다. 당시 쿠커바커르(N. Couckerbacker) 히라도 무역관장의 정보는 꽤 구체적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나라는 일본과 거의 동일한 크기로, 큰 원형의 섬으로 작은 섬들 사이에 있고, 그 한 끝이 시나(중국)에 접해 있지만, 약 1마일 정도 폭의 강으로 갈라져 있다. 코레아의 다른 한쪽은 타르타리아(러시아)에 접해 있고, 양국 사이에는 폭 약 2.5마일의 수로가 있다. 동쪽으로 28~30마일 떨어진 곳에 일본이 있다. 코레아에는 금광과 은광이 있지만, 굉장한 양은 아니다. 명주도 산출하지만 자국에서 필요로 하는 것보다 적기 때문에 시나로부터 명주가 수입된다. 이 땅에서 특히 풍부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쌀, 동, 목면, 면직물, 인삼 뿌리이다. …코레아에서 일본과 거래는 대마도 영주만이 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으며, 영주도 5척의 큰 배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배를 보낼 수 없다. 그곳에서 면, 면직물, 인삼 뿌리, 매, 호피를 수입하여, 일본에서 3~4배 가격을 받는다. 따라서 거래에서 상당한 이득이 있기 때문에, 영주는 이 거래에 타인이 참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회사가 조선에서 무역을 행하려고 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소심하고, 겁쟁이들로서 특히 외국인을 두려워하고 있다….”

17세기 초에 그려진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주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 얀 피터스존 코엔의 초상화. 코엔은 유대인이다. /위키피디아
이러한 히라도 무역관의 보고에 대해 바타비아 본부는 1638년 6월 상황을 잘 이해했다고 답했으나 본사 생각은 달랐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7인 위원회는 ‘코레아를 발견하라’는 훈령을 내리면서, 일명 ‘보물선 원정대’를 1639년에 파견했다. 조선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열병과 풍랑으로 실패하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원정은 두 번 더 계속되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조선시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들이 두 차례나 우리나라에 왔었다. 다름 아닌 1627년의 박연(벨테브레) 일행과 1653년의 하멜 일행이다. 하멜 일행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당시 38명 생존자 가운데 22살 난 청년 헨드릭 하멜이 있었다. 하멜을 포함한 8명은 전남 좌수영에 근무하면서 1666년 9월 야음을 틈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 만이었다. 그 뒤 일본에 머물다 1668년 7월 귀국했다.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밀린 노임을 청구하기 위해 체류일지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여 동인도회사에 제출했다. 이것이 ‘난선 제주도 난파기’ 및 부록 ‘조선국기’인데, 우리에게는 ‘하멜 표류기’로 알려져 있다.
회사에 제출된 하멜의 보고서가 소책자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1668년 네덜란드어로 처음 출판된 이후 불어판, 독어판, 영어판이 경쟁적으로 출간됐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을 서구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조선과의 직교역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본, 조선과 네덜란드의 무역을 반대하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적극 추진했다. 1668년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에는 이때 동인도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검토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귀국한 하멜 역시 경영층에 조선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며 교역을 강력히 주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무역을 위해 1669년 1000톤급 대형 상선인 ‘코레아’라는 배까지 별도로 만들었다. 코레아호는 1669년 5월 20일에 휄링겐을 출항하여 이듬해 1월 19일에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당시 선원은 31명이었다. 배는 조선을 향해 출항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에도시대에 제작된 아리타 자기의 모습. 아리타 자기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 이삼평의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조선 청화백자를 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타 자기를 본떠 1710년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된 자기가 마이센 자기이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일본이 결사반대했다. 만약 네덜란드가 조선과 통상하면 일본 내 네덜란드 무역관을 폐쇄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수입한 옥양목(무명)과 후추 등을 조선에 되팔아 수십~수백 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에 대한 독점적 무역업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릴까봐 극구 반대한 요인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무역관 식스(D. Six) 관장은 “조선은 빈곤하며 서양인을 환영하지 않는 데다, 일본과 중국도 반대하니 일본과 교역을 유지하는 현 상황이 최선”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보내 본부도 이를 최종 수용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 한 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 청화백자의 흐름을 임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 이삼평의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이어받았다. 그리고 아리타 자기를 본떠 1710년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된 자기가 마이센 자기이다. 마이센 초기 제품들 문양에 조선 청화백자의 모습이 보인다. 유럽 자기의 뿌리는 조선 청화백자인 셈이다.
[본 차이나]
철제그릇 쓰던 유럽 귀족, 도자기 신비로움에 감탄… 집 한채 고가에도 구입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듬해 중국에서 상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캐슬리나 호를 빼앗아 이 상선에 실려 있던 수십 만점의 중국 도자기를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가 경매에 부쳤다. 당시만 해도 교역과 약탈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경매에 많은 왕들과 귀족들이 몰려든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아름다운 식기를 구입했고 영국 국왕은 도자기를 구매했다. 그 많던 물건이 며칠 만에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에 모두 팔렸다.
그 무렵 철제 식기를 쓰고 있었던 유럽 귀족들은 중국제 자기 식기를 보는 순간 그 신비로움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식사의 품위가 달라졌다. 이후 유럽 귀족들 사이에 도자기 열풍이 불었다. 특히 왕이나 영주들은 도자기를 수집하는 데 적극적이다 못해 광적이었다. 당시 고급 도자기는 집 한 채 가격이었다. 지금도 유럽 왕궁에 가보면 방 하나를 아예 중국 도자기로 지은 곳이 많다. 중국 도자기가 워낙 고급이어서 유럽에서는 중국 도자기를 아예 ‘차이나(China)’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도자기를 ‘본차이나(Bone China)’라 부른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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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아사한 사기장 39명과 첨단 요업국가 조선의 몰락
최첨단이던 조선 자기 산업은 완전히 몰락했다
明, 베트남과 함께 3대 자기 기술국 조선
기술자인 사기장들은 집단 아사할 정도로 의무밖에 없어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일체 영업행위 금지
구한말 러시아 보고서 '한국이 일본에 기술 전수? 상상할 수 없다'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명품 수입해 사용
최고 기술을 내다버린 참혹한 결과

조선 백자는 고려청자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이에 관한 세 가지 기록을 살펴본다. 우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 '백자꽃무늬병'(오른쪽 아래 사진)은 영국제다. 병 아래에는 '사이몬 필딩'이라는 영국 회사 마크가 찍혀 있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 금색으로 박혀 있는 '백자오얏꽃무늬탕기'(오른쪽 위 사진)
제조사는 일본 '노리다케(Noritake)'이고 제조 연도는 1907년이다.
바로 그 무렵 러시아제국이 조선을 노리며 만든 1256페이지짜리 보고서 '한국지(КОРЕИ·1900)'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이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기술을 전수받았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국역 한국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p493, 500) 마지막으로 1697년 숙종 때 기록은 이렇다. '(왕립 도자기 공장인) 경기도 분원에서 굶어 죽은 도공이 39명이나 됩니다.'(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명나라, 베트남과 함께 첨단 백자 원천 기술 보유국인 조선에서, 그 제조 기술자들은 집단 아사(餓死)했고, 기술은 몰락했고, 그 결과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일제 그릇을 수입해 썼다는 모순된 이야기.
국가가 독점한 백자 생산과 수요
1428년 명나라 황제 선덕제가 조선 국왕 세종에게 청화백자를 선물했다. 그때 조선은 청자에 흰색 유약을 바른 분청사기(粉靑沙器)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때부터 상감청자 제조 기술이 탁월했던 조선은 곧 청자보다 높은 열이 필요한 백자 생산에 성공했다. 그 우윳빛 자기에 명나라에서 수입한 푸른 안료를 덧씌우니 명나라 황제 하사품인 청화백자 제조 기술도 곧 습득했다. 조선 왕실은 전국 자기 장인들로부터 관청용 청화백자를 세금으로 거둬 수요에 충당했다.

조선 관요인 경기도 광주 번천리 5호 가마터 복원 현장. 폐기된 백자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한때 명나라, 베트남과 함께 세계 3대 백자 기술 보유국이었던 조선은 기술자에 대한 멸시 풍조와 영리행위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로 완전히 후진국으로 추락했다. 조선관요에서 근무한 사기장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는 물론 영업할 권리도 박탈된 기술자들이었다.
그러다 1467년 경기도 광주에 왕립 자기 공장인 관요(官窯)를 설립하고 직접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화백자를 만드는 회회청(回回靑) 안료는 수입품이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회회청 수출을 금지하면서, 기술은 있어도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1485년 조선 정부는 개국 93년 만에 성문법전을 종합해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이렇게 규정했다. '금이나 은 또는 청화백자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는 서민은 곤장 80대 형에 처한다.'('대전통편' 형전 금제) 서민은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역으로, 서민 위의 신분은 값비싼 청화백자를 사용할 독점적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조선 백자를 조선 백성이 구경도 할 수 없는 시대가 계속됐다.
직업 선택권이 없던 도공들
자기 제작은 기술을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 안정적인 자기 공급을 위해서는 적정 인원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관요에서 그릇을 만드는 사기장(沙器匠)은 세습직이었다. 1542년 편찬된 법령집 '대전후속록'은 '사기장은 그 업을 대대로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또 '경국대전'은 왕실 자기 관리기관인 사옹원 소속 사기장 인원을 380명으로 규정했다. 처음에는 전국 사기장 1140명이 3년 단위로 차출됐다가 숙종 대에는 아예 관요 주변에 마을을 만들고 사는 전속 장인들로 관요를 운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박탈된 세습 장인이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가마를 땔 나무를 찾아 경기도 광주 경내를 이동하며 가마를 만들고 그릇을 만들었다. 320군데가 넘게 발굴된 광주 가마터 주변에는 사기장들과 그 가족들로 큰 마을을 이루곤 했다.
굶어 죽은 도공들
그런데 1697년 어느 봄날, 그 광주에서 도공 39명이 한꺼번에 굶어 죽은 것이다. 도공은 그 직업이 천한 공업인지라 신분은 천민이거나,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취급을 받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 대부분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들은 그릇을 굽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697년 광주 관요에서 올라온 보고는 이러했다. '이들은 원래 농업이나 상업으로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 지난해 개인적으로 그릇을 굽지 못하여(本無農商資生之道, 且失上年私燔之利) 모두 굶주리게 되었나이다.'(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번천리 가마터에서 나온 '갑발'에 새겨진 한글. '손맜소니'라고 적혀 있다. 조선 백자를 만든 기술자 이름인지도 모른다.
한두 명도 아니고 마흔 명에 이르는 전문직업인이 한꺼번에 아사했다! 굶어 죽은 자는 39명이었고 힘이 없어 문 밖 거동을 못하는 자는 63명에 가족이 흩어진 집이 24집이었다. 남은 자들도 힘이 없어 그릇 형태를 만들지 못할 지경이었다.(윤3월 2일 '승정원일기')
관요에서 도주한 자는 곤장 100대에 징역 3년 형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전록통고' 사옹원 사기장 도망)이 있을 정도로 도공 생활은 힘들었다. 조선 정부는 지킬 수 없는 법으로 견딜 수 없는 의무를 국가 수요를 위해 강제했다.
위 보고에 '사번(私燔)을 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 용도로 그릇을 굽지 못했다'는 말이다. 국가 재산과 시설로 개인적인 이권을 챙긴 범죄행위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사번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묵인돼온 관행이었다.
금지된 영리행위, 기술의 실종
집단 아사사건 57년 뒤인 1754년 7월 17일 영조는 '용이 그려진 왕실용 그릇 외에는 청화백자를 금한다'고 명했다. 값비싼 회회청이 사치 풍조를 조장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검소했던 영조는 또 '기교와 사치 폐단을 막고 장인들의 일을 덜 수 있도록 장식이 달린 부채 제작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1768년 8월 8일 '비변사등록')
영조를 이은 정조도 같은 정책을 이어받았다. 재위 15년째 되던 1791년 9월 24일 정조는 '괴이하게 생긴 그릇을 비밀히 만드는 자들은 모두 처벌하라'고 명했다.(같은 날 '정조실록') 4년 뒤 정조는 '내열 덮개(갑발)를 씌워 먼지와 파손을 막는 고급 자기 제작을 금하라'고 명했다. 이를 '갑번(甲燔)'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와 갑번을 허용해야 한다고 보고한 어사를 의금부에 넘겨버렸다.(1795년 8월 1일 '일성록')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백자오얏꽃무늬탕기'. 가운데에 금색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그릇은 일본 그릇 회사 '노리다케'제품이다. 제조 연대는 1907년이다. 오른쪽은 역시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영국 '사이몬 필딩'사의 '백자꽃무늬화병'. 구한말 조선에는 이런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첨단 요업 국가 조선에서 수입 그릇을 쓰게 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갑번을 금하고 어사 감찰을 지시한 이유는 이러했다. '사기(沙器)의 낭비는 사치스러운 풍조의 일면이다. 갑번을 금지하면 사기장들이 이득을 보지 못한다니 이보다 더 해괴한 일이 없다.' 이미 9개월 전 갑번 금지 문제가 안건에 올랐을 때 조정에서는 이런 합의가 이뤄져 있었다. '전에도 나름대로 생계를 꾸렸을 텐데 감히 원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794년 11월 16일 '일성록', 좌의정 김이소 보고)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술자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위선적인 윤리와 법이었다. "(사번을 허용하면) 귀천에 구별이 없어지고 법금이 확립되지 않는다(貴賤無別法禁不立)." 국왕 정조가 한 말이다. 천한 사기장이 이득을 취하면 규율이 서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첨단 요업 기술자가 굶어 죽었다. 기술도 함께.
기술 방치의 참혹한 결과
첨단 자기 제조술 보유국이 그 기술자와 생산품을 무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는 가는 곳마다 조선 사기장을 대거 납치해 끌고 갔다. 이들이 휩쓴 지역은 영남과 호남, 충청, 함경, 강원도로 관요가 있는 경기도 광주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각 지역 민요(民窯)를 운영하던 사기장들이 대거 납치됐다는 뜻이다. 그 사기장들이 귀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귀환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일본 기록은 물론 조선통신사 기록에도 숱하게 나온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 기록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조선 사기장 후손들이 이삼평, 심수관 같은 이름으로 지금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구한말 외교 담당 부서인 통리아문의 서류를 모아놓은 '소지등록(所志謄錄)' 1891년 2월 16일 자 모음집에는 이봉학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건의한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나라 장인은 백 가지 제조 기술이 극히 어둔한데, 특히나 사기장이 심각해 외국 제품에 밀려 폐업하기 일쑤다. 그러니 일본 장인 2명을 고용해 배우려 하니 허가 바란다.' 게임이 끝난 것이다.
그 상황을 1900년 러시아 정부 조사단은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인들은 제조업 몇 분야에서 이웃나라인 일본인들의 스승이었다. 일본은 도기와 칠기 기술을 배워갔다. 그러나 이후 한국인들 자신은 이 제조 기술을 완성하는 일을 중지했을 뿐 아니라 과거 수준을 유지할 능력조차 갖지 못하게 됐다. (중략) 현재의 조잡한 한국 자기 제품을 보면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국역 한국지', p494 등)
1881년 조사시찰단 단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젊은 관료 어윤중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본에 딴 뜻이 있냐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 그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강의 길을 얻어 행하게 되면 저들은 감히 다른 뜻을 품지 못할 것이다. 이웃나라의 강함은 우리에게는 복이 아니다.'(어윤중, '종정연표' 1881년 12월)
훗날 고종은 그 강해진 이웃나라 일본 그릇회사 노리다케에 대한제국 오얏꽃 문양을 넣은 탕기를 주문해 사용했다. 첨단 요업 기술국의 철저한 몰락이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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