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100만원 주고 안락사 보장.. ] [‘저세상’으로 가는 특급열차.. ]

뚝섬 2024. 1. 31. 10:18

[100만원 주고 안락사 보장… 당신이라면 죽음을 택하겠는가] 

[‘저세상’으로 가는 특급열차…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섰다]

 

 

 

100만원 주고 안락사 보장… 당신이라면 죽음을 택하겠는가

 

오는 7일 개봉하는 ‘플랜 75′

 

나이 75세가 되면 국가에서 죽음을 도와주는 제도가 실시된다. 이름하여 ‘플랜 75′. 태어날 땐 맘대로 못 하지만 죽을 땐 계획해서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정책 아니냐고 홍보한다. 죽음을 서약하면 10만엔을 일시불 지급하며, 안락사를 시켜주고 화장장도 무료 제공한다. 세입자라면 집 열쇠 반환까지 맡아준다. 죽음을 ‘선택’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토털케어 시스템이다. 3년 시행 결과, 관련 민간 서비스가 동반 성장하며 1조 경제 효과가 발생한다. 정부는 “플랜 65로 확대 실시를 검토 중”이라고 발표한다.

 

영화 '플랜75'에서 독거 노인 미치(바이쇼 지에코, 왼쪽)는 정부의 안락사 주선 서비스를 어쩔 수 없이 신청한다. 안내를 맡은 콜센터 직원 요코(카와이 유미)는 미치를 도와주다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찬란

 

내달 7일 개봉하는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사회의 위기를 다큐보다 더 다큐 같은 가상 현실로 보여준다. 영화를 쓰고 연출한 하야카와 지에(48) 감독은 29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2016년 사가미하라(相模原) 장애인 살인 사건이 영화의 방아쇠가 됐다”고 말했다. ‘사가미하라 사건’은 일본 전후 최악의 흉기 살인으로, 당시 20대 범인의 증오 범죄에 중증장애인 19명이 죽고 27명이 다쳤다. 하야카와 감독은 “혐오와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언제든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며 “인간의 존엄성보다 경제와 생산성을 앞세우는 참혹함을 담았다”고 말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장수(長壽)는 좋은 일이었고, 삶은 고귀한 걸로 여겨졌어요. 이제는 장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죠. 생산성을 근거로 사람을 제거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 누가 예외가 될 수 있겠어요.” 영화는 6년 전 단편으로 우선 만들어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제작을 맡은 옴니버스 영화 ‘10년’(2019)에 포함됐다. 이후 장편으로 선보이며 제75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영화는 실제 사회를 반영하듯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진행된다. 죽음을 안내하는 공무원들은 상냥하며 친절하기 그지없다. 이면의 무관심과 비인간성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다. 신청 노인을 전화로 돌봐주는 콜센터 직원은 잘 자라며 다정한 인사까지 건네지만 사실은 “노인들이 변심하지 않도록 죽을 용기를 계속 주라”는 근무 지침을 따를 뿐이다.

 

하야카와 감독은 각본을 쓰면서 노인 15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예상 외로 많은 노인이 ‘이런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다’고 답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영화 상영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한 관객은 “이런 제도가 실시되는 나라가 유토피아일 수도 있지 않느냐”며 “죽음의 염려를 덜 수 있는 제도라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야카와 감독은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제 영화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날 상영관 300석을 꽉 채운 관객들과의 질의응답은 예정된 1시간을 넘기며 오후 11시가 가까워서야 끝났다. 하야카와 감독은 “사회의 편협함과 무관심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연민”이라며 “영화에 등장하는 두 젊은이가 차츰 현실을 깨달아가듯, 연민의 힘으로 희망을 밝혀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정선 기자, 조선일보(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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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세상’으로 가는 특급열차…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섰다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누군가의 안락한 죽음이 산 사람을 먹여살린다면

 

폐(廢)역사 철로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기차역에 사진을 찍으러 왔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한 한 학생이 물었다. “자살하는 중이야.” “예? 여기는 10년 전부터 기차가 안 다니는데요? 거기 눕는다고 어떻게 자살해요?” 물어도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며 떠난 학생은 그날 저녁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선로에 누워 있던 그 남자가 정말 철로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게 아닌가?

 

설마 기차에 치여서? 물론 아니었다. 남자의 마지막은 온몸에 상처 하나 없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안식을 맞이한 모습이었다. 그 남자의 핸드폰과 유서가 수습된 이후, 역 근방에 놀라운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유서 내용 들었어? 보근역 선로에 누워서 기다리면 아무런 고통 없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던데?”

 

내용은 이러했다. 이 역 선로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차분히 기다리면 철로로 내달리는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때 눈을 뜨면 어느새 내 몸은 달리는 열차에 앉아 있고, 평온한 상태로 ‘저세상’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게 된다고 말이다. 외부인은 무시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어쩌면’이라 생각했다. 10년 전 선로 위에서 자살한 김 노인도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지 않은가? 평생 보근역 관리인으로 살다가 선로와 마지막을 함께한 그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건 아닐지.

 

뭐가 됐든 역사의 효험은 사실인 듯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 번째 자살자가 첫 남자와 같은 모습으로 선로 위에서 발견되었고, 세 번째, 네 번째가 이어졌다. 그러자 전국에서 안락한 죽음을 꿈꾸던 사람들이 보근역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 무슨 불온한 사태냐며 불쾌해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자살하러 온 사람들, 자살을 고민하러 온 사람들, 말리러 온 사람들, 그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지역이 엄청나게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자살 순례는 매일 이어졌다. 심지어 외국인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직장이 늘고, 집값이 오르고, 도시에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의 선로 진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지자체에서도 이제는 막지 않았다.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다.

 

“많은 선진국이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온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예 지자체에서 파견한 직원이 보근역에 상주하며 관광객을 관리했다. 시스템을 만들고, 고인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는 환경도 형성했다. 평온한 죽음을 원하는 자는 보근으로.’ 그것이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런 행보는 당연히 전국적인 반감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죽음을 방조하다니! 자살한다면 말려야지, 부추기고 있어? 거긴 사이코패스들만 산답니까?”

 

옹호 의견도 있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시민은 자기결정권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토론해도 끝이 안 날 주제였다. 결국 국가 차원에서 나서는 게 맞았는데,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자살을 방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자체가 온전히 따를 리 없었다. “그동안 국가가 우리 지역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오죽하면 그러겠어? 까놓고 말해서 평소에는 지방의 잊힌 소도시 따위 신경도 안 쓰면서 무슨. 우리가 다리 깔아달라는 요청만 몇 년을 했는데, 그건 다 무시하다가 이런 일은 참 빨리도 나서네.” 보근의 부흥을 내세운 강경 단체가 출범해 정면으로 국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욕을 먹더라도 그게 그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위한 대의라고 생각했다.

 

호황은 영원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 안 죽는데요?” 선로에 종일 누워 있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가? 안락사의 효험이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는 혹시 기차 정원이 꽉 찬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지자체는 당황했다. 왜 안 죽지?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사람들이 오고 보근이 계속 부흥할 텐데? 소문은 빨랐다. 급속도로 방문객 숫자가 줄어들었다. 지자체는 초조해졌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투자 중인 인프라는? 맺어놓은 계약이 얼마나 많은데? 모여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다시 죽여 달라고(?) 말이다.

 

도시가 시들해지던 어느 날, 다시 소문이 돌았다. “보근역의 평온한 죽음이 다시 시작됐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다시 선로 위에서 자살을 기다린 사람들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다시 또 전국에서 사람들이 보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언제 또 효험이 사라질지 모르는데, 고민할 시간에 빨리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강경 단체는 흡족하게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한 과정이 추가됐다. 그들은 선로 위에 누운 자살 시도자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후회하지 않느냐’ 물은 뒤,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안락한 마지막을 도와주는 주사를 말이다. 그렇게 죽음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김동식 소설가, 조선일보(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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