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지옥으로 위로받는 나의 지옥]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강남 서민'은 왜 불행한가: 소박한 행복에 안주하는 '자기만족적 삶']
남의 지옥으로 위로받는 나의 지옥
요즘 TV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죄다 연애 리얼리티와 남의 가족사, 남의 육아일기를 관찰하는 프로그램이다. 솔로들이 나와서 어떻게 연애하는지, 또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심리를 훔쳐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현재 나의 애인과 함께 출연해 다른 사람으로 환승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순수한 연애 프로그램은 이제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른 연애 프로그램들이 매운맛이 돼버렸다. 오죽하면 ‘솔로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은 커플이 되면 천국도에 갈 수 있고 솔로로 남으면 지옥도에 남아 있어야 하는 설정까지 제시한다. 그야말로 솔로지옥, 커플천국이 현실이 돼버렸다.
커플이 되면 진짜 천국도에 갈 수 있는 걸까? 한동안 연예인들이 가상 결혼 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전제로 일반인과 맞선을 보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었다. 연예인들의 심쿵하는 결혼 생활을 보여주는 ‘동상이몽―너는 내 운명’ 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그런데 요즘 시청자들은 ‘동상이몽―너는 내 운명’처럼 달달한 연예인들의 결혼 생활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신혼 때나 달달할 뿐, 결혼 생활이라는 게 전체적으로 달달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동상이몽’보다는 ‘결혼지옥’을 더 좋아한다. ‘어떻게 저런 남편이 있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남편도 얄밉지만 저 남자는 진짜 별로다’, 아니면 ‘어떻게 저런 아내랑 살고 있지? 내 아내도 얄밉지만 그래도 저 여자보다는 낫다’. 그렇게 남의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보면서 거기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동상이몽’ 볼 때는 나도 저런 이벤트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지고 괜히 내 결혼 생활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결혼지옥’을 보고 나면 ‘그나마 우리 집은 덜 뜨거운 지옥이구나!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 열 배는 낫다’고 생각하며 위안 삼게 되는 것 같다.
솔로도 지옥, 결혼도 지옥, 그렇다면 혹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 인생이 좀 나아질까? 한때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 자녀들의 귀여움을 보면서 힐링했고 그때 나왔던 아기들은 모두가 국민 조카에 국민 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귀여운 육아 프로그램이 아니라 육아의 어려움을 보여주거나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지만 현실 육아가 힘든 건 사실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란 요즘 아이들은 왜 울고, 왜 화를 내고, 왜 짜증을 내고,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치료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힘든 육아, 때로는 지옥 같은 육아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현실이다.
솔로도 지옥, 결혼도 지옥, 육아도 지옥이라니. 우리는 어쩌다가 지옥 유니버스에 빠졌을까. 지옥이란 곳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정말 단 1초도 상상하기 싫은 곳인데 현실에서는 지옥이라는 지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마음이 삭막해서 오늘 점심은 김밥천국이라도 가야겠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동아일보(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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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어릴 적부터 가난했다. 부끄러워한 적은 없다. 당당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차라리 드러내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가난 커밍아웃’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고등학교 땐 수학여행비를 대신 내주는 선생님이 계셨고, 대학교 교수님은 산업기능요원 업체를 추천해 주셨다. 막노동 다닐 때도 십장이 벌이가 괜찮은 일감을 먼저 찔러주었다. 내 삶이 곧 가난의 역사였던지라 주변에 처지가 비슷한 친구도 많았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가난을 고백하기 두려워했고 숨기려 무던히 애썼다. 가짜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친구, 무리해서 중고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친구, 휴대폰을 늘 최신형으로 들고 다니는 친구까지, 모두가 가난을 발각당하지 않으려 힘겨운 잔업과 철야를 기꺼이 견뎌냈다. 왜 겉치레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느냐 물으면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없어 보이면 안 되니까. 이십 대 초반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시간은 흘러 우리 모두 서른 중반이 되었다. 부족하나마 인생 경험이 쌓였고 자기 생각과 현실이 어긋났던 데이터가 축적됐다. 친구들은 ‘없어 보이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실제 가난 탈출에 별 도움이 안 되며 행복과 멀어질 뿐임을 깨달았다. 나 또한 ‘없음을 숨기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무례해 보일 수 있으며, 이 탓에 알게 모르게 기회를 많이 날려버렸음을 알았다. 시행착오의 시간은 무용하지 않아서 각자 좀 더 엄밀한 언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술자리에서 한 친구에게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가난을 숨기려 했냐고.
친구는 가난을 두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실제 가난 혐오는 정말 온갖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가난을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기초생활수급자는 외식하면 안 된다는 사람, 당사자들의 언어가 보편 감수성이 떨어져서 불편하다는 사람, 심지어 가난을 도둑맞았다며 야유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들이 친구에게 가난이란 온갖 공격의 구실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없어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유는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보통 일찍 철이 든다고 한다. 실제로 평균보다 빨리 어른스러움의 외피를 두른다. 성숙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의식을 짓뭉개 자신을 감추는 법을 습득한다는 뜻이다. 가난이 공격거리가 된다면 재빨리 태도를 바꿀 뿐이다.
자의식을 잘 눌러왔던 탓에 사회생활은 잘했지만 부작용 또한 혹독했다. 친구는 번듯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지만 정작 속은 곯아가고 있었다. 자기를 돌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요즘 삶이 허무하다는 넋두리에 문득 모두가 가난했던 산업화 세대 어른들이 떠올랐다. 국가 부흥의 깃발 아래 자아를 죽여 가며 뼈가 빠지도록 일한 선배들. 그 결과는 정년 퇴임 후 온갖 직업병에 시달리는 개인과 OECD 노인 빈곤율 1위 국가만 남았다. 누구에게나 박수 받을 만큼 훌륭하게 살았건만 정작 개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술자리 파할 무렵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세상이 가난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랐다. 가난은 아주 흔해서 태어나서부터 겪는 이도 있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이도 많으며,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현상일 뿐이다.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며 꼭꼭 숨겨야 할 이유도 없다. 단지 불운했을 뿐인 이들을 향한 편견이 빈자를 더 불행하게 한다. ‘가난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세상을 소망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이 쌓여 당사자들한테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한을 친구 말로 갈음하겠다. “없이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왜 훈수까지 들어야 하나.”
-천현우 작가·前용접 근로자, 조선일보(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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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서민'은 왜 불행한가: 소박한 행복에 안주하는 '자기만족적 삶'
반포 33평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도 '강남 서민' '하우스 푸어'를 입에 달고 산다. 자기 집이 아니라 은행집(주택담보대출)이며,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저축은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하소연일까. 1년 전 NH투자증권의 100세 시대 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중위 소득의 150% 이상을 버는 상대적 고소득층 가운데 자신을 '빈곤층'으로 여기는 비율이 49%였다. 중위 소득의 150%면 4인 가족 기준 월 563만원. 월 600만원 가까이 버는데 중산층도 아니고 빈곤층이라. 물론 스스로가 그렇게 여긴다는 데 핵심이 있다.
이번에는 세대의 사례. 소설가 장강명의 장편 '한국이 싫어서'는 꽤 화제가 됐지만,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일본의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지은이는 도쿄대 박사과정인 85년생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 제목이 곧 메시지다. 취업률이 바닥이고, 결혼도 힘들며, 고령화로 청년 부담이 갈수록 커지는데도 자기 또래 일본 젊은이들은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 이후 일본 경제가 불황을 탈출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이 책의 일본 출판은 소위 '잃어버린 20년'의 정점이던 2011년의 일이었다.
'절망의…'가 한국에서 번역된 뒤 장강명이 노리토시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만약 일본 소설가가 '일본이 싫어서'라는 책을 쓴다면 반응이 어떨 것 같으냐고.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공감 받지 못할 우려가 있다. 대다수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을 버려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일본에 태어나서 좋다'고 대답한 젊은이들이 100%에 육박한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까닭은 뭘까.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는 소박한 행복에 안주하는 '자기만족적 삶'으로 봤다. 스마트폰이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가 있고, 이를 함께 즐길 만한 친구나 연인 등 사회관계자본이 있다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사회 시스템에 책임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소박한 자기만족적 삶'이 절대 가치라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강남에 아파트 가진 사람도 못살겠다 푸념하고, 이 땅에서가 아니라 이민을 통해 '자기만족적 삶'을 찾겠다는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다.
안타깝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지금까지의 성장 못지않게 해체도 압축적이다. 대학 진학→취업→결혼→4인 가족→아파트 마련. 이전의 기성세대가 '행복'의 필요조건이라 믿었던 연결 벨트는 지금 역순으로 무너지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AI와도 일자리를 놓고 싸워야 하지 않는가.
'교육 사다리' 복원이나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 양극화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과는 별도로 행복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대비가 필요하다. 이 유동하고 급변하는 시대에 자신만의 행복을 정의할 수 없다면 매일매일이 지옥일 테니까.
-어수웅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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