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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 .... [후쿠시마의 눈(雪).. ]

뚝섬 2024. 11. 25. 09:35

[후쿠시마 원전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 

[첫날부터 삐걱… 日후쿠시마 핵연료 잔해 880t 제거 작업]

[후쿠시마의 눈(雪).. ]

 

 

 

후쿠시마 원전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

 

[특파원 리포트] 

지난 1월 19일 촬영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전경. /교도 연합뉴스

 

이달 초 일본인 지인은 “후쿠시마 원전에 취재 가는 건 좋은데, 굳이 도미오카마치에서 하룻밤 묵을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왜”라는 질문에 지인은 대답은 못 하고 난색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은 이제 안전하다’는 일본인조차 원전 옆 마을에서 숙박하는 건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도미오카마치는 후쿠시마 제1원전과 제2원전 사이에 있는 원전 마을이다. 

 

이달 6일, 2년 만에 후쿠시마 원전을 찾았다. 당시와 다른 점은 숙소다. 2년 전엔 취재를 주관한 포린프레스센터재팬이 숙소를 후쿠시마시(市)에 잡았다. 당시엔 후쿠시마시가 원전과 가까운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먼 곳에 숙소를 잡은 것이다.

 

본지만 홀로 간 이번엔 후쿠시마 원전의 입구인 ‘도쿄전력 폐로 자료관’이 있는 도미오카마치에 숙소를 잡았다. 5일 밤 도착한 무인 역(驛) 도미오카역사에는 피폭량 전광판이 있었다. 0.062마이크로시버트였다. X선 촬영보다 훨씬 적은 피폭량이다. 역 앞의 유일한 이자카야(일본식 술집)는 10석도 안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만석이었다.

 

13년 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 최대 21미터의 쓰나미가 닥친 도미오카마치는 ‘유령 도시’가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전에 ‘노심 용융(멜트다운·meltdown)’ 사고가 터졌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야 했고 현재도 일부 지역은 방사선 노출 위험 탓에 ‘귀환 불가 지역’이다. 사고 전 1만6000명이던 인구는 2000여 명에 불과하다. 귀향을 포기한 주민도 적지 않다. 아침에 해안선을 따라 30분 이상을 산책했지만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과 마트, 은행, 이자카야 등이 하나씩 운영을 재개하고 있다. 은행이 돌아온 건 2017년이라고 했다. 일본은 2051년까지 8조엔(약 72조6000억원)을 투입해 후쿠시마 원전의 폐로(廃炉)를 추진하고 있다. 880톤에 달하는 핵연료 잔해(데브리)를 모두 회수해 안전하게 원전의 문을 닫겠다는 것이다. 사실 의외의 선택이다. 1980년대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 구(舊)소련은 쉬운 길을 택했다. 주변 30km 이내 주민 37만명을 이주시킨 뒤, 사고 원자로에 콘크리트를 쏟아 밀봉했다. 체르노빌 원전 인근의 땅을 버린 것이다.

 

일본은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전례가 없는 만큼,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 일본 언론들조차 “2051년 후쿠시마 원전 폐로는 불가능” “녹은 핵연료를 모두 처리하는 데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보도한다. 도쿄전력 관계자는 “피폭 위험 탓에 모든 작업을 원격 로봇으로 한다. 누구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 현실적으로 폐로가 어렵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그렇다고 폐로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사고 난 원전의 폐로는 원전과 공존해야 하는 인류가 한 번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동시대를 사는 지구인으로, 일본의 폐로가 성공하기를 희망한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조선일보(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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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삐걱… 日후쿠시마 핵연료 잔해 880t 제거 작업 


일본 도쿄전력이 22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녹아내린 핵연료 잔해(데브리)를 시험 반출할 계획이었는데, 시작도 못 했다. 준비 작업 중 실수가 발생해 중단했다고 한다. 이날 작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이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험 추출하려던 양은 3g 미만이었다. 원전 내 격납 용기 안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데브리가 880t가량 있는데, 작업 첫날부터 차질을 빚어 2억9000만분의 1도 못 꺼낸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폐로(閉爐)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게 데브리 반출 작업이다. 원전 사고 당시 핵반응이 일어나는 압력 용기 속 노심이 용암처럼 녹아 바닥을 뚫고 격납 용기로 흘러내렸다. 바로 아래에 곱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다시 굳으면서 떡이 진 채 여기저기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부터 반출 계획이 있었지만 3번이나 연기됐다. 이번엔 약 22m 길이의 로봇 팔에 손톱 형태의 장치를 달아 일부를 집어낸 뒤 성분을 분석하고 반출 방법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격납 시설 내 방사능이 워낙 강해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2015년 투입한 관측 로봇도 5시간 만에 고장이 났다. 2022년 2월에 이르러서야 1호기에서 처음으로 로봇이 핵연료로 보이는 퇴적물을 발견한 수준이다. 올 1월엔 원자로에 로봇 팔을 넣으려 했지만 배관이 퇴적물로 막혀 있어 실패했다. 격납 용기가 손상된 것도 꺼낼 수단을 제한한다.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로봇을 이용해 수술까지 하는 세상이지만 그건 수술실이라는 완벽히 통제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데브리를 꺼내지 못하면 오염수가 계속 발생한다. 데브리는 지금도 붕괴열을 내기에 임시방편으로 격납 용기에 냉각수를 주입해 식히고 있다. 지하수도 유입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된 물을 방사성 물질을 걸러내는 설비로 처리한 뒤 1년 전부터 바다에 방류하고 있다. 폐로를 2051년까지 마친다는 게 목표지만 일본 내에서도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 발전소는 감당을 못해 그냥 콘크리트제 석관(石棺)으로 덮었다. 그 아래 묻힌 핵연료는 25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엔 시간이 10년 정도 흐르면 어떻게 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지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못 하고 있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위험이 줄어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차라리 석관으로 덮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복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뿐더러 후쿠시마 원전은 아래에 지하수가 많은 탓에 물이 오염돼 유출되는 걸 막기 어렵다고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동아일보(2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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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의 눈(雪)..

 

하얀 눈이 낙진처럼 느껴졌다
그때 끔찍한 감촉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 나라가 왜 원전을 재가동하는 것일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후쿠시마에 있었다. 원전에서 40~50㎞ 떨어진 곳이었다. 지진 피해 현장을 오가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다. 무엇보다 유일한 정보원인 일본 라디오 뉴스가 어찌나 침착한지 심각성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건 나흘 뒤 인터넷이 가능한 숙소에서 한국 뉴스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였다. 후쿠시마 위험도가 체르노빌과 같았다. 원전 폭발 순간을 담은 동영상이 무시무시했다. 내가 지옥불 곁에 있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회사에 철수를 통보하고 일행을 차에 태워 피난길에 올랐다. 3월 중순이었는데 함박눈이 쏟아졌다. 낙진이 바람을 타고 도쿄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선지를 정반대 니가타로 정했다. 실수였다. 소설 설국(雪國)의 무대 부근에서 폭설에 길이 막혔다. 어쩔 수 없이 도쿄로 방향을 바꿨다. 길바닥에서 우왕좌왕한 한나절 동안 우리가 가장 무서워한 건 눈이었다. 하얀 눈이 방사능 낙진처럼 느껴졌다. 그때 맞은 눈의 끔찍한 감촉이 지금도 남아 있다. 폭발한 원전은 함박눈의 감촉까지 바꿔놓았다.

몇 개월 후 후쿠시마에 다시 갔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후쿠시마 시내엔 인적이 드물었다. 폭발한 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20㎞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금단(禁斷)의 땅으로 변했다. 모든 길이 경찰 바리케이드로 막혔다. 차를 몰고 경계에 접근하는 동안 길거리에서 수많은 빈집을 봤다. 20㎞ 경계 밖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떠날 수 있는 자는 떠났고 떠날 수 없는 자만 남았다. 마을 공동체는 파괴됐다. 방사능에 사람이 죽지 않았다고 다가 아니다. 시골 마을 원전 몇 기(基)가 전라남도만 한 후쿠시마 전체에 영원한 상처를 남겼다.

일본은 원전 대국이다. 사고 이전 일본 발전의 30%를 원전이 담당했다. 지금 우리와 비슷한 비중이다. 일본은 얼마 후 모든 원전 가동을 멈췄다. 안전성을 확보해야 돌리겠다고 했다. 또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 자체를 없애겠다고 했다. 당시 집권 민주당은 물론 고이즈미 전 총리 같은 야당 거물도 '탈(脫)원전'에 찬성했다. 거대한 운동이었다. 지식인의 새로운 이념이었다. 극단적이지만 지진을 안고 살면서 원전 사고까지 경험한 나라로선 당연해 보였다. 국민 의지도 대단했다.

에너지를 바꾸는 건 개인의 삶과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일본이 이 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을 작년 여름 도쿄에서 알았다.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부터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절전 운동을 펼쳤다. 국민은 더운 여름, 어두운 밤에 익숙해지기 위해 생활 방식을 바꿨다. 기업은 전기를 많이 쓰는 제조업 공장을 해외로 옮겼다. 순응적인 국민성 때문만은 아니다. 20~30% 올라간 전기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일본은 에너지 과소비형 삶과 경제 체질을 바꿨다. 전력 소비가 가장 많은 8월을 기준으로 6년 동안 14% 이상 줄였다고 한다. 작년 여름 대지진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국민에게 '절전 요청'을 하지 않았다. 원전이 거의 돌아가지 않던 상황이었다. 실천으로 사실상 '탈원전'에 성공한 것이다.

다른 흐름도 있었다. '공포'를 '과학'으로 극복하는 노력이다. 아무리 절전을 실천해도 이념만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뀐 뒤 일본 정부는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했다.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면서 전문가들을 모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신(新)규제 기준'을 만들었다. 기준을 넘어서는 원전은 재가동하겠다고 했다. 다시 공포가 일본을 휩쓸었다. 원전 인근 주민들이 집단으로 가동 중단 소송을 잇달아 제기했다.

일본 법원은 이런 논란을 하나 둘 정리하고 있다. 작년 4월 후쿠오카법원은 원자력 전문가들이 책정한 합리적 기준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극단적인 위험 상황은 사회 통념과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었다. 올 3월 오사카법원은 전문가가 책정한 기준을 부정하려면 거꾸로 부정하는 쪽이 왜 전문가의 기준이 불합리한지 입증하라고 했다.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선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지금 일본에선 5기의 원전이 가동되고 있다. 앞으로 20기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이 원전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후쿠시마를 겪은 일본이 원전을 재가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너지 자립, 일본형 경제 발전, 환경…. 종착점엔 국가 안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목표를 향해 갈 때 원전보다 합리적인 선택은 없는 것이다. 요즘 한국을 생각하면서 6년 전 일본에서 경험한 공포와 그 공포를 과학으로 극복해 가는 일본을 다시 떠올린다.

-선우정 사회부장, 조선일보(17-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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