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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춘의 퇴장] [혁신 멈춘 대한민국… 젊은 세대는.. ]

뚝섬 2025. 5. 22. 07:43

[영원한 청춘의 퇴장] 

[혁신 멈춘 대한민국… 젊은 세대는 왜 '유튜버 한 방'을 노리는가]

 

 

 

영원한 청춘의 퇴장

 

586은 다음 세대 막는 장벽
왜 아직도 깃발과 선봉인가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
발목 잡지 말고 이제 비켜서자

 

1966년 베이징대학교 구내식당 벽에 대자보 한 장이 붙었다. 그 대자보는 마오쩌둥의 찬사를 받으며 홍위병 운동과 문화대혁명 전면화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작성자 녜위안쯔(聶元梓)는 홍안의 혁명 전위나 공산주의 투쟁의 선봉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당시 45세의 철학과 당지부 서기로, 운동의 중심이기보다 주변인이었고, 운동 자체보다 ‘운동의 정당성’에 매혹된 평범한 인물이었다.

 

대학 졸업 25주년 기념 동문 재상봉 행사에서, 나는 다시 만난 친구들 앞에 머리 숙여 사과했다. 스무 살의 나는 나만이 옳고 정의롭다고 믿었다. 거악(巨惡)에 대항하고 있으니 사소한 잘못이나 절차상 문제는 눈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낸 학생회비로 몰래 수배자들을 지원하거나, 동맹 휴학을 이끌며 강의를 방해하기도 했다. 학생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쳤던 열정은 때로 타인의 평온한 일상을 짓밟았다. 광장에 나오지 않던 친구들의 삶을 “의식 없다”는 말로 매도하기도 했다. 세월과 삶의 찰과상을 앓는 동안, 나는 회한과 비탄 속에 자신을 무너뜨리며 배웠다. 욕망과 모순의 세계에서 절대악이나 절대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다만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뒤늦은 사과를 받은 친구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용기가 없어서 피하고 외면했던, 우리도 부끄럽고 미안해.” 사나운 시대는 저마다에게 크고 작은 상흔을 남겼다. ‘운동’ 대신 학위나 취업 등 개인적인 성취를 좇은 것이 비난거리가 될 수 없음에도, 어떤 친구들은 시대에 복무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을 품은 채 살았나 보다. 지금 광장과 SNS에서, 용도 폐기된 줄 알았던 옛 구호를 외치는 동세대 중 적지 않은 수의 심리도 이러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80년대’에도 정작 ‘운동권’은 소수에 불과했으니.

 

그럼에도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 평범한 개인의 파괴력은, 시대를 넘어 반복된다. 그 시절 나에게 “좀 입체적으로 살 수 없냐”고 충고했던 조숙한 친구가 이제 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엄혹한 정국인지, 인생에는 방황과 반항의 총량이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광장의 새된 구호는 이념의 갈등이라기보다 시간의 오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리석은 채로 용맹했던 나의 청춘이 그들의 모습에 얼비친다. 당혹스럽고, 쓸쓸하다.

 

하지만, 강은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며 흐른다. 애당초 세대를 가르는 이름은 그들이 시대적 역할을 마쳤다는 신호로 붙여진다. 너무 일찍 호명된 ‘586’은 기억이 아니라 권력이 되었고,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586’ 세대의 이중성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판은 뼈아프다. 역사의 현장을 살아낸 자부심과, 시대가 요구하는 퇴장을 주저하는 미련을 동시에 갖는 건 욕심 사납다는 말을 들을 만하다.

 

한동안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상처인가 영광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훈장처럼 자랑한다. 어쨌든, 누가 무어라 하기 이전에 우리는 기성세대다. 지금 세상이 나쁘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우리에게 있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우리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여전히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겠다는 생각은, 과거를 현재에 과잉 투사하는 보상심리나 시대착오에 가깝지 않을까. 늦깎이 열정은 자칫 다음 세대의 발목을 붙드는 그림자가 된다. 젊은 세대는 우리의 자식이자 제자이며, 우리가 싸워 얻은 공간을 살아갈 사람들이다. 한때 꿈꾸었던 더 나은 세상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길 한가운데서 비켜서야 마땅하다.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집단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개인의 탄생이다.

 

-김별아 소설가, 조선일보(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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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멈춘 대한민국… 젊은 세대는 왜 '유튜버 한 방'을 노리는가

 

[정희원의 늙기의 기술] 

 

요즘 가는 곳마다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씀이시지만, 워낙에 이렇게 해 오고 있어서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실제 일이 돌아가는 현장이든, 국가의 보건의료정책이든 마찬가지 모습이다. ‘워낙에 해오던 것’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찾아보면 고작 2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변화하는 환경에 따르기 위해 땜질처방처럼 도입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땜질로 탄생한 과거의 유산들이 이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어떤 도그마가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20년 전의 인구 구조에 맞춰진 보건의료나 돌봄 정책에 변화가 없는 것은 일본 기업이 팩시밀리나 플로피디스크를 애용하는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 된다. 

 

우리 사회의 중위연령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중위연령이란 전체 인구를 나이 순서로 나열했을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나이를 뜻한다. 1976년 20세였던 한국의 중위연령은 1997년 30세, 2014년 40세를 거쳐 올해는 46.1세가 됐다. 지난 20년간 매년 0.6세씩 상승한 결과다. 2031년에는 50세에 도달할 전망이다. 중위연령의 상승은 단순히 인구 통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 전반의 보수화와 혁신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해지고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들을 살펴보면 젊은 나이에 이루어진 혁신의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정주영이 32세에 건설회사를 차렸고, 이병철이 28세에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이어령은 23세에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칼럼으로 등단했다. 이들의 과감한 도전과 혁신은 주로 젊은 시절에 집중됐다. 6·25전쟁 직후를 생각해보자. 20대 청년이 장군이 되거나 건설회사 사장이 될 수 있었다. 이후 30년간 빈 도화지 같던 우리나라에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의 산업과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그때마다 중위연령을 넘는 사람들은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었다.

 

지금의 586세대가 한국 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오랜 기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중위연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위연령을 가뿐이 넘어설 수 있었다. 20대를 학생운동으로 보내는 사이 중위연령을 통과하고, 30대에 곧바로 관리직 포지션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이들 세대는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문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90년대에 20·30대로 브라운관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예인들이 지금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중위연령이 상승하면서 젊은 세대의 혁신적 시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1인 1표 체제인 민주주의하에서 고령층의 의견이 과대 대표될 우려가 있다. 특히 한국의 인구 피라미드를 고려하면, 1인 1표 제도는 더욱 고령층을 위주로 대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도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2004년 당선된 17대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이 50.8세였던 것에 비해, 올해 당선된 22대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은 56.3세다. 이는 젊은 정치인들의 진입이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또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무엇보다 저출산, 고령화, 기후 변화를 비롯한 미래 세대의 지속 가능한 삶과 관련된 시급한 정책 의사 결정이 더욱 어렵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현실은 젊은이들의 진로 선택과 생애주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나 직장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는 유튜버와 같은 직업이나, 아예 불로소득을 누릴 수 있는 건물주가 학생들의 장래 희망으로 부상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점진적인 노력 축적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성취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한 방에 도약하려는 심리가 팽배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전통적인 직장에서 안정된 수입원을 얻기 위해서는 중위연령에 가까워져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로 인해 과거와 같이 20대에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는 방식으로 소위 ‘정상가정’을 만드는 것이 어려워졌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1997년 첫 직장 입사의 평균연령은 남성 25.6세, 여성 22.6세였지만, 2023년에는 각 29.4세, 27.6세로 상승했다. 커리어에 집중하느라 출산을 미루다가 드디어 경제적 여유가 생겼을 때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쉽지 않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이러한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상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효과 없는 처방을 내리게 된다. 1년 동안 노력해봐야 중위연령 밴드가 올라가며 사회적 지위는 0.4년밖에 올라가지 않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는 계속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목표를 좇아 달려야 한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사다리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다. 중위연령 밴드에 가까운 사람들의 발언권이 존중받는 현상은 미래 세대에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이가 적거나 많다는 이유로 무언가 다른 대우를 한다는 연령주의(ageism) 탓에 고령자에게 불리한 차별이 돌아올 수도 있다.

 

올해의 합계출산율은 작년에 미치지 못할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빨라지지만, 나이 든 우리는 박제된 20년 전 젊은 대한민국이 만든 시스템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중위연령 상승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를 핑계로 혁신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세대 간 지혜와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의 장점을 살리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는 제발, 숫자 나이는 잊어버리자.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조선일보(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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