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 안 좋은 냄새가 나"
어릴 적 찾던 시골 할머니집 마당 구석에는 둥그렇고 빛바랜 하늘색 덮개가 있었다. 정화조 뚜껑이라고 했다. 정화조가 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X통’이라는 건 알았다. 빠지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열지 마래이.” 할머니는 당부했다. 사리분별 안 되는 나이었지만 딱히 열고 싶진 않았다. 정화조 안은 알고 싶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요,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모종의 것들 역시 알고 싶지 않은 미지의 존재였다. 푸짐한 X덩이를 쌓아 올린 사람이 설령 나였더라도 말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비밀의 덮개를 처음 열었다. 지난달 취재를 위해 정화조 청소를 하면서였다. 구수한 분변의 죽 냄새에 한 번 놀랐고, 생각보다 많은 가구(家口)가 정화조 가까이에 붙어 생활한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한 정화조 기사는 “마당이 아닌 방 안에 정화조가 있는 집도 아직 많다”고 했다. 한여름엔 냄새를 어떻게 버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성인이 된 후 정화조의 존재를 떠올려 본 적 없던 까닭은 뭘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통상 아파트 단지나 공공기관, 쇼핑몰 등의 정화조는 지하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다. 정화조가 뭔지조차 모르는 초·중·고교생도 많을 것이다. 기사가 나간 뒤 이용자 대다수가 젊은 층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 “정화조가 물을 여과하는 곳인 줄 알았다” “아직도 정화조 있는 집이 있느냐”….
작업을 하다 보면 냄새가 더한 집과 덜한 집이 있다고 한다. 그중 당뇨 환자가 있는 집이 가장 힘들다고. 당뇨 합병증이 생기면 소변으로 혈액과 단백질 등이 배출된다. 대변과 섞이며 악취가 심해진다. 여기에 덮개조차 없는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집이라면 근처에만 가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냄새가 난단다. 그래도 집주인을 앞에 두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이 정화조 기사들의 암묵적인 ‘룰’이다.
“지하철 타는 사람 냄새가 난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은 자신을 보며 코를 쥐는 박 사장을 끝내 칼로 찌른다. 온갖 수모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의 자존심은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에 무너졌다. 냄새는 내가 뭘 먹는지, 어디서 자는지 또 어디서 어떻게 싸는지 등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냄새가 사회 계층을 가른다. 그 어떤 원색적인 비난보다 “너한테 안 좋은 냄새 나”라는 말이 더 큰 수치와 모멸감을 줄 수 있는 이유다. 정화조 기사들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힘든 내색 않는 건, 집주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인 셈이다.
나 역시 알게 모르게 그런 배려를 받았을 텐데, 그간 싸댔던 X을 누가 치우는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10년간(2014~2023년) 정화조 포함 밀폐 공간에서 발생한 질식 사고는 174건. 가정집의 정화조는 비좁고 가파른 길에 있는 경우가 많아 세워 둔 정화조 차량에 기사가 치이는 사고도 왕왕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X 생산자’로서 할 수 있는 배려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우연히 길에서 청소 중인 기사와 마주칠 때마다 따스한 한마디를 건네는 것은 아닐까.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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