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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가 지금 하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정치] ....

뚝섬 2025. 1. 23. 08:53

[공수처가 지금 하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정치]

[논거(論據)는 있어도 의거(議據)는 없는 까닭]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 맹목적 변호의 끝은 몰락]

 

 

 

공수처가 지금 하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정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강제구인을 시도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직원들이 20일 서울구치소에서 경기도 과천 공수처로 복귀하고 있다./뉴시스

 

공수처가 출석 요구에 불응한 윤석열 대통령을 22일 서울구치소에서 강제 구인하려 했으나 또 무산됐다. 20일, 21일에 이어 세 번째다. 강제 구인은 피의자 조사를 위해 예외적으로 하는 것이다. 잡범들에게도 웬만해선 잘 하지 않는다. 피의자가 진술 거부권을 행사하면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이미 “공수처에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을 구인해 봐야 조사가 될 리 없다. 그런데도 공수처가 그 시도를 계속한 것은 조사가 목적이 아니라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큰 것이다. 전형적인 보여주기 수사다.

 

공수처가 20일 강제 구인을 시도할 때 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출석을 위해 변호인들을 만나고 있었다. 방어권을 위해 그 시간은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공수처는 강제 구인을 시도했다. 21일엔 윤 대통령이 헌재에 출석한 뒤 병원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고도 서울구치소로 찾아가 또 구인을 시도했다. 과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수처는 최근 윤 대통령에게 변호인을 제외한 사람 접견 금지, 서신 수·발신 금지 결정도 내렸다. 이런 조치도 증거인멸 정황이 있을 때 예외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황이 드러난 것은 아직 없다. 더구나 이미 내란 혐의 관련자 대부분이 구속돼 있고, 상당수 증거도 확보돼 있다. 그런데도 공수처가 이런 조치를 한 것은 소환 불응에 대한 ‘보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공수처는 내란죄 수사권이 없는데도 윤 대통령 수사에 무리하게 뛰어들었다. 대통령을 수사하면서 조사 방법 등도 조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세 번 소환 통보하고, 불응하자 체포 영장을 청구했다. 체포도 조사를 위한 절차일 뿐이다. 조사가 목적이라면 여러 대안을 검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 없이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해 영장 집행을 강행했다. 이 역시 조사보다는 대통령을 관저에서 끌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큰 것이었다. 이 상황까지 온 데는 소환에 불응한 윤 대통령 탓도 있다. 하지만 공수처의 무리한 수사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조선일보(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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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거(論據)는 있어도 의거(議據)는 없는 까닭

 

논(論)과 의(議)의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논(論)은 대체로 지난 일을 말하는 것이고 근거와 논리가 필수적이다. 반면에 의(議)는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내는 것이고 굳이 근거를 내지 않아도 된다.

 

대표적인 것이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도유우불(都俞吁咈)이다. 도(都)와 유(兪)는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이야기하면서[議政] 긍정의 상황일 때 내는 감탄사이고 우(吁)와 불(咈)은 부정의 감탄사이다. 원래 도유우불은 임금과 신하가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밝힐 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지금의 초점은 조금 다르다. 앞으로의 일에 관한 의견[議]을 낼 때는 이처럼 얼마든지 짧게 말할 수 있다. 근거도 필요없다. 그래서 국어사전에도 의거(議據)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논(論)은 책임과 무관하고 의(議)에는 권한과 책임이 따른다. 고대 중국에 이미 의랑(議郞)이 있었고 의자(議者)가 있었다. 모두 자격을 갖고서 국정에 관한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옛날부터 논(論)이 권한과 책임을 갖는 분야가 있다. 법조계와 학계가 그곳이다. 검사의 구형, 변호사의 변론, 판사의 판결은 모두 논(論)이지 의(議)가 아니다. 학계 또한 논문(論文)이라고 하지 의문(議文)이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판사의 판결은 논(論)이어야지 의(議)여서는 안 된다. 의(議)에는 당파성이나 사견이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론(公論)이나 공의(公義)는 자주 써도 공의(公議)는 잘 쓰지 않는다. 협의체의 결론 정도가 공의(公議)라 할 수 있지만 극히 제한적이다.

 

서부지법 차은경 부장판사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발부한 ‘15자’ 구속영장은 논거와 논리가 빠졌다는 점에서 누가 보아도 논(論)보다는 의(議)에 가깝다. 공론(公論) 공의(公義)에 대한 고민도 없어 신뢰 상실을 자초했다. 사법부 전체가 무신불립(無信不立)을 음미하며 자성할 때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조선일보(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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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 맹목적 변호의 끝은 몰락

 

[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이괄의 난 당시 조선 인조가 충남 공주시 공산성에 피란한 일을 새긴 공주 쌍수정 사적비. 국가유산청 제공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의 핵심 인사였던 평안 병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가 반역할 것이라는 의심을 하자 이에 반발해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며칠 전 조정에는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이 들어왔는데, 인조는 믿지 않았다. 고변이 황당하다 하여 고변한 사람들을 무고로 처형하라고까지 했는데, 정승 이귀가 극구 반대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괄은 용맹한 장수이고 그의 휘하에는 날랜 병사와 칼솜씨가 빼어난 항왜(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인들) 무리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정말 반란을 일으킨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정은 고심 끝에 이괄의 아들을 잡아 오기로 결정했다. 이괄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대단히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이괄은 자기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아들이 역적으로 잡혀가면 어찌 아비가 무사할 수 있겠는가!” 이괄은 1월 22일(음력)에 부하들을 소집하고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진군했다. 이괄의 군사는 우수했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이 반란은 불과 20여 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양에서 이괄을 극구 변호한 사람이 있었다. 이괄 아들의 스승이자 5촌 조카인 사헌부 지평 김원량은 이괄에게 반란 혐의가 씌워졌을 때 광해군 잔당이 모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괄 아들 역시 올바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괄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는 상황에서도 김원량은 술에 취한 채 조정에 나와 “숙부는 반역자가 아니다! 나를 보내주면 새끼줄 하나로 묶어서 데려오겠다!”고 떠들었다.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원량의 투옥에는 간신 김자점과의 원한도 한몫했다. 김원량은 김자점이 탐욕스럽다고 공격한 적이 있어 김자점은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김원량은 옥중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베옷을 찢어 이괄이 무고하다는 혈서를 썼다. 하지만 피로 쓴 상소문은 인조에게 가지도 못했다.

김원량은 이괄을 맹목적으로 믿어 그의 역모를 믿지 못했다. 김자점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역모에 관여했다고 덮어씌운 뒤 참수형에 처했다. 그는 비록 이괄을 변호하기는 했지만 역모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죄가 반역자로 참수형을 받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마구 발설한 결과, 정적의 손에 걸려 목숨을 잃고 가문까지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는 김자점이 역모로 몰락한 뒤에도 신분을 되찾지 못하다가 숙종 때가 돼서야 양반 신분을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윤석열 대통령 측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관할권이 없는 서울서부지법에서 발부받은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은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그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는 법치주의에 대한 크나큰 부정이다. 그런데도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법 질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근간을 뒤흔드는 이런 행동은 뻔한 사실을 부정한 김원량과 다를 바 없다. 차분하게 사법 질서에 따라 나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시민의 길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동아일보(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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