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곳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은 왜 그토록 찬란한가
일본 하이쿠 대가 바쇼
一所不在의 철학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 송해 선생이 생전에 나이 든 부인들 사이에 인기 남편으로 손꼽힌 적이 있었다. 매일 외출하니 세 끼 식사를 집에서 챙기게 만드는 귀찮은 ‘삼식이’가 아니고, 돈을 벌어오며 지역 특산품까지 들고 오니 일석삼조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직장인 시절엔 웃고 말았는데 요즘 주변에서는 나를 ‘손해’라 부른다. 내 성 ‘손’과 송해 선생의 이름 ‘해’를 합성한 별명이다. 만약 박씨 성을 가졌다면 박해, 오씨 성이라면 오해인가? 소박한 인간미와 구수한 진행 솜씨가 일품인 송해 선생의 명성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장소의 이동성이라는 뜻이라면 수긍한다. 강연을 위해 나도 어딘가를 매일 떠돌아다니니 말이다.
늘 길 위에 있느라 화견주(花見酒)의 꿈을 올해도 못 이루었다. 화사한 봄날 꽃을 보면서 정겨운 이들과 한잔 마시는 것으로, 특히 벚꽃을 술잔에 띄워 놓고 인생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운치 있겠는가.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을 틀어 놓고 출장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커피 한잔 마시며 시를 읽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모든 사물의 끝은 허공인데 그 끝이 허공이 아닌 것이 꽃”이라 말한 시인답게 미당 서정주의 시에는 꽃과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 미당이 있다면 일본에는 바쇼다. 17세기 활동했던 마쓰오 바쇼는 역사상 최고의 하이쿠 시인이라는 명성을 듣는다. 하이쿠(俳句)는 압축과 생략의 미학을 추구하는 열일곱 자의 짧은 시다.
‘하이쿠의 명인’ 마쓰오 바쇼는 여행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내가 바쇼에게 주목한 것은 그가 여행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41세에 처음 먼 방랑길을 떠난 바쇼는 죽을 때까지 길 위에서 시를 썼다. 그를 지배한 인생 철학은 ‘일소부재(一所不在)’,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찬란하게 지는 벚꽃을 보면 삶의 유한성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바쇼와 비슷한 시기 네덜란드 화가들도 특유의 정물화에서 꽃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세속적 가치의 한계를 표현했다. 라틴어로 바니타스(Vanitas)라 부르는 삶의 공허함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예술가와 시인이 아파하지 않으면 또 누가 하겠는가. 시인과 예술가는 해법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해 주는 사람이다. 이처럼 삶의 유한성에 힘들어하면서도 “이른 새벽 벚꽃에서 신의 얼굴을 본다” 했던 시인이 바쇼다. 공허함을 넘어선 생명의 위대함에 대한 찬가다.
바쇼만큼은 아니겠지만 올해 내 삶도 일소부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지난 두 달 동안 화요일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울산광역시 울주문화예술회관에서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나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여행’ 강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서울의 집에서 출발해 새벽 첫 지하철과 기차 등 모두 5번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도달하는 긴 여정이기에 가끔 ‘손해’의 원뜻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고단함에도 출장을 강행하게 만든 것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동우 관장의 간곡하고도 진정성 어린 전화 때문이었다. “우리 지역 주민들에게도 양질의 강연을 경험할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꼭 도와주세요.”
대단하지도 않은 글로생활자에게 굳이 부탁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련만 책임자의 특별한 소명의식은 마음을 움직였다. 일방적 진행이 아닌 수강생들과 함께 만들어갔다. 피곤을 잊게 만드는 비타민은 수강자들의 리액션. 시리즈 후반 ‘길’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작문 숙제를 냈는데, 읽는 내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발병 후의 투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업 실패, 자녀와의 불화, 퇴직 후 방황 등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겉으로 태연해 보이는 사람들도 저마다 내면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던 것이다.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결핍감으로 아파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바야시 잇사의 시가 떠올랐다. “나의 별은/ 어디서 노숙하는가/ 은하수.”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산 시인이 59세에 쓴 하이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별이 있다는데, 나이를 먹어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별을 찾는 절박함이다.
울산광역시 울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나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여행’. /손관승 제공
강연이 끝날 때쯤 많은 선물을 받았다. 보라색 핸드백을 내미는 여성 수강생도 있었다. 남자에게 핸드백이라니 무슨 영문인가? 열어보니 모형 핸드백 안에는 허기를 달래기에 좋은 과자, 음료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최고의 선물은 수강 소감이다. “자화상을 주제로 한 시간에 ‘나’를 상징하는 키워드 3개를 적으라는 말에 당황했다. 오랫동안 엄마로, 아내로 살아오면서 ‘나’를 잊고 있었다”는 고백이나 요양 병원에 다시 취업해 돌봄의 의미를 재발견해 기쁘다는 말, 나만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목표가 생겼다는 글도 있었다. “길을 헤맬까 두렵다. 하지만 정해진 길을 벗어나야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고 강의 시간에 하신 말씀이 제 영혼을 울렸습니다. 용기를 내서 미지의 땅으로 봉사의 길을 떠납니다.” 어느 퇴직 교사의 메시지였다.
인생 후반전은 전반전의 전략과 전술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마라톤을 146번 완주한 엔지니어 출신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시니어 발레에 도전한 여성은 다른 수강생과 함께 먼 여행을 떠났다. 그렇다. 무언가를 ‘같이’ 할 때 ‘가치(價値)’도 높아지는 법이다. 혼자 잘하는 것 못지않게 함께 만들어가는 기쁨을 배워야 한다. 인생은 긴 여행이니까. 길을 떠나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학교와 책상에만 배움이 있는 게 아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삶의 스승이다.
-손관승 글로생활자, 조선일보(25-05-03)-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隨想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차와 꽃게] [진보 꼰대] [떠나는 발길 무거운 58년 개띠들] (0) | 2025.05.11 |
---|---|
[내가 좋아하는 것] [30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마음] .... (0) | 2025.05.10 |
[불교의 교리와 경전] (0) | 2025.05.05 |
[‘부처님 오신 날’ 앞두고.. ] .... [은퇴 후 出家] (2) | 2025.05.05 |
[댓글창에 좌판 깔고 호객… '불륜 장터'를 아십니까] .... (0) | 2025.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