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앞두고 첫 대담집 펴낸 宗正 성파 스님]
[가을 오대산, 탄허의 통찰]
[5만 불보살이 머무는 영지, 오대산의 재발견]
[송광사 법흥 老스님에게 듣는 삶의 화두]
[은퇴 후 出家]
‘부처님 오신 날’ 앞두고 첫 대담집 펴낸 宗正 성파 스님
“그때 왜 나라 뺏겼는지 처절히 돌아봐야”
2023년 5월 11일 경남 양산 하북면 통도사 서운암에서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이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성파스님은 "지나간 건 제로, 지금이 시작이다"라고 하셨다./김동환 기자
지난 11일 오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 서운암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건강은 어떠시냐고 묻자 "진찰상 병명은 안 나와요" 하며 웃었다. 성파 스님 뒤로 옻칠에 돌가루를 뿌려 그린 금강산도가 보인다. /김동환 기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침범해요(心隙魔侵). 틈이 무엇인고 하니 분열이라.”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27일)을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이 한국 사회에 죽비를 내렸다. 지난 11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성파 스님은 “정치권도 국민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자기만 옳다 우기며 싸우고 있다”며, “맹수들이 사방에서 노리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란데 갈수록 분열만 깊어져 걱정”이라고 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친일, 친일 할 건가. 그때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처절히 돌아보고 이를 거울삼아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불교계에서는 옻칠 민화와 ‘16만 도자(陶磁) 대장경’을 만든 예술가로, 버려진 장독 5000개를 모아 전통 방식으로 된장 간장을 담는 기인으로 이름난 성파 스님은, 정치나 시국에 관해서는 “나는 아는 게 없다”며 말을 삼가 온 대표적 선승(禪僧)이다. 작년 3월 종정으로 추대됐을 때도 사전에 준비한 원고는 “올라오는 동안 싹 잊어버렸다”며 즉석에서 법문을 하는 파격으로 화제가 됐다. 스님은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담집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샘터)를 출간했다.
◇경험도, 지식도 지나간 것은 제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서울로 오시지 않는다고요.
“통도사에 있어요. 총무원장이 있으니 내가 굳이.”
-봉축 법문은 올려보내셨지요?
“특별한 말도 없어요(웃음).”
성파 스님은 15일 낸 봉축 법어에 ‘이 세상 고통은 사랑과 자비의 헌신 없이는 줄어들지 않고, 중생의 고통을 제 몸에 담는 비원(悲願) 없이는 구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종정으로 취임하실 때 즉석에서 법문을 하셨다지요.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아는 것도 없고요. 요새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더 많이 알잖아요? 모두 고등교육 받은 지식인이고, 외국물도 많이 먹고요. 우리처럼 나이도 많고 산에 사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지요.”
-학교에서 그토록 배웠어도 진심으로 알고 깨친 것이 무엇이냐는 질책으로 들립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세상 밖을 모르니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말고, 내 할 일이나 잘하자는 것이지요.”
-종정 추대 법회에서는 ‘경험 많다, 아는 것 많다고 생각하지 말고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하셨습니다.
“그 또한 내게 하는 말이에요.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연륜을 거듭해도 경험이 많다, 지식이 쌓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지나간 거는 제로(0)라. 그래서 항상 지금이 시작이에요.”
-오늘을 함부로, 허투루 살지 말라는 뜻인가요.
“촌음을 아껴 쓰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냐. 책을 한 줄 더 읽든지, 밭에 나가 풀을 매든지 간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한시도 일을 놓지 않는 스님의 손은 두툼한 근육이 잡히는 ‘일꾼의 손’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만히 누워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요. 자연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시도,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요.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라. 간단(間斷)이 있으면 물이 새고 정진이 되지 않아요.”
-’나는 500살 인생을 산다’고도 하셨어요.
“어느 분야든 장인이 되려면 최소 50년이 걸리는데 나는 시간은 없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니 융단폭격, 동시구진법을 썼지요(웃음).”
-속세에선 이를 일 중독이라 합니다.
“일을 공부라고 생각하면 일 중독이 아니에요. 일하면서 배우니 즐겁고요. 봄이 오면 꽃이 억지로 피는 게 아니듯 말이지요.”
-책에 ’공부가 별건가? 발길 닿는 곳이 학교이고 만나는 사람이 스승이다’라는 대목도 와 닿았습니다.
“급해서 나온 자구지책이라. 요즘 사람들은 학교도 가고 좋은 대학도 가야지요. 나는 (전쟁과 가난으로) 그리 못 했으니 괜히 어깃장을 놓는 거예요(웃음).”
17일 오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 장경각에 서 있는 성파스님. 장경각에 모셔져 있는 16만 대장경은 성파스님이 10년에 걸쳐 도자(陶磁)로 제작한 대장경이다. /2023.05.17 김동환 기자
◇죽기로 작정하듯이 살기를 작정하면
-전쟁과 인플레로 세계 경제가 어렵고 서민들 삶이 피폐합니다.
“원인 없는 병이 있나요. 인과응보.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 그걸 치료해야겠지요.”
-청년들은 취업난, 주거난 등으로 힘들어합니다.
“나는 전기 없고 전화도 없던 시절에 살아서 그런지 (청년들 얘기를 하면) 자꾸 말이 막혀요. 내가 왜정을 겪고 6·25를 겪고 학교도 다닐 수 없던 배고픈 시절을 보내서 그럴 거예요.”
-지금이 그렇게 힘든 시대가 아니라는….
“직장이 없다고 하잖아요. 여기는 일손이 없어서 난리예요. 그런데 젊은이들은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못 하겠다고 해요. 시골에선 외국인 노동자들 아니면 농사도 못 짓고 아무것도 안 되는 판인데요. 그러니 얼마나 답답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전세 사기 때문에 30대 청년이 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하듯이 살기를 작정하면 이겨낼 수 있어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 없는데 그걸 선택한다면 못 살 이유도 없지요. 죽을 힘을 다했다는 말이 있지요? 죽을 힘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죽을 만큼 결심하고 살기를 택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중국도 맹수고, 미국도 맹수라
-요즘 정치는 잘하고 있습니까.
“동구 앞에 장승이 있어요. 100년 동안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마을 사람들 떠드는 온갖 얘기를 듣지만 달다 쓰다 맵다 소리 하지 않지요. 그게 장승이라.”
-그래도 정치인들이 스님을 뵈러 오지 않습니까.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오셨지요?
“앉아서 차만 마셨지요. 내가 정치를 모르니 대화 자체가 안 돼요. 잘했다, 못했다 그런 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정치도 예술처럼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님이 무릎 꿇고 옻에 돌가루 뿌려가며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리듯 정성을 다해.
“자기들은 하느라고 하는 걸 거예요(웃음).”
-국민들 기대엔 턱없이 부족하죠.
“못하지요. 그런데 국민들도 어느 정도는 아량을 보여야 해요.”
-무슨 뜻인가요.
“내가 처음 일본 가서 공부할 때 일본과 미국에 무역 마찰이 있었어요. 일본 사회에서 미국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총리가 NHK에 나와서 미국 물건을 제발 좀 사달라고 해요. 한국에서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으면 난리가 났겠지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정치인은 직업상 저렇게 말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만남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시시콜콜 따지잖아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저리 말하는 거다 여기면 돼요. 더 큰 그림을 봐야지요.”
-스님 또한 일제강점기를 사셨습니다.
“현실은 현실이고, 과거는 과거라. 친일이다 뭐다 시비만 하고 있으면 진보(進步)가 없어요. 일본군에 처녀 공출되지 않으려고 밤에 이십 리 산길을 넘어가 결혼식 올리는 걸 나는 눈으로 보고 자랐어요. 국가가 없으면 그리 되는 거라. 그러니 그때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는지 돌아보고 다시는 그리 되지 않도록 해야죠. 이조 말기에도 서로 물고 뜯고 하다가 외침을 당한 거예요.”
-중국에서도 오래 공부하셨지요?
“중국을 적대시해서도, 매달려서도 안 되니 난감하지요. 중국인들 속성은 뭐든지 흡수 통합하려는 거라. 중국화하는 것. 티베트도, 신장도 해방시켜 주겠다며 들어가 죄다 점령해 버렸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해요. 중국도 맹수고 미국도 맹수라. 그들을 당당히 대하려면 분열부터 끝내야 해요.”
17일 오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에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이 반구대 암각화를 옷칠 자개로 구현한 작품이 수중 전시되어 있다./2023.05.17 김동환 기자
◇피카소도 별거 아이데
-6·25로 중학교에 못 가고 동네 서당을 다니셨다지요? 3년 만에 사서삼경을 떼셨고요.
“나는 그 책을 쓴 사람이 되어서 책을 읽어요. 야구장 가면 그 안에서 뛰는 선수가 된 것처럼 관람을 하잖아요? 책도 그래요. 옛사람과 만나서 노는 심정으로, 떠받들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해요. 맹자를 공부할 땐 맹자가 되고, 공자를 공부할 땐 공자가 되고.”
-40대 초반에 통도사 주지가 되셨어요. 산문을 세워 경내에 있던 여관과 식당을 내보내고, 영축산 경지도 정비하니 주민들이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다고요.
“어른들 말 잘 듣는 사람을 ‘지당대신’이라고 해요. ‘지당하십니다’만 하고 임기를 채울 것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 사흘도 못 가서 그만둘 것인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지요(웃음).”
-그때 이미 절의 자급자족을 주장하셨어요. ‘시주 물은 쇠 녹인 물 마시듯 하라’ 했지요.
“땅이 있으니 승려들도 농사를 지어야지요. 밭도 갈고 트랙터도 몰고. 그걸 울력이라고 해요. 통도사엔 사계절 울력이 많아요. 수행의 한 방법이지요.”
-16만 도자대장경에 고려 장지도 재현하고, 사찰 최초로 성보박물관도 세웠습니다. 수행은 안 하고 쓸데없는 일 벌인다고 혼도 많이 나셨다고요.
“내가 이래 쪼맨해도 간이 커요(웃음).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미리 겁먹고 못 하진 않아요. 그런데 절은 한국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라. 불교를 모르고 우리 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요. 욕을 먹어도 밀어붙인 이유지요.”
-요즘은 ‘종이책 무한대 모으기’를 시작하셨다고요.
“사람들이 핸드폰만 보고 책을 안 읽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한자를 모르듯 문자를 모르는 미래가 올지도 몰라요. 그런데 책이 애물단지가 됐어요. 학자들은 유학 가서 끼니 굶어가며 산 책이에요. 농부로 치면 논밭 한가지라. 그런데 퇴직해서 집에 갖다 놓으면 마누라까지는 봐줘도 며느리는 갖다 내버리기 바빠요. 그 책들을 보내달라는 겁니다. 언어, 분야 가리지 않아요. 서고(書庫)로는 절이 최고지요. 누가 팔아먹도 못 하고 중들이 늘상 지키고 있으니 제일 안전하고요(웃음).”
-’나는 무소유와 정반대’라고도 하셨어요.
“무소유는 좋은 것인데 그게 포기 작전으로 가는 길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에요. 뭐라 할까.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명이 있는 한 같이 가야 할 것이 의욕이라. 호흡을 살아 있는데 의욕이 죽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죠. 그건 탐욕과는 다른 거예요.”
-최고령으로 드론도 배우셨다고요.
“내가 욕심이 대적(大賊·큰도둑)이라. 이제 고만 말아야지요(웃음).”
성파 스님이 10년에 걸쳐 도자로 제작한 16만대장경은 통도사 장경각에 모셔져 있다. 그 앞마당엔 스님이 옻칠 자개로 재현한 반구대 암각화가 물속에 전시돼 있다. 피카소도 울고 갈 작품이라고 하자, 스님이 껄껄 웃었다. “피카소도 별거 아이데!”
☞성파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으로, 193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22세에 경남 양산 통도사로 출가해 주지와 방장을 지내며 개산대제 개최, 성보박물관 건립 등 불보사찰의 격을 높였다. 도자, 민화에도 뛰어난 예술 승려로 16만 도자대장경과 이를 모신 장경각, 옻칠 자개로 구현해 수중 전시하는 반구대 암각화는 통도사의 명물이 됐다.
-김윤덕 선임기자, 조선일보(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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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오대산, 탄허의 통찰
20세기 최고 學僧 탄허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왼쪽)과 함께 오대산과 탄허 스님에 관해 대담하고 있는 필자.
중국으로 유학 간 승려들이 이 땅에 선진 풍수 이론을 도입했다. 한국 풍수는 독자적 모습을 갖춘다. 한국 풍수의 본질은 ‘메시아적’ 특징이다. 도선국사는 새로운 왕조(고려)의 출현을 예언하였고, 고려의 풍수승 묘청은 주변 36국이 조공하는 황제국이 될 것을 풍수설로서 설파하였다. 무학대사도 조선 건국에 기여하였다. 그 밖에도 신돈·성지·일지·일이 같은 숱한 풍수승이 있었다.
도선·묘청·무학대사가 풍수를 통해 이 땅에 주려고 한 ‘메시아’ 사상은 20세기 최고 학승 탄허 스님에게도 드러난다. 그가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음은 함석헌 선생이나 자칭 국보 제1호 양주동 교수가 인정했다. 탄허는 “동양의 3대 골칫거리”인 불교의 ‘화엄경’, 유교의 ‘주역’, 도교의 ‘노장(老莊)’을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해석도 독보적이었다.
탄허는 여러 예언을 하여 적중시켰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문화 국가가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근거는 그의 ‘간산(艮山)’ 사상이다. 유교·불교·도교·기독교 사상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간방(艮方·북동방)에 있는 한국이 세계 정신 문명의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언을 말한다.
그는 유·불·선 말고도 사주와 풍수까지 섭렵하였다. 6년 전에 공지한 대로 1983년 6월 5일 유시(酉時·오후 5~7시)에 입적하였다. 사주를 알았음이다. 그는 곽박(郭璞)과 이순풍(李淳風) 같은 중국 고대 풍수 대가를 도교의 4대 유파 가운데 점험파(占驗派)에 분류하기도 하였다. 풍수 예언서 ‘정감록’을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개인의 발복을 꾀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국가와 민족에 희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참된 예언이라는 뜻이다.
탄허의 통찰력과 예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1934년 오대산 한암 스님에게 출가하여 1983년 입적하기까지 그는 오대산을 떠나지 않았다. 오대산은 탄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오대산에 출가하여 탄허의 법맥을 잇는 월정사 정념 주지 스님의 말씀이다.
"오대산은 금강산의 수려함과 지리산의 웅장함을 겸비한 수려·웅장한 산으로 오행(五行)을 갖춘 산이다. 오대(동·서·남·북·중대)란 오행의 다른 표현이다. 오행을 주관하는 것이 토산(土山)인데, 토산은 코끼리와 같이 후덕하고 평화로운 산을 말한다. 동해와 적당한 거리를 둔 데다가 북서 편서풍이 차단되어 습도가 낮다. 해발 700~900m에 자리한 사찰과 암자들은 공기가 맑고[淸] 시원[凉]하다. 오대산은 청량산(淸凉山)이다. 맑고 시원한 까닭에 탐진치(貪瞋癡: 욕심·노여움·어리석음) 불길이 절로 꺼진다. 불길이 꺼져 고요한 빈자리에 지혜의 빛[般若智]이 발한다. 지혜의 보살 문수사리가 오대산(청량산)에 거주하는 이유였다.
오대산은 불교 최고 가치인 화엄(華嚴), 즉 꽃으로 장식된 장엄한 세상의 발현이다. 오대산과 탄허 그리고 화엄은 셋이 아닌 하나이다. 화엄 사상은 세상과 미래를 통찰하여 준다. 탄허가 미래 한국이 도의적·문화적으로 세계 중심 국가가 된다고 예언한 것도 이에 근거한다.
사족을 달자면, 오대산 물길은 급하지 않게 담담하게 조용히 흐른다. 물길이 태극 모양인 수태극(水太極)이다. 재물이 넉넉하다. 적멸보궁은 비룡상천혈(飛龍上天穴)로서 일찍이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터 덕분에 조선 불교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월정사는 금구음수형(金龜飮水形)으로 대웅전은 그 거북 등에 앉아 있다. 1000년 사찰이 된 큰 이유이다. 오대산의 맑고 시원[淸凉]한 기운으로 코로나 19의 우울함과 답답함을 털어내는 것만으로 복이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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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불보살이 머무는 영지, 오대산의 재발견
오대산 적멸보궁.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나는 그동안 오대산파(五臺山派)는 잘 몰랐다. 오대산에 아는 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아야 그 산에 자주 가게 된다. ‘山不在高(산부재고) 有仙則名(유선즉명)’이라는 말도 있다. 산은 높다고 장땡이 아니고 그 산에 신선이 살고 있어야 명산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은 나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축소해석하고 싶다.
나는 계룡산파 출신이다. 계룡산파의 특징은 주역과 사주팔자, 국운과 같은 미래 예측에 주특기가 있다. 근래 계룡산파가 배출한 최고의 인물은 김일부(金一夫·1826~1898) 선생이다. 이 양반이 ‘정역(正易)’이라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책을 써냈다. 그 요체는 후천개벽 시대로 진입한다는 것이었다. 후천개벽이 오면 어떻다는 말인가? 여자가 득세한다는 것이고, 상놈과 딴따라가 대접받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고, 한국이 ‘세계를 이끄는 문화의 지도국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필자가 1980년대 계룡산에 드나들면서 계룡산파 선생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지만, 요즘 와서 보니까 그리 황당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리산파의 주특기는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에 있다. 7부 능선쯤에서 멈추고 청산으로 들어와서 유유자적하게 살자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합천의 가야산파는 왠지 속세와 떨어져서 소나무 향기가 짙게 밴 도인의 풍모가 있다. 가야산파는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는 특징이 있다. 최치원의 유풍이 남아 있다. 속리산파는 의술과 치료에 주특기가 있었고, 금강산파는 차력(借力), 무술(武術), 축지(縮地)와 같은 밀리터리 도술에 고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상대적으로 오대산파는 무엇인가. 그동안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오대산을 출입하게 되었다. 그 산과 인간의 궁합도 시절 인연이 있다. 너무 젊어서 갔더라면 깊이를 몰랐을 수가 있다. 세상 풍파를 어느 정도 겪고 쓴맛도 본 다음에 오대산을 오른 것이다.
규방 깊숙이 숨어 있는 귀족적 미인 닮아
남한의 서남쪽에 살았던 필자로서는 동북 방향에 있는 강원도 오대산이 접근하기에는 좀 멀었다. 대척점에 있었다. 그렇다고 산의 형세가 바위절벽이 장엄하고 드라마틱한 모습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육산을 대표하는 오대산의 매력은 숨어 있었다. 화면발 잘 받는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규방 깊숙이 숨어 있으면서도 귀족적인 매력을 풍기는 미인에 비유된다고나 할까.
우선 오대(五臺)라는 지명이 범상치 않다. 오대는 5개의 봉우리이고, 이는 동양의 오행사상에 그대로 배치된다.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지고 음양에서 다시 오행으로 분화된다. 오행에서 만물이 배출된다. ‘수·화·목·금·토’라고 하는 오행사상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너무나 깊숙이 박혀 있는 사상적 틀이다. 오행의 가운데에는 토(土)가 있다. 동서남북 사방의 4가지 요소, 즉 수·화·목·금이 모두 토에서 융합된다. 오대산의 동대·서대·남대·북대도 다 개성이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 중대(中臺)가 있는 것이다. 음양오행 가지고 글도 쓰고 밥 먹고 살아온 필자로서는 이 오대와 중대라는 지명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어떻게 이리 절묘하게 산봉우리 5개가 형이상을 형이하로 보여준단 말인가!
오대의 한가운데 있는 중대의 카타르시스
중대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도사들이 깊은 애착을 가졌던 지점이다. 지로산(地爐山)이라는 명칭이 그것이다. 로(爐)는 화로라는 뜻이다. 도가의 단학(丹學)에서는 화로가 핵심이다. 신선이 되려면 화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로에서 불을 어떤 강도로 조절하느냐, 그리고 화로의 재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단약의 성패가 결정된다. 화로의 재질이 금이냐 은이냐 동이냐 아니면 쇠와 금의 합성이냐 아니면 옥으로 만든 화로를 쓰느냐에 따라 약물의 효능이 달라진다. 약물이라는 것은 제조를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제조는 화로에서 이루어진다. 화로에는 불을 때야 한다. 불은 화학 변화를 일으키게 해주는 신물(神物)이다. 범속에서 초월로 넘어가는 계기는 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양 신화에서도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법사는 불을 다루는 능력, 그러니까 화로를 다루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한국의 제조업, 특히 자동차와 조선, 고층빌딩을 뒷받침하는 데에는 철강회사인 포항제철이라는 존재가 필수적이었듯이 말이다. 화로가 지닌 또 다른 의미는 내단(內丹)에서도 나타난다. 외단(外丹)이 섭취하는 약물을 제조하는 것이라면 내단은 인체의 오장육부에서 심장의 화기와 신장의 수기를 융합하는 일이다. 내면의 연금술이다. 이 화기와 수기가 만나서 융합하는 장소가 아랫배의 단전(丹田)이다. 단전에다가 호흡을 통해서 바람을 넣는다. 단전호흡은 화로에 바람을 집어넣는 풀무질에 해당한다. 바람을 너무 세게 넣어도 안 되고 약해도 안 된다. 시기에 따라서 적절한 풀무질이 요구된다. 이 풀무질의 농도 조절이 바로 고도의 내공이라는 것 아닌가. 그 풀무질이 이루어지는 인체의 단전이 바로 화로이고, 신선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승부는 화로에서 결판난다. 오대산 중대를 지로산이라고 명명했다고? 이건 도가에서 일찍부터 오대산을 주목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중대에서 도를 닦으면 사방의 동·서·남·북대에서 ‘자동빵’으로 에너지가 중앙으로 집중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오대산은 그 포진된 5개의 봉우리가 범상치 않은 것이다.
적멸보궁 뒤에 있는 용뿔바위.
오대산 영적 에너지 주목한 불교
그러나 오대산이 가지고 있는 영적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목을 한 문파는 도교가 아니라 불교였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일찍부터 오대산을 찜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자장율사가 누구인가. 선덕여왕 때의 대국통, 즉 왕사를 지낸 인물이다. 신라를 불교국가로 만드는 마스터플랜을 짠 고승이다.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세우는 공사를 기획했고, 울산의 태화강 입구에 태화사라는 절을 세워 신라의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양산 영축산 밑에다가 통도사를 건립하여 국가적으로 승려들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 자장율사가 바로 오대산을 주목하였다.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의 중대 꼭대기에다가 모셨다. 그게 지금의 적멸보궁이다.
중대의 적멸보궁에 대해서 이곳이 최고의 명당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영지이다. 사리는 도를 닦은 고승의 뼈를 태우는 화장(火葬)의 과정에서 나오는 구슬이다. 영롱한 빛깔을 띠고 있다. 황금색도 있고 수정처럼 맑은 색의 사리도 있고, 보라색의 사리도 있다. 삼겹살에 소주 많이 먹고 골프만 치고 죽은 일반 범부도 죽어서 화장을 하면 사리는 나온다. 문제는 흑사리가 나온다는 점이다. 영롱한 빛이 없는 거무튀튀한 사리다. 흑사리 껍질은 아무 영험이 없다. 유럽의 이름 있는 수도원에 갔을 때도 그 수도원의 바닥이나 또는 성당의 밑에 유명 수도사나 신부의 유골을 매장해 놓은 광경을 여러 군데서 목격하였다. 말하자면 법당 바로 밑바닥에다 매장해 놓은 셈이다. 필자는 처음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보통 신자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바로 그 발 밑에다 무덤을 쓴 단 말인가? 이건 무엇인가?
그 성자급 사제나 수도사들의 뼈에서 나오는 종교적 영험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 필자가 추측한 결론이다. 도를 많이 닦은 고단자의 뼈에서는 4차원의 계시나 기도발이 나온다고 서양인들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성자가 꿈에 나타나서 병을 고쳐주거나, 아니면 어떤 미소를 짓거나, 아니면 참나무 가지를 하나 건네주거나, 아니면 이마를 쓰다듬어 주거나 한다. 그러면 재수가 있는 것이다. 이건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이런 종교적 체험이 누적되다 보면 아예 성당 예배 드리는 바닥에다가 그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시정잡배들 시신을 바닥에 묻어 놓으면 밤에 귀신으로 나타나서 신자들에게 해코지나 하고 신세 타령이나 하겠지만, 그 모든 집착을 다 털고 간 도력 높은 신부들은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주었지 해코지를 하겠는가. 유럽도 망자의 뼈가 가지고 있는 파워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사리는 뼈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뼈의 진액이 뭉쳐서 사리가 된 것이다. 고승의 살아생전 닦아 놓은 모든 내공이 사리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된다. 그러니 영험이 없을 리 없다. 사리를 모셔 놓으면 꿈에 상서로운 빛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병이 낫거나 인생 근심거리가 사라지는 체험을 많이 한다. 유교를 신봉했던 조선시대에도 불교의 사리를 접하고 난 뒤에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리응험기(舍利應驗記)’ 같은 기록은 당대의 일급 유학자들이 남긴 기록이다. 유학자들도 사리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하고, 그 영험함을 부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도 옆에 붙은 섬나라인 스리랑카에는 불치사(佛齒寺)라고 하는 유명한 사찰이 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齒牙舍利)를 모셔 놓았다는 절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영국 사람들이 이 치아사리를 가져가려고 여러 가지 작전을 많이 썼지만 스리랑카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못 가져가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리랑카가 비록 식민지 지배를 받더라도 부처님 치아사리만 잘 보존하면 언젠가는 영국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전 국민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 불치사에 가서 치아사리를 친견한 다음에 영험한 꿈을 꾸었던 경험이 있다. 치아사리는 직접 눈으로 친견하려면 매우 어렵다. 날짜, 시간 그리고 뒤로는 백을 써야만 가능하였다.
적멸보궁 근처의 샘물 ‘용안수’.
용안수 샘물의 효험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오대산의 중대 꼭대기에다 모셔 놓았다. 중대 꼭대기는 엄청난 명당이다. 용의 머리 꼭대기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적멸보궁 법당 뒤로는 이 용의 뿔을 상징하는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이 용의 뿔에 해당하는 바위는 풍수적으로는 1만볼트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수맥(入首脈)이다. 바위가 돌출되어 있어야만 에너지가 들어오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적멸보궁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가면 샘물이 있는데 이 샘물 이름이 가관이다. 용안수(龍眼水)이다. 글자로 써 있다. 용안수가 양쪽으로 두 군데 있다. 이는 적멸보궁이 용의 머리에 있다는 점을 확인시키기 위한 보조장치이다. 물맛이 좋고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소문 나서 신도들이 자주 마신다. 나도 간 김에 두 바가지나 들이켰다. 좋은 약수는 최고의 건강식품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지리산 화엄사 뒤로 가면 봉천암(鳳泉庵)이 있는데 이 봉천암에도 영험한 샘물이 있고, 그 샘물 이름이 봉안수(鳳眼水)이다. 봉황의 눈에서 나오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적멸보궁의 용안수는 용의 눈에서 나오는 샘물이다. 적멸보궁의 법당에 앉아 보면 바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쩌릿쩌릿하니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올라온 기운은 머리 쪽으로 올라간다. 양 미간 사이에서 빛이 발한다. 약간 누런색 빛도 올라오다가 핑크빛으로 변하기도 한다. 명당에서 올라오는 에너지는 찌릿한 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색깔로도 감지된다. 색깔은 대체적으로 황금색, 흰색, 핑크색 정도다. 영험하다는 기도터에 가서 이런 기운을 느껴야지 영지가 확실히 있기는 있구나 하는 신심을 가진다. 그러려면 몸을 예민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술·담배 적게 하고 마음을 화평하게 가지고 평소에 몸을 무리하게 쓰지 말아야 한다. 평온한 상태에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도 닦는 것이다. 너무 기뻐하고 들뜨거나 아니면 너무 화내고 근심 걱정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감(氣感)이 떨어진다. 그 중간 상태의 마음을 항상 유지하면 그게 평상심이다. 조주선사는 ‘평상심이 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상심을 오래 유지하면 자동적으로 기감은 형성된다.
자장율사는 오대산의 각 봉우리마다 불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즉 오대산에는 5만명의 불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신앙이 그것이다. 봉우리 하나마다 1만명씩이나 불보살이 있다는 이야기다. ‘오만진신(五萬眞身)’이다. 서너 명도 아니고 5만명이 계신다고 하니 그 얼마나 성스러운 산이란 말인가! 만약 한국에 기독교가 먼저 들어왔으면 이 오대산은 기독교적 의미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자장율사는 동쪽의 동대 만월산에는 1만명의 관음보살이 상주해 있고, 남쪽의 남대 기린산에는 1만명의 지장보살이 있고, 서쪽의 서대 장령산에는 대세지보살이 있고, 북쪽의 북대 상왕산에는 오백의 대아라한이 있고, 중대의 지로산에는 1만명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믿었다. 자장율사에 이어서 신라의 두 왕자가 이 오대산에 와서 도를 닦았다. 형 보천태자와 동생 효명태자 형제이다. 아마도 경주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니까 경주와 멀리 떨어진 오지였던 오대산에 숨어서 수도를 했던 것일 게다. 형편이 풀리니까 동생 효명은 경주로 다시 돌아가서 왕이 되었다. 33대 성덕대왕이다. 유명한 에밀레종이 바로 성덕대왕 신종으로 불린다. 형인 보천태자는 오대산에 남아서 수도를 하였다. 보천은 여기에서 좋은 샘물로 차를 달여 먹고 불보살들에게 차 공양을 한 덕에 육신등공(肉身騰空)을 했다고 ‘삼국유사’에 나온다. 육신등공은 육신을 가진 채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이다. 신라 출신 김가기가 중국 종남산에 가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대낮에 백일승천(白日昇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대낮에 몸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다. 신선 중에서도 최고 등급이 백일승천이다. 육신등공과 비슷한 의미다. 오대산과 적멸보궁은 6세기 무렵부터 이미 영지로 대접받았던 민족의 성지요, 자기 치유이니 영지임이 틀림없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주간조선(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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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법흥 老스님에게 듣는 삶의 화두
[부처님오신날 특별 인터뷰… 송광사 법흥 老스님에게 듣는 삶의 화두]
조지훈 시인·효봉 스님이 은사
"너그러운 효봉, 친절한 일타… 쉬지 않고 노력한 법정 스님"
"해탈 위해 전국 기도처 찾아… 팔만대장경 앞에선 17만배… 간절히 기도하면 업장 소멸"
전남 순천 조계총림 송광사는 온통 연록의 잔치였다. 큰절 동쪽 개울 건너 화엄전에 들어서니 '방우산방(放牛山房)'에서 노스님이 봄꽃처럼 싱그런 미소로 객을 맞는다. 송광사에선 동쪽에 사신다 하여 '동당(東堂)스님'으로 불리는 법흥(法興·86)스님이다.
법흥 스님은 '스승 복'이 많다. 속세의 은사는 고려대 국문학과 시절 조지훈 시인이다. '방우산방'이란 당호는 조지훈이 월정사에서 머물던 '방우산장'에서 따왔다. 1959년 출가해선 당대의 선사인 효봉(曉峰·1888~1966) 스님이 은사다. 구산(九山) 전 송광사 방장, 법정(法頂) 스님이 절집안 촌수로 형님이다. 법흥 스님은 송광사 주지와 회주(會主), 그리고 조계종 원로의원을 역임했다. 불기(佛紀) 2561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지난주 송광사에서 법흥 스님을 만났다.
송광사 동당 법흥 스님이 점심 공양(식사)을 하기 위해‘방우산방’을 나서서 큰절로 가고 있다. 스님은“1970년대부터 송광사에서 여러 대중 스님들과 함께 살아온 것 자체가 공부”라고 말했다.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새벽 예불 드리고, 능엄신주와 '관세음보살보문품' 등 40년간 매일 독경해온 경전을 읽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지요. 밥때 되면 먹고, 평생 써온 금강경 쓰고,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 책도 읽고 지냅니다. 옛날 주지(1974~77) 시절부터 수십년간 새벽 예불 때면 모든 전각을 돌면서 한 시간씩 절하고 기도 올렸어요. '국보(國寶) 잘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요.(고려시대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송광사는 국보 4점, 보물 27점 등 2만여 점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걷는 게 예전만 못해서 전각을 돌지는 못합니다."
미수(米壽·88세)를 바라보지만 그는 지극히 소박하고 솔직하게 '중[僧]답게 사는 법'을 보여주는 어른이다. 시봉하는 이 없이 직접 '061'로 시작하는 일반 전화를 받고, 빨래하고, 공양(식사)은 자신의 방에서 받지 않고 시간 맞춰 통나무 다리를 건너 큰절로 간다. 요즘 낙(樂)은 부처님과 옛 선사들의 말씀을 붓글씨로 써서 선물하는 것이다. '금강경' 5400자를 사경(寫經)해 선물한 병풍이 140개에 이른다고 했다.
―출가 사연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절에 가서 절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대학 다닐 때에도 서울 청룡사, 개운사에서 매일 기도를 올렸어요. 졸업하고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문경 대승사 묘적암으로 갔지요."
―거기서 효봉 스님을 만나셨나요.
"아닙니다. 당시 묘적암에는 훗날 조계종의 대율사(大律師)로 꼽힌 일타 스님 혼자 계셨어요. 출가하러 왔다 말씀드리니 '쌀 두 말 가져오라' 하셔요. 갑자기 객이 오니 먹을 쌀이 없었던 거지요. 일타 스님 말씀 따라 사흘간 1만2000배를 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마룻바닥의 묵은 때가 다 벗겨질 정도였어요. 제 머리 깎아주시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비롯해 중 되는 기초는 다 가르쳐주셨어요. 일타 스님 소개장을 들고 대구 동화사로 가서 효봉 스님을 뵙고 출가했습니다."
―당시엔 절 형편이 어려웠던 모양이지요.
"모두 다 가난했습니다. 직지사 강원 있을 때는 공양 시간에 밥 돌리다 모자라면 처음부터 다시 걷어서 나누기도 했어요. 그래도 당시 스님들은 공부에 대한 간절함이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스님들도 승용차 타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지만 그런 간절함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법정 스님도 책에 썼지만 중은 무소유라야 해요."
―은사 효봉 스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너그럽고 원만하기로 치면 한국에서 최고셨습니다. '참선하는 길이 최고다. 화두 놓친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파계(破戒)는 파기(破器)다. 깨진 그릇엔 물을 담지 못한다'며 참선과 계율을 중시하셨죠."
―출가 후 참선 수행도 많이 하셨지요.
"그렇지 못했어요. 제 별명이 '컴퓨터' '녹음기'입니다. 기억력이 좋아서 구산 스님에게 '총기 좋다'는 칭찬도 들었지요. 그런데 기억력이 참선에 도움이 안 됐습니다. 통도사, 해인사, 상원사 등 전국의 선원을 다니며 '무(無)'자 화두를 들었어요. 그런데 화두는 잘 들리지 않고, 몸이 자꾸 아파요. 나는 왜 안 되나, 답답했죠. 할 수 없이 말씀드렸더니 효봉 스님은 '구산은 상근기(上根機)인데 너는 중근기(中根機)인 모양이다. 참선 대신 경전 공부와 기도를 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셨군요.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와 중생의 해탈을 위해서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오대산 적멸보궁을 비롯해 전국 유명 기도처는 다 찾아다녔어요. 성철 스님 권유로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 장경각에서는 340일 동안 17만배(拜)를 올렸습니다."
―사형(師兄)인 법정 스님은 어떠셨나요?
"이기적(?)이었어요. 주지는 물론 사찰의 총무, 재무, 교무 같은 삼직(三職)은 절대로 안 맡았어요. 그랬던 스님이 1980년대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직은 맡고 싶어 했어요. 하여간 법정 스님은 평생 조금도 쉬지 않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렇게 노력했으니 그 많은 책을 썼지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국민께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부처님은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알려주시고 생사해탈해 피안(彼岸)에 이르도록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육신은 가짜 나, 가아(假我)입니다. '진짜 나', 실아(實我)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재산, 권력 좇으며 욕심부리고 싸우고 사기도 칩니다. 그러나 그런 건 죽을 때 못 가져갑니다. 간절히 공부해 생사해탈하는 것만이 유일한 내 재산이에요. 내 마음이 맑을 땐 부처의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탐진치(貪瞋痴·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를 벗어나지 못하면 축생(畜生)의 마음이 됩니다. 내 재산이 뭔지 잘 챙겨봐야합니다."
청산유수로 법문하던 스님은 문득 벽시계를 보더니 "밥때가 됐다"며 일어섰다. 그는 방우산방을 나서다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 한 구절을 가리켰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사흘이라도 간절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란 뜻으로 갓 출가한 행자들이 배우는 '자경문' 구절이다. 법흥 스님이 처음 머리 깎을 때부터 지금까지 새겨온 초심이다.
-송광사(순천)=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조선일보(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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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出家
어느 절에서 행자들 사이에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의 차이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출가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집을 나오는 것이고, 가출은 집을 나오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출가는 허락받고 나온 것이고, 가출은 허락 없이 나온 것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허락받고 나오셨나요?" 연세 지긋한 스님이 점잖게 한 말씀 했다. "응! 그거 간단해. 가출한 사람은 입산할 때 국립공원 입장료 내야 하고, 출가한 사람은 그냥 들어와도 돼." 해인사 승가대학장 원철 스님이 쓴 책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에 나오는 얘기다.
▶불가(佛家)에서 음력 2월 8일은 특별한 날이다. 부처님이 왕자의 영화(榮華)와 속세의 인연을 모두 버리고 깨달음을 찾아나선 날이다. 집착과 속박의 성(城)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부처의 출가를 '넘을' 유(踰)자 써서 유성(踰城)이라고도 한다.
▶소설가 최인호도 때론 자기의 성을 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어느 날 수덕사에 있는 스님의 승복을 빌려 입고 밀짚모자 쓰고 욕망과 환락이 넘치는 강남 중심가를 걸었다. 유명 소설가에 얼굴도 잘 알려진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전의 내가 아니었다. 걸음도 반듯해지고 진짜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환희가 흘러넘쳤다.'
▶보통 사람도 속세의 굴레를 벗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선 어른거리는 것이 너무 많다. 출가의 내적 동기, 발심(發心)은 더 큰 고개다. 성철 스님은 결혼생활 중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절에 들어갔다. 42일 정진 끝에 동정일여(動靜一如)경지에 이르렀다. 이는 성철 스님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절에 들어가도 삼천 배에 면벽 수도 일주일을 하고 엄격한 행자 생활을 거치는 사이 큰맘 먹었던 '출가'가 '가출'이 돼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어제 신문에 실린 조계종 소식에 눈이 간다는 사람이 많다. 조계종은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다 퇴직한 분들을 맞기 위한 출가 제도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동안은 출가자 상한 연령이 쉰이어서 나이 든 은퇴자는 출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은퇴 후 출가'에 관심 갖게 되는 것은 중년 이후 삶이 팍팍하고 번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한편 이런저런 일 다 겪은 이들이 수도(修道)를 하다 보면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라도 깨달음이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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