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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이상용]

뚝섬 2025. 5. 12. 05:42

뽀빠이 이상용

 

이상용이 ‘뽀빠이’로 알려진 것은 1973년 MC 변웅전이 진행하던 오락 프로그램 ‘유쾌한 청백전’ 보조 MC가 되면서였다. 보디빌딩으로 모교인 대전고와 고려대 육체미 대회에서 우승했던 이상용은 미국 만화 주인공 뽀빠이를 자신의 캐릭터로 삼았다. 양복 차림 MC만 봐왔던 시청자들은 팔뚝 굵은 이상용을 신기해했다. 개그도 잘했다. 고려대 응원단장 시절엔 ‘이 몸이 죽고 죽어’로 시작하는 정몽주 시조 ‘단심가’를 ‘연대가 지고지고 일백 번 고쳐 지고’로 바꿔 읊어 학생들 배꼽을 뽑았다.

 

▶이듬해 K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의 마이크를 잡아 16년간 진행하며 ‘어린이 대통령’으로 불렸다. 아이들은 뽀빠이의 팔뚝에 매달리며 좋아했다. 청와대 앞마당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 사회도 그의 독차지였다. 처음 뽀빠이 이상용의 이미지는 힘세고 재미있는 아저씨였다. 그러나 뽀빠이는 여자 친구 올리브가 “구해줘요, 뽀빠이”라고 외치면 어디든 달려가는 구원의 영웅이기도 했다.

 

▶이상용에게도 ‘도움 주는 뽀빠이’ 이미지가 더해졌다. 1980년 방송국으로 그를 찾아온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제자가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엄마 혼자 6남매를 키우느라 수술비가 없다”고 했다. 이상용은 “병약했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수술비 18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때까지 기피하던 밤무대에 섰다. 곳곳에 도움도 요청해 수술비를 마련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전국의 심장병 환아 부모가 그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후 500명 넘는 아이에게 새 생명을 선사했다. 그 공로로 1987년 국민훈장을 받았다.

 

이상용이 공금유용 혐의로 수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우정의 무대’ 등 모든 방송에서 하차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상용 폭소열차’라는 유머 음반을 내고 전국을 돌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의 손길을 받는 이와 그러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상용의 지인들이 “이상용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팔 걷고 나섰다. 송대관, 태진아, 현숙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노래를 불러가며 앨범 판매를 도왔다.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1970~80년대엔 어린이의 뽀빠이, 1990년대엔 군인들의 큰형, 1999년 진행한 ‘아름다운 인생’부턴 노인의 친구로 활동해온 이상용이 영면에 들었다. 세상에는 함께 있기만 해도 주변을 밝게 만드는 이가 있다. 이상용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 하늘 무대로 자리를 옮겨 천국의 뽀빠이로 활약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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