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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첨단 과학의 시대, 인간은 왜 여전히 종교를 찾을까] ....

뚝섬 2025. 8. 6. 06:36

[인공지능과 첨단 과학의 시대, 인간은 왜 여전히 종교를 찾을까] 

[AI 챗봇에 반말, 존댓말 무엇을 쓰시나요]

 

 

 

인공지능과 첨단 과학의 시대, 인간은 왜 여전히 종교를 찾을까

 

오늘날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미신’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요? 신화와 종교도 마찬가지일 수 있어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말이 많고, 실제로 종교 때문에 갈등과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니까요.

 

그런데 우리 주변엔 여전히 미신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오늘의 운세’나 사주팔자를 검색해보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최첨단 기술로 건물을 지을 때도, ‘풍수지리’를 따지는 경우도 많고요. 게임이나 드라마의 스토리도 여전히 신화와 환상으로 가득합니다. 왜 과학의 시대에도 영혼이니, 운명이니, 신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심리학자 카를 융 /위키피디아

 

‘심리학과 종교’는 이에 대해 답을 주는 책이에요. 1937년, 심리학자 칼 융은 미국 예일대에서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이 책은 융이 그때 했던 강의 내용을 묶은 것이랍니다.

 

심리학자인 융은 왜 이런 주제로 강의를 했을까요? 과학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따지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인을 밝혀냅니다. 사회 ‘과학’인 심리학도 마찬가지예요.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와 합리적인 설명을 뛰어넘어, 사람들 마음을 쥐고 움직이는 종교와 신앙은 심리학자로서 당연히 연구할 만한 대상입니다.

 

융에 따르면, 과학은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움직이는지 알려 줍니다. 하지만 삶과 이 세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해요.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사회에 이토록 많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늘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이유를 알면 고통도 견딜 만해지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치과에서 치료를 받을 때 내가 느끼는 아픔이 치통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면 무서워도 참게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종교와 신앙은 우리 인생의 고통이나 시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주곤 합니다. 고통을 겪으며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종교에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융은 말합니다. 과학과 합리성만을 앞세우는 사회는 온전하지 못하다고요. 인류 문명과 역사는 예전부터 어떠한 믿음을 통해 성장해 왔으니까요. 신화와 종교에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올곧게 세우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지혜가 가득합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잘 새기고 삶의 의미를 다잡을 때, 삶도 세상도 온전해질 수 있지요.

 

사실, ‘심리학과 종교’는 쉽지 않은 책이에요. 때로는 논리를 뛰어넘는 통찰을 말하기도 하고, 이해 못 할 신비 체험을 소개하기도 해요. 그래서 ’칼 융의 심리학과 종교 읽기‘(세창미디어)와 같은 해설서를 참고하는 것도 좋지요. 과학만이 옳다는 생각을 넘어, 인류 문화에 담긴 깊은 지혜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는 책이랍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조선일보(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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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챗봇에 반말, 존댓말 무엇을 쓰시나요

 

한국어는 한글이 주는 과학성 덕분에 음운을 터득하기는 쉬운 언어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서열문화로 인해 ‘-시-’, ‘-요’ 등의 존댓말을 이루는 다양한 접사들이 한국어를 갑자기 복잡하게 만들어서 외국인들에겐 배우기 매우 어려운 언어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비상상황이나 격론에 빠져들었을 때 여전히 격조 높은 존댓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인성의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한국어의 숙달 정도를 드러내 주는 강력한 증거다. 인성이 받쳐주는(?) 나조차 이런 상황에서 존댓말을 쓰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뿐 아니라, 어리더라도 처음 만나거나 직장 동료처럼 일정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존댓말로 일단 시작하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에서조차 존댓말과 반말 사용 기준이 모호할 때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말로 인해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도 많이 있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을 때는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존댓말 사용법이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한국인들이 외국인의 실수는 너그럽게 봐주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인 친구가 내 존댓말 사용이 “부적절”하다면서 놀린 일이 있었다. 친구 몇몇이 집에서 축구 경기를 보려고 모였을 때 내가 인공지능(AI) 비서에게 “TV를 틀어주세요”라고 존댓말을 쓰는 게 우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을 대상으로 소규모 조사를 해본 결과 AI와 대화할 때 대부분은 반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를 포함한 다수의 영국 친구들은 AI와 소통할 때조차도 한국어로 치면 존댓말 격인 ‘please’와 ‘thank you’를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이 설문조사는 극히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영어는 한국어만큼 격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AI에 반말 요청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한국 친구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첫째, 개발 단계에 있는 현재의 AI를 감정이 있는 대상보다는 기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반말을 사용해도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둘째는, 존댓말을 사용할 때 덧붙여야 하는 접사들이 불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이를 처리하는 데 드는 시간을 늘려 전체적 정보처리 과정을 비효율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AI를 상대할 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 정보처리 측면에서 더욱 효율적인 화법이 된다는 주장이다.

반면 나는 AI와 대화를 하더라도 존댓말 사용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논지는 이렇다. AI는 기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도록 인간과 유사하게 설계됐다는 전제가 내게는 있다. AI 비서라고 해도 나보다 어린 개인 비서나 안내데스크 직원, 콜센터 직원과 나누는 대화와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AI와 소통할 때에도 이들에게 하듯 동일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배워 온 사회화 방식에 더 부합한다. 게다가 AI도 나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한 대화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집안에서도 일관되게 존댓말을 씀으로써 아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AI와 반말로 대화하는 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사실상 존재한다. 예를 들어 차량 내비게이션 앱은 다양한 목소리와 억양으로 설정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세종대왕이다. 기계적 설정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세종대왕에게 한글박물관을 반말로 찾아가라고 명령하는 것은 여전히 무례한 일이다.

AI에게 반말을 쓰느냐, 존댓말을 쓰느냐에 대한 논쟁이 뜬금없이 들리기는 할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의심스러우면 존댓말’이라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여전히 옳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블록버스터 영화 ‘터미네이터 2’를 본 사람으로서, 그리고 AI의 미래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에서처럼 세상이 언젠가 AI에 지배당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내가 수년간 AI에게 반말을 지껄였다는 이유로 AI에게 공개처형 당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동아일보(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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