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엘리트의 성경 '반지의 제왕']
[아일랜드의 심장]
[한국도 '공대에 미친' 나라였다]
테크 엘리트의 성경 '반지의 제왕'

실리콘밸리의 대부 피터 틸(58)은 유년 시절부터 SF와 판타지의 애독자였다. 특히 판타지 문학의 성경으로 불리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3부작 전체를 외울 만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가 창업하고 소유한 많은 기업에 ‘반지의 제왕’ 인장이 찍혀 있다. 틸의 투자회사 ‘미스릴 캐피털’의 미스릴은 반지의 제왕에서 희귀하고 강한 힘을 지닌 금속이고, 벤처캐피털 펀드 ‘발라르 벤처스’의 발라르는 중간계 신화에 등장하는 신적 존재다.
▶피터 틸의 제자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파머 러키(33)가 한국에 왔다. 러키는 미국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AI 방산 기업 ‘안두릴’의 공동 창업자다. 19세에 만든 가상현실 기업 오큘러스로 억만장자가 됐고, 피터 틸 투자를 받아 안두릴을 세웠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칼의 이름이 안두릴이다. 한국의 서학 개미들이 테슬라 이상으로 사랑하는 AI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도 마찬가지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수정 구슬이 팔란티어다. 안두릴이 창이라면, 팔란티어는 방패인 셈이다.
▶테크 엘리트에게 ‘반지의 제왕’이 영감의 원천이라면, 현대의 디자이너에게는 르네상스 시대 미술 작품들이 그렇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는 해부학·음영 처리법·황금 비율로 현대의 의류와 시각·그래픽디자인에 자신들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무성하게 얽힌 덩굴 무늬 벽지부터 튤립의 우아한 곡선을 반영한 가구까지, 현대 디자이너들은 고전 미술 작품을 존경하고 활용한다.
▶옥스퍼드 대학 영문과 교수 시절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1892~1973)은 판타지가 경직된 현실을 거부하고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강력한 사유의 도구라고 했다. 이제 톨킨의 후예들은 단순히 이름 차용에만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팔란티어 창업자 앨릭스 카프는 지금의 실리콘밸리가 개인의 탐욕에 혈안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희생과 공동체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힘줘 말한다. ‘반지의 제왕’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할 수 있는 비결이 예술이라고 한다.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하는 세속적 기업들이 문학과 예술을 빌려 오는 근저에는 자신들이 이윤 창출 이상의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문학예술아카데미(AAAL)의 웅장한 청동 문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오직 예술만이 지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머문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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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심장

토머스 버, 구도서관의 롱룸(The Long Room), 1712~1732년 건립, 1860년 개축, 트리니티 대학, 아일랜드 더블린 대학교.
18세기 초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 건축가 토머스 버(Thomas Burgh, 1670~1730)의 감독 아래 처음 완성된 도서관의 ‘롱룸(The Long Room)’은 길이만 65m에 이르는 장대한 공간이다. 처음에는 단층이었으나, 1801년 이곳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간되는 모든 신간 서적을 제출받는 법정 납본 도서관으로 지정되면서 장서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결국 1860년 아치형 천장과 2층 서가를 갖춘 지금의 모습으로 확장됐다. 말하자면 당시 롱룸은 온 세계의 지식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롱룸에는 고서 20만 권과 함께 아일랜드의 ‘심장’이라 부를 만한 세 가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9세기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제작한 ‘켈스의 서’, 아일랜드 현존 최고(最古)의 하프로서 기네스 맥주사의 로고에도 등장하는 ‘브라이언 보루(Brian Boru)의 하프’, 마지막으로 1916년 발표된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이다. 이 세 유물은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확고히 증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롱룸’은 계몽주의 시대 인류의 지식에 대한 이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중앙 복도, 하늘을 닮은 둥근 천장, 좌우 대칭의 서가에 크기 순으로 정렬된 서적은 지식이 무한히 확장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또한 그 광대한 세계 속에서 각 책이 제자리를 지키며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는 확신을 시각화한다. 이곳은 어둠과 무지의 세계를 이해와 통제 가능한 세계로 전환시킨 계몽주의 시대의 지적 열망을 압축해 보관한다. 물론 현실은 도서관 분류 기호와 완벽히 호환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도서관 서가를 바라보면, 저 끝 어딘가에 조화롭고 정연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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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공대에 미친' 나라였다
최근 지상파 방송의 다큐멘터리 ‘인재 전쟁’이 화제다. 부제는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그러나 한국이 처음부터 의대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미군이 가져온 책으로 과학기술을 공부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에게 서울대 교수의 3배 월급과 새 아파트를 제공했다. 연구비는 경제기획원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이 시기 우수한 학생들이 화학공학, 전기전자, 물리학 등 이공계에 몰렸다.
1970~80년대 한국은 지금의 중국처럼 ‘공대에 미친’ 나라였다. 그런데 외환 위기(1997년)라는 변곡점이 등장했다. 정부 출연 연구소와 기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대량 해고됐다. 대덕연구단지의 치킨집 주인이 대부분 (해고된) 이공계 박사이며, 과학 기술을 전공한 아버지들이 자식을 절대 이공계에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무렵부터 우수 인재가 의대, 치의대, 한의대에 쏠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원 의대반이 운영되는 사태를 낳은 씨앗이 이때 뿌려졌다.
국가 발전의 동력인 과학기술 엔진을 다시 돌릴 수 있을까? 우장춘, 석주명, 이휘소 같은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이름을 딴 도로와 지하철역, 대학 건물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강남역이나 삼성역에 ‘과학 명예의 전당’ 같은 건물을 만들어 보는 것은? 대통령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떨까?
대학과 연구소 같은 현장을 종종 찾아 과학기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과 격의 없는 대담을 나누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인이나 장관들이 원로 과학기술자에 대한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갈 때 기업 총수만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자들을 함께 수반하는 것도 방법이다. 과학기술자가 사회적 존경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로 세상을 채워보자. 이런 일은 바로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조선일보(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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