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滿月臺), 다섯 번 불탄 비운의 궁궐… ]
[1460년 9월 11일 신숙주, 여진 정벌 승전보를 알리다]
만월대(滿月臺), 다섯 번 불탄 비운의 궁궐…
고려의 아픈 역사 담겨
2018년 이후 중단됐던 개성 만월대(滿月臺)의 남북 공동 조사를 다시 추진하겠다고 국가유산청이 지난 8일 밝혔어요.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려 궁궐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죠. 북한의 국보 122호로 지정됐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곳입니다.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개성 남쪽에 그어지면서 갈 수 없게 된 곳입니다. 오늘은 만월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①고려 왕조의 도읍지 개성에 있는 궁터 ‘만월대’예요. 지금은 궁궐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았습니다. ②고려 왕궁의 정전 ‘회경전’을 3D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 회경전은 고구려 안학궁에 있는 중궁의 모습을 따왔다고 합니다. ③그래픽으로 재현한 고려 왕궁의 전경. 회경전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요. ④만월대에서 출토된 유물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이 새겨진 수막새(왼쪽)와 용 머리 모양을 한 장식 기와입니다. /국가유산청·국립중앙박물관·통일부
‘황폐해진 성’이 민족 정서를 일깨우다
1928년 어느 가을 밤, 전수린(1907~1984)과 왕평(본명 이응호·1908~1940)이라는 두 청년이 개성의 한 장소를 산책하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전국을 순회하는 극단 소속 악사와 배우였고, 마침 그 극단이 개성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죠. 달빛을 환하게 받은 그곳은 잡초가 우거진 폐허였습니다. “세상이 참 무상하구나···.” 서글퍼진 전수린이 곡조를, 왕평이 가사를 지어 노래를 한 곡 만들었습니다.
“황성(荒城·황폐한 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달빛)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국민 애창가요로 남은 노래, 바로 ‘황성옛터’(원래 제목은 ‘황성의 적’)였습니다. 가수 이애리수(1910~2009)가 부른 이 노래는 망국의 설움을 안은 조선인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돼 음반 출시 한 달 만에 5만장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당황한 총독부가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어요. 이 노래에 나온 ‘황폐한 성’이 바로 만월대입니다.
송나라 사신 “무척 장대하고 화려한 궁전”
만월대란 이름은 고려 궁궐의 정식 명칭은 아니에요. 고구려의 왕궁은 ‘안학궁’이었고 신라엔 ‘월성’, 조선엔 ‘경복궁’이란 왕궁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본궐’ ‘본궁’ 등으로 불렸을 뿐 궁궐의 정식 명칭은 전해지지 않아요. 근처에 음력 정월 대보름달을 보기 위해 만든 망월대(望月臺)가 있었는데 이 이름이 변해서 ‘만월대’가 됐단 얘기도 있죠.
고려가 개국한 것은 서기 918년의 일이었습니다. 송악(지금의 개성)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철원에서 태봉(후고구려)의 임금 궁예를 쫓아내고 왕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고려 태조가 즉위한 궁궐은 철원성이었죠. 이듬해 태조는 선조들이 살았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한 고향 송악의 본가가 있던 곳에 새 궁궐을 지었습니다. 이곳이 지금의 만월대였습니다.
왕권 강화 정책을 폈던 4대 임금 광종(재위 949~975)은 961년 ‘수영궁궐도감’이란 관청을 두고 궁궐을 크게 증축했습니다. 전체 규모는 39만㎡ 정도로 경복궁(약 43만㎡)보다 조금 작았습니다. 평지가 아닌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축대를 세워 전각을 지은 구조였습니다. 경복궁의 광화문에 해당하는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어요.
궁궐 안에서 가장 큰 전각을 정전(正殿)이라고 하는데요. 보통 임금이 나와서 조회를 하는 곳이죠.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이 여기 해당합니다. 고려 궁궐에선 이 건물이 회경전(會慶殿)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고구려 안학궁 중궁의 모습을 그대로 따왔다고 합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드러나는 지점이죠.
회경전 못지않게 크고 중요한 건물이 건덕전(乾德殿)이었다고 하는데요. 사신을 접대하고 외교적 연회를 펼친 곳이었다고 합니다. 궁전 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 관계가 적용됐고, 건물 배치에서 지형 조건이 효율적으로 고려된 것 등에서 고려 시대의 높은 건축 수준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123년(인종 1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고려도경’이란 기록을 남겼는데 고려의 문화와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서긍은 여기서 고려 궁궐에 대해서도 기록했어요. “고려인은 음식은 아껴도 거처를 꾸미는 것은 좋아한다. 고려 궁궐은 꿩이 나는 듯이 잇단 용마루는 붉고 푸른 빛으로 장식했다. 정전(회경전)의 규모도 매우 장대한데 동서 양쪽에 계단이 있으며 난간을 붉게 옻칠한 데다 구리 꽃으로 꾸며서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다섯 번 불탔던 고려 궁궐의 운명
하지만 만월대의 운명은 경복궁보다 더 혹독했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지만, 고려 궁궐은 무려 다섯 차례나 전소됐어요.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임금이 피란을 간 뒤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처음 불탔습니다. 현종은 1014년 궁궐을 다시 지은 뒤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승리를 거두면서 100년 이상 지속됐던 평화기의 막을 열었습니다. 고려에서 상감청자가 유행했고 초조대장경을 판각했으며 서긍이 왔다 갔던 때가 다 이 평화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궁궐이 불탔고(2차 파괴), 이후 다시 지었으나 무신의 난 이듬해인 1171년(명종 1년) 권력을 잡은 무신들의 방치로 인해 또 불탔습니다(3차 파괴). 역시 재건했지만 몽골의 침공 때문에 1232년(고종 19년) 강화도로 천도(수도를 옮김)한 뒤 1236년 무렵 몽골군에 의해 훼손됐습니다(4차 파괴). 이후 1270년(원종 11년) 네 번째로 궁궐을 재건했고 40여 년 지난 충선왕 때 증축을 했습니다.
하지만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침략으로 임금이 일시 피란을 갔고, 궁궐은 또 불타 버렸습니다(5차 파괴). 정세운·최영·이성계 등의 승전으로 홍건적을 물리친 뒤 임금은 다른 별궁에 거처했고, 만월대의 고려 궁궐은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은 채 그대로 폐허로 남게 됐습니다. 공민왕은 1374년 시해됐고 1392년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국했기 때문입니다. 만월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강감찬이 가져온 한 세기의 평화기를 제외하고 줄곧 내란과 외환에 시달렸던 고려 시대 격동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9-11)-
______________
1460년 9월 11일 신숙주, 여진 정벌 승전보를 알리다

신숙주 초상.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초기, 북방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다. 세종은 4군과 6진을 개척했다. 이 말은 여진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조선은 여진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세종 다음인 문종 때에는 여진과 내왕이 없을 만큼 찬바람이 불었다.
세조 집권 당시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내조를 청했다. 대신들은 명나라의 눈치가 보여 반대했지만, 세조는 과감하게 이를 허락했다. 심지어 평안도 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도록 조치했다. 적의 수장에게 국내 요충지를 다 살펴볼 기회를 준 셈이다. 세조의 유화책으로 북방의 소요는 가라앉았다. 명나라는 이런 조선의 조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이민족 통치술로 생각한 명나라는 조선의 유화책을 중지시키려 했다. 세조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명의 조치를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화친 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진과의 화친이 파탄에 이르는 사건이 생겼다. 명이 모련위(毛憐衛)라고 명명한 두만강 이북의 추장 낭발아한(浪孛兒罕)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련위를 오랑캐라고 불렀다. 낭발아한은 명나라에서도 관직을 받아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낭발아한도 조선이 자신을 홀대한다고 반발했다. 결국은 명나라에 몰래 아들을 보내려 획책하던 것이 발각돼 조선은 이들 부자를 모두 처형했다. 조선은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내는 강력한 부족의 우두머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낭발아한의 아들 중 하나가 달아났다. 그는 조선에 복종하는 추장들을 제거한 뒤 병력을 모아 조선 공격에 나섰다. 세조 즉위 후 처음으로 벌어진 여진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랑캐는 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한 달 만에 전사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에 좋은 명분이 됐다. 세조는 오랑캐를 멸망시킬 때가 왔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함길도 도체찰사로 북방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던 신숙주를 파견했다. 신숙주는 4월 10일에 여진 정벌 계획안을 올렸다. 이에 따라 정벌군이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명나라에서 여진과 화친하라며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물론 조선은 이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었다. 사신은 조선의 입장에 불쾌해하며 떠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대신들은 여진 정벌에 부정적이었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현장에서 결정하라며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신숙주는 지금이 정벌의 적기라고 말하며 정벌을 단행했다. 그는 8000여 명의 군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눠 신속하게 여진 부락을 일거에 타격한 뒤 9월 11일 세조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 일로 여진 추장들은 일제히 조선에 복종했다. 이후에도 조선은 여진을 상대로 화전 양면책을 구사했다.
신숙주는 사육신의 난 때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아내가 그 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지만, 그의 아내는 사육신의 난 이전에 병사했다. 신숙주는 정치, 군사, 외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일본을 다녀온 뒤에 쓴 ‘해동제국기’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친 명저다.
-이문영 역사작가, 동아일보(25-09-11)-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國史-文化]'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보 중의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반인반귀' 비형랑.. ] .... (1) | 2025.09.18 |
|---|---|
| [경천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조선 불교 탄압 전말사] (1) | 2025.09.14 |
| [그림 로비와 위작 논란] [이우환 그림, 엇갈리는 진품 감정] .... (0) | 2025.09.09 |
| ['케데헌' 열풍과 남산서울타워] [K팝을 빛낸 일월오봉도] [책거리] (0) | 2025.09.07 |
| [잊힐 만하면 반복되는 문해력 논란] [문해력이 아니라 漢字력?] .... (0) | 2025.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