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는 절제, 끝술에는 깊이… 116년 세월이 담긴 나주곰탕]
[곰탕.. 압도적 고소함, 그 뒤를 받치는 구수한 육향]
첫술에는 절제, 끝술에는 깊이… 116년 세월이 담긴 나주곰탕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나주곰탕하얀집’의 곰탕. 1인분에 1만3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곰탕의 본고장 전남 나주시에 왔다. 나주곰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고유명사가 있다. 바로 ‘나주곰탕하얀집’(하얀집)이다. 조선시대 나주목 정청(正廳·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신 객사 건물)인 금성관 앞 원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이 집은 나주곰탕이라는 음식유산의 뿌리이자 살아 있는 역사에 가깝다.
하얀집은 1910년 원판례 할머니가 문을 처음 열었다. 대한제국이 막 저물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격변의 시기였다. 이후 며느리 임이순 여사가 1940, 50년대의 혼란기를 견디며 가게를 지켰고, 아들 길한수 명인이 3대를 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4대 계승자인 길형선 대표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족이 한자리를 지키며 한 가지 음식을 만들면서 이 집은 세속의 무가치함과 묵묵히 싸워 왔다.
노포의 가치는 단순히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문화와 풍속을 만들고 신뢰를 축적한 것에 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하얀집은 한결같이 곰탕을 끓였다. 수많은 식당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이 집이 살아남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복잡한 말이 필요 없다. 역사라는 명분에 앞서 맛이 먼저 식객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본 하얀집의 곰탕(1만3000원)은 화려하지 않다. 첫인상은 맑고 담백하다. 기름기를 걷어낸 국물은 투명할 정도이고, 맞춤하게 삶아낸 쇠고기는 부드럽다. 뚝배기 하나에 부위별로 고른 살코기가 들어 있다. 고기는 당일 도축한 쇠고기만 쓰는 것이 원칙이다. 첫술에서는 절제가 느껴지고 마지막 숟가락에서는 깊이가 느껴진다. 나주곰탕이 지향해 온 미학이란 결국 자극이 아니라 균형이라는 사실을 이 집은 보여준다. 수십 년 전 이곳을 찾았던 손님이 다시 찾아도 같은 맛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노포의 가장 큰 매력이다.
길형선 대표는 27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친 뒤 2011년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의 계승에 힘쓰고 있다. 그 노력은 2015년 전라도 향토음식 대한민국 명인 선정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훈장이나 칭호보다 손님들의 인정 속에 있을 것이다. “나주에 가면 하얀집부터 들러야 한다”는 말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집이 받은 가장 큰 상이다.
요즘 노포라는 말이 흔해진 감이 있다. 온갖 매스컴과 유튜브, 소셜미디어를 통해 숨어 있던 노포들이 쏟아진다. 노포라는 말이 마케팅의 키워드가 된 듯도 싶다. 하지만 세월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영업 전략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충실하게 쌓은 시간과 온축(蘊蓄)의 총합이다. 나주목사 내아장터에서 시작해 금성관 앞길까지 묵묵히 국물을 끓여온 하얀집의 역사가 바로 그렇다. 지금은 현대적 건물로 반듯해진 이 집에서 한 그릇의 곰탕을 먹는 것은 단순히 한 끼를 때우는 일이 아니다. 원판례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116년의 시간과 마주 앉는 일이다. 식객이 뜨는 밥 한 숟가락에 그 의미가 함께 얹힐 때, 먹고사는 일은 비루한 섭생이 아니라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김도언 소설가, 동아일보(26-06-05)-
______________
곰탕.. 압도적 고소함, 그 뒤를 받치는 구수한 육향
외국에 이민을 간 가족이 정육점에 가서 사골을 사려 했다. 밤낮으로 일해 몸이 상했고, 한국에서 하듯 사골을 끓여 몸보신을 하려 한 것이다. 정육점에서는 사골을 거의 공짜로 던져 주다시피 했다. 서양인들은 소뼈나 내장 부속을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국 땅에서 소뼈를 얻어 와 끓인 사람들 모습에 마음이 짠하다가도 한편으로는 그 많은 소뼈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졌다. 몇 안 되는 한국 이민자가 아니라면 그 소뼈는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답은 나중에 외국으로 요리하러 가서 알았다. 서양에서는 보통 한국처럼 소뼈로 육수를 우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향이 덜한 송아지 뼈를 쓴다. 이 또한 그대로 쓰지 않고 한 번 노릇하게 구워 향과 맛을 더한다. 한국도 사골이 비쌌던 것은 20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 사골과 잡뼈는 부피가 커서 유통하기 힘들고 가정집에서는 더 이상 해 먹지 않는 처지가 됐다.
덕분에 늘어난 것은 레토르트 사골 육수다. 뽀얀 곰탕은 지금 귀하기보다 싸고 흔한 공산품에 가깝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온몸을 뒤덮듯 밀려오던 고소하고 쿰쿰한 곰탕 냄새가 잊힐 리 없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강남역 서이초등학교 근처로 가면 아파트 상가가 하나 있다. 그 상가 지하에 새로 문을 연 집 이름이 ‘거대곰탕’이다. 이름에 곰탕을 박은 이유나 자신감이 있을 것 같았다.

서울 서초구 거대곰탕의 '시그니처 곰탕'.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어둡게 칠한 외벽과 각을 잡아가며 놓은 테이블에는 빈틈이 없었다. 손님을 맞는 종업원들도 마치 의장대처럼 몸동작에 규율이 잡혀 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근처에서 온 젊은 직장인이 많았다. 이런 집은 보통 기다린 듯 음식이 빨리 나온다. 애초에 모두 계산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만두가 나왔다. 만두피가 팽팽하게 부풀 정도로 소를 집어넣은 모양새가 손수 빚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두를 한입 베어 물자 고기의 풍성한 질감이 바로 느껴졌다. 기계로 치대어 소가 한데 엉켜 투박한 식감이 아니었다. 사람 손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만두를 빚어 입에서 풀어지는 느낌이 가볍고 산뜻했다.
곧이어 이 집 대표 메뉴라는 농후곰탕이 나왔다. 짙은 상앗빛의 곰탕은 기름기가 녹아들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숟가락으로 바로 국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대략 80~85도였다. 보통 식품공학에서 맛과 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온도라고 설명하는 그 정도였다. 문제는 국이 식었을 때다. 온도가 낮아지면 열기에 감춰졌던 잡맛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 반대로 맛에 자신이 있다면 좋은 커피나 차처럼 정확한 온도에 맞추는 것이 답이다.
이 집 곰탕은 첫 숟가락부터 압도적으로 고소했다. 우유나 크림과 같이 단순한 지방의 맛이 아니었다. 대신 구수한 육향이 폭넓게 뒤를 받쳐 맛이 오밀조밀했다. 그러면서도 잡맛이 없어 티끌 같은 흠도 혀에 닿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곰국을 끓일 때 무작정 오래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곰탕의 첫 물, 즉 잡맛이 섞이지 않은 제일 첫째 국물만 졸여서 농도를 맞춘다고 했다. 다진 마늘은 국을 반쯤 먹고 나서 넣었다. 두유처럼 깨끗하고 깔끔한 맛에 마늘의 알싸하고 얼큰한 풍미가 녹아들었다.
이쯤 되면 윤이 나는 고봉밥을 다 털어 넣고 빨갛게 담근 김치를 올려 먹는 게 순서다. 첼로 독주처럼 독야청청했던 국물에 밥과 김칫국물이 섞이면서 식사의 감각이 흥겹게 바뀌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밀도 높은 육수를 배경으로 단단한 밥알이 녹아들며 묵직한 무게로 위장에 가라앉았다. 뒤이어 빨간 김치가 침샘을 꾹꾹 찔러대며 다음 숟가락을 재촉했다.
점잖게 앉은 사람들 이마에 땀이 고였다. 여자들은 머리를 뒤로 묶고 남자들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마 수십 년 전 이국에서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소뼈를 솥에 넣은 뒤 불 앞에 앉아 끓이고 끓이던 타국의 사람들. 행운과 불행 사이의 동전 던지기가 아니라 인생은 곰국을 끓이듯 오래 앉아 버티는 승부라 생각했던 이들. 그들은 스스로를 닮은 음식을 만들고 먹어가며 기필코 찾아오는 다음 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 모두는 그 진하고 부드러운 힘에 깃든 마음을 알기에 이 뭉근한 맛을 그토록 잊을 수 없다.
#거대곰탕: 고기 곰탕 1만9000원, 시그니처 곰탕 2만3000원, 만두 한 알 3000원, 빈대떡 1만1000원.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조선일보(25-09-27)-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餘暇-City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공정한 승부 망치지 말라… 심판을 심판하다] (1) | 2026.06.14 |
|---|---|
| [“급발진은 없다”] (0) | 2026.06.08 |
| [더 짜고, 자극적이고, 꼬들꼬들하게… 배달이 바꾼 음식의 맛] (1) | 2026.05.31 |
| [택슐랭, 우슐랭, 빵버스… 기사님 믿고 가는 맛집] (0) | 2026.05.31 |
| [성경에 나온 식재료만 먹는 '바이블 다이어트'] [케첩의 원조는.. ] (1) | 202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