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망친 축구, 왜 끊지 못할까]
[인구 14억 중국이 못 이룬 꿈 이룬 15만명 섬나라]
[아프리카 축구]
내 인생 망친 축구, 왜 끊지 못할까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전을 앞둔 6월의 어느 날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 시설을 둘러본 적이 있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사용하는 라커의 거울에 립스틱으로 칠해진 낙서를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즐거웠다.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대한민국 화이팅!” “필승 코리아” 같은 문구 옆에 붉은 하트가 진하게 그려진 거울. 립스틱의 색깔과 필체가 다 달랐다. 한 사람이 한 짓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었다.
누굴까? 그토록 뜨거운 하트를 남긴 사람들은, 립스틱을 들고 축구 대표팀의 라커에 들어갈 수 있는 여자들은 청소부 아줌마들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평소 축구를 보지 않던 여성들도 끓어오르는 ‘팬심(心)’을 참지 못해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는 내밀한 공간에 사랑의 낙서를 새길 만큼, 그때 우리는 월드컵에 미쳐 있었다.
그 뜨거운 6월의 추억 때문에 나는 소설 쓰기를 연기하고 축구에 올인했고, 매주 축구 경기를 시청했고 ’World Soccer’ 잡지를 샅샅이 읽었다. 2011년 유럽 축구 기행을 떠나 손흥민·백승호 선수를 현지에서 인터뷰했다. 축구와 야구에 미쳐 가족에게 소홀했다. 내 인생을 망친 주범인 축구를 나는 아직도 끊지 못한다.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고 떠난 히딩크 감독은 “앞으로 한국 축구는 수비가 문제일 거다. 한동안 한국 축구에 어려운 시절이 올 거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쏟아부어 우리 분수에 맞지 않는 4강에 올랐으니 후유증이 있을 거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원정 첫 승이라는 소중한 성과를 냈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허정무 감독의 지휘 아래 사상 첫 원정 16강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 브라질과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은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미 4강을 맛본 국민들은 월드컵 본선 11회 연속 진출이나 16강에 만족하지 않는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신문과 방송은 ‘원정 최초 8강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한국 축구가 어디까지 전진할지 알 수 없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JTBC에 더해 KBS도 북중미 월드컵 중계방송을 한다니 한국이 탈락했다고 월드컵 생중계를 중단하는, 축구 팬을 배신하는 야만적인 일은 하지 않기 바란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미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편안히 보지 못할 것 같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조선일보(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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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4억 중국이 못 이룬 꿈 이룬 15만명 섬나라

‘퀴라소’라는 나라가 있다. 카리브해에 있는 인구 15만명의 초미니 섬나라(tiny island nation)다. 면적은 444㎢로 제주도의 4분의 1, 인구는 서울시 구(區) 평균의 절반 정도다.
네덜란드령이었다가 2010년 자치국 지위를 얻은 신생국(newly autonomous country)이다. 네덜란드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고, 외교와 국방은 네덜란드가 대행하며, 내정만 자치적으로 한다(retain autonomy over domestic matters).
그런 작은 섬나라가 북중미카리브 지역 최종 예선 B조 자메이카와 벌인 마지막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3승 3무(승점 12) 무패 조 1위로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직행 티켓을 따냈다. 인구 14억 중국이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못 이룬(long for but never achieve) 꿈을 이뤄 낸 것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인구 약 35만명의 아이슬란드를 제치고 월드컵 사상 최소 인구 출전국(participant with the smallest population) 기록을 경신했다(set a new record). 2026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릴 미국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의 수용 인원(seating capacity)은 8만2500명으로, 퀴라소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들어갈 수 있다.
감독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네덜란드 출신 딕 아드보카트다. 네덜란드·벨기에·러시아 등 7국 대표팀을 지휘한 경력의 아드보카트는 지난해 1월 부임한 이후 2년이 채 안 돼 초미니 섬나라를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았다. 올해 78세로, 2010년 남아공 대회 당시 71세 317일이었던 그리스 감독 오토 레하겔의 기록을 넘어서며 월드컵 사상 최고령 감독을 예약했다(secure the record as the oldest coach).
퀴라소 대표팀은 사실상 ‘네덜란드 B팀’이라고 할 수 있다. 선수 중 22명이 퀴라소에 뿌리를 둔 네덜란드 국적 이민자 가족 출신(descendants of Dutch nationals with roots in Curaçao)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꿈꾸다가 좌절한 퀴라소 혈통 선수들을 다시 ‘조국’으로 귀화시켜(naturalize players of Curaçaoan descent to represent their ‘ancestral homeland’) 월드컵 진출에 도전해 왔다.
자메이카와 최종 예선(final qualifying round) 마지막 경기는 특히 극적인 드라마였다. 무승부(draw)만 거둬도 월드컵 진출이 확정되지만, 패하면 승점·골득실 등 순위 산정 기준에 따라 2위 이하로 떨어져 좌절될(fall below second place and miss out) 수도 있었다.
퀴라소와 월드컵 직행 티켓을 놓고 다투던 자메이카는 필사적이었다(be desperate). 후반전(second half)에만 세 차례나 퀴라소 골대를 강타했다. 경기 종료 직전인 87분에도 헤딩슛(header)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다. 0-0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추가 시간(stoppage time)에 자메이카에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퀴라소의 꿈은 기어코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seem about to evaporate).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비디오 판독(VAR)을 요청했다. 그 결과, 페널티킥 선언이 번복됐다(be overturned). 거의 동시에 경기는 그대로 무승부로 끝났고, 마침내 기적은 이뤄졌다.
-윤희영 에디터, 조선일보(2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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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축구

1977년 ‘축구 황제’ 펠레가 ‘2000년이 되기 전에 아프리카 국가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란 예측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다른 예언들과 마찬가지로 빗나간 예측이 됐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올림픽에선 두 차례(1996 나이지리아, 2000 카메룬) 우승했지만 월드컵에선 2022년 모로코 4강 진출이 최고 성적이다.
▶그래도 아프리카 축구는 무섭게 성장했다. 2018 월드컵 우승 당시 프랑스 대표팀은 23명 중 15명이 카메룬, 알제리, 기니, 말리 등 아프리카계였다. 거의 모든 유럽 명문 클럽에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있다. 아프리카 각국 대표팀 또한 상당수 선수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태어났거나 성장했다. 월드컵 4강 돌풍을 일으킨 모로코 대표팀 선수 26명 중 14명이 이민자 출신이었다. 유럽의 선진적인 육성 시스템 속에서 훈련받은 이민·난민 가정 2세들이 다시 고국의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것이다.
▶2022 월드컵에선 이전 월드컵과 달리 유럽 출신 유명 백인 감독이 아프리카 팀을 지휘하는 풍경이 사라졌다. 당시 본선에 진출한 아프리카 5국 감독 전원이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자국 출신으로 채워졌다. 아프리카 선수의 속성과 팀의 문화를 잘 아는 자국 출신 감독들이 코칭 패러다임도 바꾸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축구의 영향력과 인기는 대단하다. 2005년 코트디부아르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디디에 드로그바가 TV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는 힘을 합쳐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내며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추자”고 호소하자, 정부군과 반군으로 갈라져 싸우던 코트디부아르 전역에서 일주일 동안 총성이 멈췄고 1년여 뒤 내전은 막을 내렸다. 2023년부터 내전에 시달려온 수단은 국내 축구는 중단됐지만 대표팀이 월드컵 예선을 치르고 있다. 안전 문제로 홈경기는 리비아에서 치르고, 훈련 캠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차렸다. 수단축구협회 관계자는 “나라 전체가 갈라졌지만, 대표팀이 경기하는 90분 동안은 그 모든 것을 제쳐둔다”고 말한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 대서양의 인구 52만명 섬나라 카보베르데가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남은 예선 2경기 중 1승만 거두면 역대 월드컵 참가국 중 인구 기준 둘째로 작은 나라가 된다. 국토 면적은 강원도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축구 리그는 무려 11개가 있다고 한다. 작은 섬나라가 기적을 끝까지 써나가길 기대한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조선일보(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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