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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외할아버지는 밀수업자였다"] ['항쟁'을 함부로 쓰지 말라]

뚝섬 2025. 10. 23. 08:30

["김정은의 외할아버지는 밀수업자였다"]

['항쟁'을 함부로 쓰지 말라]

 

 

 

"김정은의 외할아버지는 밀수업자였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북한 김정은의 외할머니(maternal grandmother) 이맹인(李孟仁) 사진이 공개됐다. 지난 6월 ‘고용희-김정은의 어머니가 된 재일 코리안’이라는 책을 펴낸 일본 도쿄신문 전 논설위원(editorial writer) 고미 요지가 제공한 것이었다.

 

김정은이 쏙 빼닮은 얼굴 모습(spitting image)이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탈북민(North Korean defector)은 “북한에서는 ‘누구를 붕어빵처럼 닮았다(look like a carbon copy)’고 하지 않고 ‘누구를 먹고 게웠다(eat and vomit)’고 표현하는데,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고미 요지에 따르면, 이맹인은 일제강점기(Japanese colonial period) 때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역시 제주도 출신인 김정은의 외할아버지 고경택(高慶澤)은 일본에서 최소 3명의 여인과 살림을 차렸는데, 이맹인이 첫 번째 부인은 아니었다. 고경택은 1913년 제주도 조천읍에서 태어나 1929년 16세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한 공장에서 일했는데, 일본군 산하 군수 업체 공장(munitions plant)이었다고 한다.

 

밀입국자(illegal immigrant)였던 고경택은 얼마 후 밀수업자(smuggler)가 됐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밀항선(blockade runner)을 운행하며 밀무역을 했던(engage in contraband trade) 그는 한국에서 체포된 이력이 있고, 일본 경찰에도 적발돼 강제 추방(forced deportation) 위기에 놓였다. 단속(crackdown)이 강화되자 결국 1962년 북송선을 타고 도피하는(flee aboard a repatriation ship to North Korea) 길을 선택했다. 본처(legal wife)와 자녀들은 거부하자 이맹인과 딸 고용희(高容姬) 등 그 식솔을 데리고 갔다.

 

고용희는 1952년 6월 오사카에서 태어나 북송선을 탔을 때 나이는 10세였다.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다 20세 때인 1972년 공훈 배우 칭호를 얻으면서 김정일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gain his attention and favor) 됐다. 이후 세 번째 부인이 돼 김정철·김정은·김여정을 낳았다(give birth to them).

 

김정은의 외할아버지가 재일 조선인 밀수업자였다는 사실은 ‘백두혈통’ 신화를 뒤엎는(overturn the ‘Baekdu bloodline’ myth) 가족사다. 북한은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anti-Japanese struggle)과 ‘백두혈통’의 우월성을 체제의 근간(foundation of its regime)으로 내세워 왔다. 재일 조선인은 북한 내에서도 차별받는 집단(discriminated group)이어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질 경우 반일 감정(anti-Japanese sentiment)을 기반으로 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일가의 권위와 체제 정통성에 치명타가 될(deal a fatal blow to the authority and legitimacy) 수 있다.

 

김정은은 북송 재일 교포였던 생모(biological mother) 고용희, 밀수업자였던 외할아버지 고경택으로 인한 열등감·불안감(sense of inferiority and anxiety)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자신의 생일조차 기념일(commemorative day)로 제정하지 않고 있다.

 

-윤희영 에디터, 조선일보(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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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을 함부로 쓰지 말라 

 

1948년 10월 여수 시가지에 진출한 국군. /게티이미지코리아

 

‘항쟁(抗爭)’은 ‘맞서 싸움’이란 뜻이지만 그냥 맞서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마 민주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할 때 ‘항쟁’은 비장한 정서를 물씬 풍긴다. 이 말은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폭력을 쓰며 싸우는 일’을 뜻한다. ‘항쟁’의 주체에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따라서 ‘항쟁’이라고 말할 때는 ‘누가 누구에게 항거해서 정당한 폭력을 행사했는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 사건을 ‘여순 항쟁’으로 바꿔 쓰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건’을 그저 높여 부르는 게 ‘항쟁’인가? 아니다. ‘항쟁’이란 말을 쓰는 순간 사건의 주체에겐 ‘부당한 거대 권력에 맞서 정당한 폭력을 쓴 의인(義人)’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9일 페이스북에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 2000여 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명령을 거부했을 뿐이었나? 평화적 시위라도 벌인 것인가?

 

그러지 않았다. 14연대 내 남로당 세력은 10월 19일 무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했다. 이어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를 죽이자”고 선동했고, 장교 21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인근 좌익 세력과 동조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1000여 명을 학살했다. 이 희생자들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었나? 어쩐지 사상이 다르면 동족 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은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분명 대한민국 초기 역사의 오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애초에 무장 폭동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의 행적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가? 전혀 별개 문제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것조차 미화되고 있다.

 

1948년 4월 3일과 10월 19일에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 세력은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4·3 폭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책동이었다. 4·3 진압을 거부하고 여수·순천 일대를 장악한 남로당 세력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 전복(顚覆)을 기도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더 나은 나라를 만들자고 시위를 벌인, 이후의 ‘민주 항쟁’과는 성격부터 달랐다.

 

이제 근본적 질문을 할 때가 됐다. 과거 ‘여순 반란’이라고 부른 ‘여순 사건’을 이제 ‘여순 항쟁’으로 바꾼다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가. ‘부당하게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뒤집어엎기 위해 정당하게 벌인 투쟁’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대한민국 체제를 ‘잘못된 나라’ ‘없애야 할 나라’라고 부정하는 일이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말이다.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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