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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마지막 황제'] .... ['고종의 길'은 실패한 길이다]

뚝섬 2025. 10. 16. 06:47

[청나라 '마지막 황제']

[21세기 '풍수단맥설']

['고종의 길'은 실패한 길이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홍콩 경매에 나온 청나라 최후의 황제 푸이가 착용했던 파텍필립 시계. /CNN

 

1967년 10월 16일 나는 자금성 옥좌 앞에 서 있다. 황제가 앉아서 천하를 내려다보던 그 자리를 올려다보며. 내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베이징에서 병고로 숨을 거둔다. 향년 61세. 기실 그가 청 황제였던 것은 고작 3년 남짓이었고, 26세부터 일제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에서 집정(執政)으로는 2년 정도, 황제로는 11년 170일을 지냈다. 물론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 ‘꼭두각시’는 그의 실존적 키워드다. 서태후의 지명으로 2살 무렵 졸지에 황제가 된 뒤로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제 운명의 꼭두각시로 살게 된다. 반면, 청나라에서든 만주국에서든 호사와 사치와 음행(淫行) 등은 실컷 누렸다. 푸이가 비극적 연민의 대상이 된 데에는 영화 ’마지막 황제(1988)' 탓이 크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으로 세상이 불타고 뒤집히던 그 시대 민중들의 고통과 죽음에 비하면, 그의 비극은, ‘어둡게 도금된 비극’에 불과하다.

 

2023년 5월 홍콩 필립스 아시아 옥션 하우스에서는 푸이가 만주국에서 착용했던 파텍 필립 시계가 수수료 포함 약 82억원에 낙찰됐다. 한데, 이런 푸이도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고종에 비하면 다분히 유아기적이다. 고종·순종은 조선 병합 조약문들에 의거해, 자신의 일족을 왕공족(王公族) ‘이왕가(李王家)’로 만든다.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보다 높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신분으로 가계(家系) 자체를 이식해버린 것이다.

 

이왕가는 일본 왕공족들이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세비를 받아 썼고, 자두꽃(李花)을 형상화한 문장(紋章)도 하사받았다. 고종의 7남 영친왕은 화려한 장기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는 대일본제국 군대의 중장(中將)에 오른다. 고종의 5남인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스포츠카 수집광이자 일본군 중좌였으며 차남 이우 역시 중좌였다. 일제 전범(戰犯) 이왕가의 작위와 특권은 1947년 일본 신헌법으로 왕공족과 화족 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유지됐다. 이왕가는 제 운명을 그런 식으로 개척(?)한 셈이다. 차라리 꼭두각시 푸이가 낫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선일보(2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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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풍수단맥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혈침(穴針)을 박았다는 '풍수침략설'이 한때 유행했다. 정기가 모인다는 '혈자리'에 쇠말뚝을 박아 땅의 맥을 끊으려 했다는 것이다. 풍수침략설은 한 일본 장군이 전범 판결로 처형 직전 남겼다는 유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조선 땅 전역에 쇠말뚝을 365개 박고 수탈한 보물을 숨겨뒀다'는 설이다.

▶한 민간단체는 1985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며 북한산 백운대에서 1m가량 쇠말뚝 20여개를 뽑아내고 그중 일부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쇠말뚝은 '등산로 보수용'이라는 설명도 있다. 1927년 11월 12일 자 한 신문은 "백운대 오르는 길에 쇠줄을 둘러놓아 아기네도 능히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1995년엔 정부가 쇠말뚝 제거에 나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쇠말뚝이 대거 뽑혔다. 

 

▶이 쇠말뚝들은 '토지측량용'일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쇠말뚝이 발견된 지점을 보면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삼각측량'을 위해 표시목으로 박은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1995년 10월 시사잡지엔 "측량을 위해 산 정상 등에 삼각점을 설치했다"는 당시 측량 기사의 증언이 나온다.

▶이번엔 서울시 보도자료에 풍수단맥설(風水斷脈說)이 등장했다. 서울시는 창덕궁~원남동 사거리를 잇는 율곡로 확장 공사를 9년 만에 끝내고 개통한 30일 자료를 내고 "율곡로는 일제가 민족혼 말살 정책에 따라 종묘~창경궁을 단절시키기 위해 만든 도로"라고 했다. 도로 하나가 '민족혼'을 말살했다는 것이다. 전임 시장이 추진하던 이 공사를 2013년 박원순 시장이 대폭 변경할 때도 서울시는 '민족혼 말살'을 내세웠다. 이 바람에 당초 계획보다 1.5m 깊은 곳에 도로를 내고 공법까지 바뀌었다. 공사비는 854억원으로 배가량 불어났고 완공 시점도 2015년에서 4년 늘어났다. 21세기에 풍수지리가 시민 세금 400억원을 집어삼켰다.

▶문화재청은 작년 서울 덕수궁 뒤편 미 대사관저와 선원전 터를 잇는 120m '고종(高宗)의 길'을 냈다.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 때 이용한 길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1952년에 누가 만든 것인지도 불분명한 지도를 근거로 고종의 길을 만들었다. 공사 끝난 지 1년 넘었지만 '있지도 않던 길'이라는 비판이 여전하다. 정부는 국민 세금을 가벼이 여기고, 서울시는 시민 세금에 들어 있는 땀을 보지 않는다.
 

 

-박은호 논설위원, 조선일보(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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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길'은 실패한 길이다 

 

러시아공사관行 피신 길에 감상적 글귀와 연민만 가득

리더는 '결과'에 책임지는 존재… '亡國 치욕' 곱씹는 현장 돼야 

 

요즘 며칠 '고종의 길'을 걸었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맞은편 철문이 지난달 말부터 오전 9시(월요일 제외)에 열린다. 옛 러시아 공사관(정동공원)에 이르는 약 120m 길이 나타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일본군 감시를 따돌리고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던 길의 일부를 복원했다.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만든 지도에 'King's road(왕의 길)'라 적혀 있어 근거로 삼았다 한다.

도심 산책로가 늘어난 점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이 길을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세워 일제에 저항한 상징처럼 여기는 것은 입맛이 개운치 않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아프게 직시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손쉽게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동공원에는 '고종이 길을 떠났다. 그 길 끝에서 대한제국이 새로 시작되었다' '근대를 향한 고종의 열정' 같은 감상적 글귀를 적은 사진 설명판을 전시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 정책을 적폐로 규정하지 않은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전전(前前) 정부 때인 2012년 3월 입안했고, 전(前) 정부 때인 2016년 10월 공사를 시작했다. 망국의 역사를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憐憫)은 전·현 정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이런 정서에 불을 질렀다. 드라마는 고종을 의병에게 밀지를 내리는 등 일제 침략에 항거한 군주로 그렸다. 고종과 대한제국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는 분이 많다.

평가할 부분이 없다는 게 아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자주독립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토지 조사를 하는 등 그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고종은 무력한 군주가 아니었으며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런 해석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하지만 역사를 직시하는 태도인지는 의문이다.

정치 지도자의 도덕은 필부(匹夫)의 도덕과는 다르다. 정치가는 결과에 대해 혹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의도가 좋았다 해서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고종이 선언한 대한제국은 8년 만에 일제 보호국이 되고, 13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고종은 왕가(王家)를 황가(皇家)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국가(國家)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망국 이후 삶은 치욕스럽다. 메이지 덴노(天皇)는 조서를 내려 고종을 '태왕(太王)'으로, 순종을 '왕(王)'으로 삼았다. 고종과 그의 직계 후손은 일제 밑에서 왕족(王族)이 되고, 방계 후손은 공족(公族)이 되었다. 조선의 왕·공족은 일본 황족(皇族)보다 아래지만 귀족인 화족(華族)보다 높은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고종은 일제가 준 지위를 거부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라졌는데 '이왕가(李王家)'는 살아남았다. '왕족' 고종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일제가 준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단죄받은 이들과 비교할 때 형평에 어긋난다.

당대 평가는 단호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왕족'을 옹립하지 않았다. 3·1운동은 고종의 인산(장례)에 맞춰 일어났음에도 임시정부는 민국(民國)을 택했다.

나라 빼앗긴 군주 이름을 내건 길이 세계 어디에 또 있는지 모르겠다. 기왕 국민 세금 들여 만든 길이라면 '연민'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망국의 원인을 되짚으며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감상적 추억이나 정신적 승리에 도취해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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