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결탁의 시대가 온다]
[1926년과 2026년]
[불안의 기원]
강대국 결탁의 시대가 온다
[이철희 칼럼]
트럼프가 시작한 ‘2025 패권다툼’ 승자는 중국
美 NSS엔 ‘노쇠한 제국’의 피로감-이기심 가득
열강 간 ‘각축 속 타협’은 더 큰 불확실성 불러
한반도에도 春來不似春 ‘수상한 계절’ 주의보
참으로 요란한 한 해였다. 물론 진원지는 미국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와 함께 전 세계는 불확실성의 혼돈에 내던져졌다. 트럼프는 교역의 규칙을 다시 쓰고 친구와 적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세계 질서의 보증자였던 미국이 난폭한 파괴자가 됐다. 그래서 트럼프는 과연 원하던 성과를 거뒀는가. 관세 수익으로 국고는 늘렸다지만 세계로부터 미국의 신뢰를 까먹은 것은 물론이고 연말에 받아든 국내 지지율 성적표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 최대 수혜자, 즉 결과적 승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21세기 패권을 위한 2025 라운드 대결에서 승리는 중국의 것이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의 145% 관세에 희토류 수출 통제로 대응한 결과였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드워드 루스는 ‘적이 실수하고 있을 땐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명언으로 중국의 승리를 설명했다. 시진핑은 저절로 굴러오는 전략적 선물을 조용히 챙기기만 했다는 얘기다.
외부의 압박을 버티는 데는 이골이 난 중국에 관세 폭탄이 먹히지 않을 터인 데다 함께 스크럼을 짜야 할 동맹과 우방까지 화나게 만든 상태에서 벌인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하긴 애초부터 무리였다. 어쨌든 그 결과 중국 제조업의 세계시장 지배력과 놀라운 첨단기술 추격 속도, 특히 독점적인 희토류 공급망의 무기화까지 ‘중국의 힘’을 선명하게 각인시켰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제 중국과의 빅딜에 매달리고 있다. 10월 말 부산에서의 미중 정상회담 이래 중국을 향한 타협의 손짓은 더욱 노골적이다. 특히 이달 초 한밤중에 슬그머니 백악관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선 트럼프 1기 때 ‘강대국 경쟁의 시대가 왔다’며 한판 붙어보자고 벼르던 것 같은 결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새 NSS는 마치 신생 정당의 정강정책처럼 파격적 레토릭이 가득하지만 그 어떤 일관성도 맥락도 찾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합성물 같다. 고립주의 마가(MAGA) 진영부터 전통적 패권론자, 중국 견제론자, 딜 메이커 그룹까지 다양한 이들의 손을 거쳤지만 제대로 걸러지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저마다 트럼프의 생각일 것이라며 내놓은 주장들을 얼기설기 엮은 ‘트럼프 세계관 탐구 보고서’ 수준이다.
그렇게 나온 NSS 곳곳에선 은퇴를 앞둔 노쇠한 챔피언의 심리상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적지 않다. 자국 이익 외엔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제국의 피로감 속에 확장과 전진보다는 축소와 후퇴의 기류가 역력하다. 건국 초기의 비(非)개입주의 전통을 상기시키면서도 뒷마당 중남미에 대해선 완벽한 장악을 추구하고, 유럽에는 ‘문명 소멸’을 전망하며 대놓고 극우세력에 대한 지원을 천명한다.
나아가 세계에 대한 지배가 아닌 세력균형을 추구할 것이며 “더 크고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의 특별한 영향력은 국제 관계의 변치 않는 진실이다”라고 천명한 대목은 ‘다극화 질서’나 ‘세력권 분할’ 같은 세계질서의 근본적 전환, 나아가 19세기 유럽의 강대국 협조체제 같은 ‘강대국 간 결탁’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하다.
대중국 정책과 관련해선 트럼프가 모종의 빅딜을 위해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 대신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할 수 있다던 백악관 안팎의 우려는 일단 불식시켰다. 다만 NSS 보고서는 대만해협의 일방적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던 바이든 시절의 언명에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물러섰다. 나아가 미국은 최근 고조된 중-일 갈등에 거리를 두고 있고, 며칠 전 공개된 ‘2025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서도 적대적 톤을 누그러뜨렸다. 이 모든 게 내년 4월 중국 방문을 앞둔 트럼프에게 딜의 공간을 열어두기 위한 유화 제스처일 것이다.
트럼프 2기 출범 이래 강대국 간 대결 기류가 느슨해지면서 한때 유행하던 ‘디커플링’ ‘신봉쇄정책’ 같은 대결의 언어는 어느덧 사그라진 듯하다. 내년에도 미-러 간, 미중 간 타협의 분위기는 이어질 것이다. 그게 잠깐의 해빙일지, 결탁의 본격화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그 사이에 낀 나라들로선 자신의 운명이 스트롱맨 간 거래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더 큰 불확실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연초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도 중요한 변화의 모색이 이뤄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일본 방문, 북한의 9차 노동당대회 개최가 예정돼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수상한 계절, 어느 때보다 유연한 대응 능력과 균형 감각이 절실한 때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자강력 확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동아일보(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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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과 2026년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한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되지 않는 진실이다. 21세기에 들어선 뒤 20세기의 행적이 되풀이되는 듯한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다행히 1차 세계대전 같은 재앙은 피했지만, 2차 세계대전 전에 벌어졌던 여러 상황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해져 가고 있다.
문득 1926년에 벌어졌던 세계적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독일에선 1923년 ‘뮌헨 폭동’의 실패에서 재기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출간하며 정치적 위상을 급속히 높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는 권력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1924년에 집권한 소련의 스탈린은 당을 장악했고, 본격적인 소련 체제 건설과 대숙청 준비에 착수했다. 영국에서는 노동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행복했다. 전에 없던 독보적인 경제성장을 누렸으며 주식시장은 폭발했다. 행복에 겨운 한 해였지만, 경제학자들은 1929년 대공황의 단서가 이때 시작됐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장제스가 북벌을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마지막 국왕 순종이 사망했다.
20세기의 기준에서 보면 1926년은 평온한 해였다. 하지만 20세기를 뒤흔든 대사건들이 준비되고 있던 해이기도 했다. 세계는 분열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중간계층 사람들은 제각기 힘을 모으며 공존보다는 이기를 택하던 시기였다. 그 이기심을 기반으로 국가권력은 강화되고, 독재가 준비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타협책을 찾기보다는 열망하거나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상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중산층의 낙원이었으며, 3년 후의 재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우리는 한 해를 희망으로 시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희망이 망상이 돼서도 안 된다. 진실을 마주 보는 용기와 현명한 판단이 진정한 희망을 만들고 결실을 낳는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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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우크라이나戰 종전 협상 95%까지 왔다”. 하지만 모든 난제가 그렇듯이 악마는 마지막 핵심 5%에.
-팔면봉, 조선일보(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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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기원
노력한 만큼 뭐든지 될 수 있는 시대 '무엇도 되지 못한다'는 불안감도 있죠

옛날 하층민의 삶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태어난 지역에 살면서 누군가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하면 됐지요. 귀족들도 인생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는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고귀한 신분 자체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산업이 발달한 근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과거보다 자유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태어날 때의 신분대로 평생 사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중산층도 늘어났어요. 중산층은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따라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전보다 못한 처지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은 산업화 이후 시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러요. 삶과 일상이 고체처럼 정해진 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유연하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자유가 늘어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행복해졌을까요? 굶어 죽을 위험, 누군가에게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위협이 거의 없어졌어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뭐든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뒤에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으니까요. 발전 속도는 나날이 빨라지고 경쟁도 치열해져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이렇게 생기는 불안을 바우만은 ‘액체 불안’이라고 부르는데요. 액체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식인종은 적을 먹어 버렸습니다. 위험을 아예 뱃속에 넣어 없애버린 거죠. 그러나 아무리 많이 잡아먹어도 적은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예요. 먹거리 안전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 사람들은 식품 성분을 더욱 꼼꼼하게 신경 씁니다. 산업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이를 막는 지침을 더욱 촘촘하게 짜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위험을 완전히 막진 못해요.
세상은 일어날 만한 나쁜 일을 ‘리스크(위험) 관리’로 다스리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 정보 사회에선 작은 문제 하나가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해요. 해킹, 교통 참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예측하기도 어렵고 일반인이 대비할 방법도 별로 없어요.
바우만은 정치가들이 불안을 이용해 권력을 움켜쥔다고 경고합니다. 불법 이민자, 테러리스트, 시장을 장악한 외국 기업 등 때문에 우리나라 사회가 망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누구 탓’으로 돌리는 식이지요. 그 결과 독재, 전쟁으로 이어질 때도 있어요. 바우만의 예상은 지금 세계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듯합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정치 공간이 다시 열려야 한다”고 힘줘 말합니다. 막연한 두려움에 휘둘리지 말고, 모두가 자유롭고 안전한 세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시민들이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두려움에 정정당당하게 맞서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우리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조선일보(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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