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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꺼져 버린 文 평가, 탄핵 기저 효과는.. ] .. [벽란도(碧瀾渡)] ....

뚝섬 2026. 1. 8. 09:54

[푹 꺼져 버린 文 평가, 탄핵 기저 효과는 거품이었다]

[농담이라고 해도 가볍고 부적절한 대통령 언급]

[방일 앞둔 李 보란 듯 對日 수출 통제… 中 의존 공급망 손봐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벽란도(碧瀾渡)]

[韓∙中의 '求同存異']

 

 

 

푹 꺼져 버린 文 평가, 탄핵 기저 효과는 거품이었다

 

[김창균 칼럼]

취임초 지지 78% 역대 2위
중간평가 총선 180석 압승
탄핵된 전임자 비교된 덕
최근 조사선 뒷 순위 밀려
李도 '탄핵 2' 福 누리는 중
제 몫 업적 따질 날 올 것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일 오후 경남 양산 하북면 평산마을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문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공

 

“우리도 마침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대통령을 갖게 됐네요.” “이런 지도자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꿈만 같지 않나요.” 문재인 정권 초반, 인터넷 공간을 뒤적이다 마주친 대통령 찬사다. 어느 맘카페에 올라온 대화인데 그 ‘추앙’의 강도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고전 교과서에 실렸던 “해동 육룡이 나르샤…” 용비어천가와 어깨를 겨룰 수준이다.

 

당시 문 대통령 지지율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취임 100일 조사에서 78%였다.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척결 등 깜짝 개혁 쇼로 83% 기록을 보유한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역대 2위다. 임기 중반 선거는 정권 심판 성격으로 치러진다. 어느 나라에서나 집권당이 고전하게 마련이고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문 정권 임기 만 3년을 거의 채운 2020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300석 중 과반을 훌쩍 넘는 180석을 차지했다. 유례를 찾기 힘든 압승이었다. 반환점을 돈 문재인 정권에 국민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준 셈이다.

 

문 정권은 정말 잘하고 있었을까. 당시 조국 사태에 항의하는 광화문 시위대는 “문재인이 해놓은 업적이 있으면 하나라도 말해 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실제 문 대통령이 힘주어 추진한 정책들은 한결같이 국가에 대한 부담으로 남았다.

 

문 대통령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68명이 사망했다”는 허위 사실 공표와 함께 시동을 건 탈(脫)원전 정책은 전기료 폭등을 불렀고, 이재명 정권의 ‘인공지능 3대 강국 추진’에 최대 장애물로 남았다. 임기 동안 두 달에 한 번꼴로 발표한 부동산 정책은 근로자가 월급을 모두 저축해 집을 살 수 있는 기간을 7년이나 연장시켰다. “한반도 운전대를 잡았다”더니 트럼프에게 따돌림받고, 시진핑에게 혼밥 괄시당하고, 김정은 남매에게 “삶은 소대가리” “얼빠진 중재자” 막말 듣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도 과분한 지지를 받고 물러났으니 세상은 공평하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때는 때대로 간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순리에 따라 결국은 제자리를 찾아가기 마련인 모양이다. 지난 연말 한국갤럽의 전직 대통령 조사에서 문 전 대통령은 ‘잘한 일이 많다’는 응답이 33%로 ‘잘못한 일이 많다’ 44%에 못 미쳤다. 임기를 불행하게 마친 박정희 62%, 김영삼 42%, 이명박 35%에 뒤처졌다. ‘MB 아바타’ ‘MB 적폐’ 등으로 비하하면서 정치적으로 앙갚음했던 이 전 대통령에게조차 밀린 것이 눈에 띈다. 다른 전직들은 재평가를 거치며 지지율이 역주행한 반면 문 전 대통령 평가는 푹 꺼져 버렸다. 이유가 뭘까.

 

문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이어 취임했다. 그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전임자와 대비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참모들과 함께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청와대 경내를 거닐며 대화하는 모습은 구중심처에 몸을 숨겼던 전임자의 불통을 떠올리게 했고, 5·18 기념식에서 유족을 불러 세워 안아주는 장면은 세월호 유족과 불화했던 전임자 모습과 오버랩됐다. 장관보다 힘이 셌던 ‘왕 행정관’의 이벤트 연출 기법이 덧씌워지면서 이미지 정치는 상한가를 쳤다.

 

문 전 대통령은 야당 잘 만난 복도 원 없이 누렸다. 전임자 직무 정지 기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야당 대표는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2020년 총선은 정권에 보낸 박수 갈채가 아니라 ‘탄핵과 절연 못한 야당 심판’이었다. 이런 탄핵 기저 효과가 소멸되자 문 전 대통령 평가가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을 거저 주운 행운을 즐기고 있다. 전임자의 상식 밖 행태가 워낙 도드라졌던 터라 이 대통령의 평범한 행동거지도 미담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갑질 행태로 비판받을 수 있었던 생방송 업무 보고가 소통 리더십으로 추켜 올려지는가 하면, 정략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한 대야(對野) 제스처도 화합 행보로 소개된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전망도 ‘화창하게 맑음’이다. 윤 어게인 세력과 퇴행성 연대를 이어가는 장동혁 체제를 마주한 대진표 덕이다. 그러나 이 ‘윤석열 대비 효과’도 어느 순간엔 거품으로 꺼지게 마련이다. 그때부터 이 대통령 자신 몫의 공과에 따라 성적표가 다시 매겨진다. 임기 동안 봉인해 뒀던 사법 리스크 상자가 다시 열리게 될지도 그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김창균 논설주간,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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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라고 해도 가볍고 부적절한 대통령 언급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7일 상하이 한 호텔에서 열린 순방 기자단 오찬 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7일 기자 간담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는 발언에 대해 “공자 말씀으로 들었다”며 “착하게 잘살자는 의미로 이해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정말 이렇게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답하기 곤란해 농담으로 넘기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담이라고 해도 경솔하고 부적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점은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 압송하고, 중국이 대만을 포위 훈련하고, 중국과 일본이 격하게 충돌하는 시기다. 세계가 다시 미국 대 중·러의 대결 구도로 갈라지고 강대국들이 힘으로 이익을 관철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런 격변의 한가운데에 한반도와 한국이 있다. 시진핑도 이를 알고 있고 한국 대통령에게 ‘줄을 똑바로 서라’고 압박한 것이다. 시진핑은 이 대통령을 초청해 놓고 일본에 희토류 공격을 가했다. 한·일을 갈라치기 하는 것이다. 많은 우리 국민도 이런 국제 정세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의 ‘착하게 살자’ 농담이 어떻게 들리겠나.

 

이 대통령의 이해 못 할 언급은 또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오랜 시간 북한에 대해 군사적 공격 행위를 했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평양 무인기 침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인기 침투는 북한이 먼저 한 것이다. 북한의 군사적 공격은 청와대 습격,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셀 수도 없다. 무수한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이 “북한이 엄청 불안했을 것”이라고 한다. 불안한 것은 핵폭탄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 국민이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오랜 시간 북한에 대해 군사적 공격 행위를 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 밝혀주기 바란다.

 

시진핑은 ‘한한령 해제’에 답을 주지 않았다. ‘남북 관계를 중재해 달라’는 요청에도 사실상 답을 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서해 불법 구조물 관련, “양식장 관리 시설은 (중국이) ‘철수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일부 진전이다. 하지만 중국은 서해를 인구 비례로 나누자고 하는 나라다. 베트남처럼 중국이 하는 행위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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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 앞둔 李 보란 듯 對日 수출 통제… 中 의존 공급망 손봐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해 12월 31일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25.10.31 AP 뉴시스

 

중국 정부가 일본 군사력 증강에 도움이 되는 이중용도(민간과 군 겸용) 물자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는 고강도 수출 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중국 정부가 희토류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관련 수출 허가 심사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중국 관영매체의 보도도 나왔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을 문제 삼아 희토류 등 핵심 자원을 무기로 대일본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이다.

중국은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희토류는 전투기, 전기차 모터,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다. 중국이 2025년 미국과의 무역 갈등 국면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를 꺼내 반도체 수출 규제 완화를 이끌어냈던 것처럼 중국산 희토류 의존도가 70%가 넘는 일본 산업계의 가장 아픈 급소를 노린 것이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가 석 달간 지속되면 일본에서 6600억 엔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산업계를 흔들어 다카이치 총리에 대한 비난 여론을 고조시키려는 고강도 압박 전술이다.

중국은 대만 문제와 같이 자국의 핵심 이익이 걸리면 노골적인 표적 제재로 응수하고 있다. 중국은 제3국을 통한 우회 대일 수출도 제재하는 사실상의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 방침도 밝혔다. 중국산 희토류 등을 수입해 일본 기업에 수출하면 한국 등 제3국 기업도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일본 방문을 앞둔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 기간에 보란 듯이 대일본 제재를 감행했다. 중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면 한국 역시 보복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이 90% 이상 특정국 수입에 의존하는 ‘절대의존 품목’ 가운데 절반 이상이 중국산이다. 중국은 텅스텐에 이어 은까지 전략물자로 분류하고 수출 통제 대상으로 확대했다.

경제와 안보, 통상과 국익이 연계되는 지경학 시대에 특정 국가에 대한 공급망 의존은 위험을 키운다. 한국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2019년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제조에 필수적인 3개 화학물질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를 당했다. 2021년 중국이 자국 내 공급 부족을 이유로 대며 갑자기 요소 수출을 통제해 ‘요소수 대란’도 겪었다.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 공급처를 호주 캐나다 베트남 등으로 다변화하고 비축 물량을 확대해 공급망 위험을 분산시켜야 한다. 폐기된 희토류를 다시 쓰는 재자원화 기술도 확보해야 한다. 아무나 자원 전쟁의 총구를 함부로 틀지 못하도록 핵심 공급망의 약한 고리부터 보수해야 한다.

 

-동아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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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차이나타운 곳곳에 불법 도박판 성행. 中 본토에 한한령 내린 사이 마동석도 못 막는 치외법권 구축?

 

-팔면봉,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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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1976년 1월 8일 나는 중국 베이징시 인민해방군 제305의원 앞에 서 있다. 마오쩌둥과 중국 대륙의 공산화 혁명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26년간 총리직 등을 수행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오늘 저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정통 유학(儒學) 교육을 받았고 일본, 프랑스에서 엘리트 청년 공산주의자로 성장한다. 프랑스로 건너가 공산주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베트남의 호찌민과는 이것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은데, 투쟁과 나란히 놓인 겸손한 품위와 청렴성, 신뢰와 실리를 겸비한 일 처리 등이 그러하다. 다만 두 사람의 분명한 차이점은 호찌민은 자타공인 1인자였고, 저우언라이는 실무형 2인자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2인자라는 정치적 위치는 그의 ‘실존적 정체성’을 포괄한다.

 

저우언라이는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해서 미국이 가장 좋아한 중국 공산주의자였고, 문화 대혁명의 광풍 속에서도 문화재 등 은근히 많은 것을 보호했다. 덩샤오핑을 보호해 주었던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덩샤오핑은 통곡했다고 한다. 중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산당 지도자이자 적이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악평 또한 엄연하다. 결국은 마오쩌둥의 하수인으로 복무하며 비극을 유지시킨 보신주의자(保身主義者)라는 게 그 기조다. 조심스럽게 산 자는 그 조심스러움이 그림자가 되는 게 인생이다. 달라이 라마가 마오쩌둥보다 저우언라이를 더 싫어해 음흉한 속물 정도로 평했다는 것도 재밌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절대 거스르지 않으며 2인자의 생존 수칙을 엄수했다. 그가 저항했다면 중공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을까? 그러나 내 관심은 왜 마오쩌둥 같은 악마적 인간은 최고 지도자가 되고 저우언라이 같은 합리주의자는 2인자인가?’에 더 머문다. 역사 속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패턴(pattern)이기 때문이다. 왜 대중은 판단하기보다 숭배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인간은 변혁을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변혁을 바란다고 착각하면서 혼돈에 매혹당하는 것일까?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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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碧瀾渡)

 

송나라부터 이슬람까지… 세계인 오가던 고려 무역항

 

중국을 국빈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베이징의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해 “오늘날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지점이 벽란도 정신”이라고 말했어요. 이 대통령은 “고려와 송나라가 외교적 긴장과 갈등이 있었던 시기에도 벽란도를 통한 교역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한중 관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교류와 교역을 중단해선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됐어요. 그런데 ‘벽란도’가 도대체 뭘까요? 

조선 후기 제작된 ‘해동지도’의 일부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은 왼쪽부터 벽란도, 송도(松都·개성), 경도(京都·한양)입니다. /국가유산청

 

섬이 아니라 항구 이름

 

벽란도(碧瀾渡)는 섬 이름이 아닙니다. 도(渡)’ 자에는 ‘(물을) 건너다’와 ‘나루터’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선 후자의 의미입니다. 고려 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던 나루터였는데,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바다로 통하는 입구 같은 지점이라 국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던 곳이에요.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해 여러 배가 오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를 방문하는 외교 사절단 역시 배를 타고 벽란도에 내렸죠. 육로로 개경에 오더라도 이 근처를 지나갔다고 해요.

 

지금은 휴전선 북쪽 개성시 개풍구역 신서리와 황해남도 배천군 문산리에 해당합니다. 사실 서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죠. 벽란도는 고려 건국 때부터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이 개경을 근거지로 삼아 벽란도를 통해 해상 무역을 하던 호족이었습니다.

 

벽란도의 ‘벽란’은 ‘푸른 물결’이란 뜻인데요. 이 근처 언덕에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외국 사신이 묵고 갔다고 합니다. 벽란도는 처음에는 ‘예성항’이었는데, 이후 벽란정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바뀐 거라고 하네요. 

 

서긍이 쓴 ‘고려도경’ 표지. 벽란도에 도착한 사신들을 구경하려고 만 명쯤 되는 사람이 모였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를 방문한 중국 송(宋)나라 사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려도경’을 쓴 서긍이에요. 1123년(인종 1년) 고려에 왔던 서긍은 뱃길로 벽란도에 도착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고려 군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그들을 맞이했다고 해요. 사신들이 쉬려고 벽란정으로 안내받는 동안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 명쯤 될 정도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사신들은 다음 날 육로로 개경의 서대문인 선의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동남아·인도·아라비아 상인도 찾아와

 

왜 중국에서 육로로 오지 않고 바닷길을 통해 벽란도로 와야 했을까요? 중국의 한족(漢族) 왕조인 송나라는 당(唐)나라 다음의 오대십국을 이은 통일 왕조였어요. 송나라는 문치(文治)가 발달한 반면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거란족과 여진족 같은 북방 민족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중국 북쪽 지역에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송나라는 고려와 국경을 접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바다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개성 인근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입니다. ‘고려국조(高麗國造)’라고 새겨져 있어요. 외국으로 수출하려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벽란도에서 고려와 무역 활동을 한 나라가 송나라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이고, 교지국(베트남), 섬라곡국(태국), 마팔국(인도 남부의 이슬람 왕국) 상인들도 벽란도를 찾아 교역을 했어요. 서긍의 기록에서 보듯 이곳엔 ‘만 명’이라 표현될 만큼 수많은 사람이 오갔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라비아 반도와 지금의 이란·이라크·북아프리카가 영역이었던 대식국(아바스 왕조)의 상인들도 벽란도에 왔죠.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도 이들을 통해 고려라는 나라 이름이 외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조선 초인 1418년 세종대왕의 즉위식에 ‘회회(回回·아라비아) 노인’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고려 말 벽란도를 통해 입국했을 것입니다.

 

바닷길 막히면서 점차 쇠퇴

 

그러나 이렇게 번성했던 벽란도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 점차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로 남게 됐죠. 왜 그랬을까요? 우선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바뀌었으니 개경 근처인 벽란도에선 무역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벽란도를 통해 고려와 교역한 나라들을 표시한 지도예요. /그래픽=이진영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국제적인 해상 무역 자체가 쇠퇴했던 것입니다. 우선 중국을 더 이상 바닷길로 갈 필요가 없었어요. 몽골족의 원(元)나라를 밀어내고 새롭게 일어난 한족의 명(明)나라는 송나라와는 달리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됐죠. 더구나 1421년(세종 3년) 명나라의 영락제는 수도를 난징(남경)에서 조선과 가까운 베이징(북경)으로 옮겼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양국 사신이 육로로 왕래했습니다.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닷길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당시 사신들은 대부분 기뻐했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습니다. 주민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일을 금지한 것이죠. 해양 세력을 억제하고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민간의 사(私)무역도 막혔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조선 역시 초기부터 해금 정책을 펼쳤고, 울릉도 등 먼 섬의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까지 실행했습니다.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 다른 여러 나라와의 무역은 크게 쇠락했죠. 고려와 비교해 볼 때,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쇄국 정책을 벌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진정한 ‘벽란도 정신’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중국과 관계를 호전시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를 위해 ‘벽란도 정신’을 주목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벽란도가 쇠퇴한 이유는 중국과 관계가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교와 국제 무역에서 중국과의 관계만 강화된 반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약화돼 버린 결과였습니다. 중국 이외의 다양한 여러 국가들과도 늘 원활하고 활발한 관계를 유지해야 진정한 ‘벽란도 정신’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나치게 가깝고, 지나치게 큰 나라’인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대상입니다. ‘셰셰(감사합니다)’만 외칠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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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의 '求同存異'

 

공통점은 추구하고 차이점은 남겨두다..

 

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49년부터 1958년까지 외교부장을 겸직했다. 혁명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를 중국 외교의 상징으로 만든 건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둥 회의)'였다. 당시 29개 참가국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 시달렸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정치 체제 등에서 차이가 컸기 때문에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구동존이(求同存異·공통점은 추구하고 차이점은 남겨두다)'라는 말을 던졌다. 이 한마디로 반둥 회의는 급진전하며 비동맹, 내정 불간섭, 상호 불가침 등의 내용이 담긴 '평화 10원칙'을 도출해냈다.

'구동존이'는 저우언라이 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외교적 난제를 만날 때마다 가장 즐겨 쓰는 용어가 됐다.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과 수교하면서 대만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도, 1992년 한국과 수교를 앞두고 북한이 걸림돌이 됐을 때도 '구동존이'를 앞세웠다. 2011년 초 백악관을 방문한 후진타오 당시 주석은 "구동존이 정신으로 등고망원(登高望遠·높은데서 멀리 바라봄)하자"고 했다. 60년 전 저우언라이가 설명한 '구동존이'는 이렇다. "큰 공통점에도 작은 차이점이 있고, 큰 차이점에도 작은 공통점이 있다. 문제나 갈등에만 집착한다면 서로 공동의 이익을 놓친다"는 것이다.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를 놓고 한·중 관계가 '역대 최고'에서 '역대 최악'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난 5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항저우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예상대로 박 대통령은 사드 당위성을, 시 주석은 사드 반대를 강조했다. 양국 간의 '접점'은 보이지 않았다. 시 주석은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한다)'이라는 성어까지 쓰며 중국이 한국 독립을 지원했던 역사를 거론했다. 한국이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중국의 옛 도움을 잊는 행동이라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나의 넓지 않은 어깨에 5000만 국민의 안위가 달렸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사드 때문에 한·중 관계가 뒤틀리면 서로 손해라는 것은 중국도, 한국도 잘 안다. 중국이 끝까지 '사드 몽니'를 부리면 중국의 '펑유(朋友·친구)'는 점점 더 미국 쪽으로 다가갈 것이다. 중국이 이를 견제하려고 북한을 끌어안으면 '핵 도미노'가 한국·일본을 넘어 대만까지 닿을 수 있다. 우리도 중국을 멀리해선 통일 시대를 준비하기 어렵다.

이번에 두 정상이 한목소리로 '구동존이'를 언급한 것은 사드가 한·중 관계를 망쳐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깔렸기 때문일 것으로 기대한다. 시 주석은 부주석 시절인 2009년 방한했을 때도 '구동존이'를 강조했다. 지난 5일 박 대통령은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求同化異·같은점을 찾고 다른 점은 없앰)'를 말했다. 이제는 한·중 모두 이 말을 실천할 때가 됐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맨 뒤로 돌리는 것이 답일 때가 있다

 

-안용현, 조선일보(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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