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英·佛의 북미 패권투쟁]

뚝섬 2026. 1. 29. 10:23

신대륙 놓고 피흘린 영국과 프랑스... 결국 리더들의 역량 대결이었다 

 

②英·佛의 북미 패권투쟁

 

명재상 리슐리외·콜베르 앞세운 프랑스가 식민지 개척 앞섰지만
피트 수상의 리더십 빛난 영국이 마침내 프랑스 누르고 북미 차지

 

미국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의 영토는 약 11배 확대됐고 인구는 135배 폭증했다. 세계 제1 경제력을 갖춘 건 100년 전이다.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세운 식민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기적을 이뤘을까? 미국과 세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선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 주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가 1770년 그린 ‘울프 장군의 죽음.’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1759년 지금의 캐나다 퀘벡에 있는 아브라함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지만 영국군을 이끈 제임스 울프 장군은 총상을 입고 숨진 장면을 묘사했다./캐나다 국립미술관

 

21세기 초강대국 미국의 모태는 영국이다. 미국의 역사는 250년 전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며 시작됐다. 두 나라는 오늘날까지 영어라는 공통의 언어와 주권재민(主權在民), 대의제, 법의 통치,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다. 영국이 미국의 모태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아는 상식보다 더 치열하고 극적이다. 북아메리카라는 광활한 신대륙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피를 흘리며 투쟁한 결과, 비로소 지금의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강국이던 프랑스는 왜 신대륙에서 자취를 감췄을까? 영국이 북미의 패권을 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식민지의 거침없는 확장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선도 국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지중해 문명권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는 대서양 진출에 유리했다. 그들은 아시아와 신대륙에서의 교역과 식민지 건설을 선점하며 독점적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황금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와 스웨덴까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기회에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선두에 영국과 프랑스가 있었다.

 

두 나라는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중남미 대신, 무주공산(無主空山)인 북아메리카 대륙을 공략했다. 영국은 오늘날 미국 동해안 최북단 메인 주에서 남부의 조지아 주에 이르는 지역에 터를 잡았다. 반면 프랑스는 오늘날 캐나다 퀘벡을 거점으로 대륙의 안쪽으로 진출했다.

 

프랑스가 신대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건 프랑수아 1세(재위 1515~47) 때부터다. 당시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 카를 5세(재위1516~56)와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바다와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이 압도적이었기에, 프랑수아 1세는 북미 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탈리아 출신 베라차노와 프랑스 브르타뉴의 자크 카르티에(1491~1557)의 항해가 대표적이다. 카르티에는 1534년부터 154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오늘날 캐나다에 이르는 지역을 탐험했다. 그러나 종교전쟁 등 프랑스 내부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신대륙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프랑스가 다시 신대륙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건 앙리 4세(재위 1589~1610)가 종교전쟁을 끝낸 직후였다.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사뮈엘 드 샹플랭(1567~1635). 그는 노바스코샤에 캐나다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인 ‘포트로열’을 건설했고(1605년), 이곳을 기점으로 세인트로런스강 안쪽으로 진출해 퀘벡을 건설했다(1608년). 이어서 오늘날의 몬트리올에 모피 교역소를 설치하며(1611년) 프랑스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는 소규모 인원으로 식민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언어·생활 습관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프랑스인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북미 대륙에 정착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루이 14세, 프랑스 식민지 전성기

 

추기경 리슐리외(재상 재임 1624~42)가 권력을 잡으면서 프랑스의 북미 진출은 한 단계 도약했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리슐리외는 신대륙에 거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국왕과 자신, 그리고 프랑스의 주요 인물들이 주주로 참여하는 ‘뉴프랑스’ 회사를 설립하며(1627년), 식민지 개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국가 사업으로 격상시켰다.

 

프랑스 식민 제국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와 재상 콜베르(1661~83)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탁월한 총독 프롱트낙(1622~98)은 캐나다의 수로를 장악하며 오대호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고, 과감한 탐험가 라 살(1643~87)은 오대호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가는 대장정을 펼쳤다. 라 살은 탐험한 모든 지역을 루이 14세에게 바치며 ‘루이의 땅’을 뜻하는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명명했다.

 

이들은 언젠가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를 통합해 북미에 거대한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공유했다. 이 꿈이 실현됐다면 프랑스 식민지는 좁은 동해안 해안가에 몰려 있던 영국 식민지를 포위하며 숨통을 조였을 것이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오늘날 미국인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웅혼한 꿈은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더 이상 탁월한 리더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미의 패권을 움켜쥔 영국

 

반면, 위대한 리더는 영국에서 나타났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과 미래의 세계 제국을 놓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7년 전쟁(1756~63)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기를 거치며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프랑스에 영국이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섬나라의 특성상 제해권과 교역에 전념할 수 있었던 영국이 바다에서의 우위를 토대로 유럽에서 누구도 패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을 추구하자 프랑스는 수세에 몰렸다. 루이15세를 필두로 한 프랑스 궁정의 총체적인 무능과 부패도 한몫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충돌로 7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와 북미대륙에 진출해 있었기에, 두 나라의 다툼은 필연적으로 세계로 확장됐다. 북미에서의 전쟁은 인디언 부족 대부분이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에 맞섰기에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영국인에게는 패배와 절망이 가득했다.

 

전황을 뒤바꾼 인물이 윌리엄 피트(1708~1778)였다. ‘위대한 평민’ 대(大)피트로 불리는 그는 영국의 사활적 이익이 더 이상 유럽대륙이 아니라 제해권·교역·식민지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식민지 전쟁, 특히 북미 전선에 영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의 목표는 선명했고, 결단은 신속했으며, 의지는 강철 같았다. 그의 리더십 아래 영국은 일치단결해 승리에 대한 열망을 드높였다. 1759년 영국은 뉴프랑스의 전략적 요충지 퀘벡을 점령하고, 카리브해와 프랑스 서해 비스케이만에서 승리했다. 결국 프랑스는 무릎을 꿇었다(1763년 파리조약). 용감하고 탁월했던 프랑스 리더들의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오직 영국만이 북미대륙에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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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 ‘천년의 숙적, 지금은 둘도 없는 동맹 

 

지난 6일 파리에서 만나 반가워하고 있는 키어 스타머(왼쪽)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로이터 연합뉴스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의 라이벌이다. 지난 1000년간 4차례에 걸쳐 ‘백년전쟁’이라 불릴 만한 장기적인 전쟁을 벌였다. 1차는 1128년부터 1226년까지의 영국 플랜태지넛 왕조와 프랑스 카페 왕조와의 전쟁. 프랑스 내의 영국 왕의 영토를 두고 싸웠다. 흔히 ‘백년전쟁’이라 일컫는, 잔다르크가 출현하는 전쟁은 2차에 속한다(1337~1453년). 두 나라의 목표는 프랑스 왕좌였다.

 

역사적으로 제일 중요한 장기전은 3차 백년전쟁(1689~1815년)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시작돼 나폴레옹 전쟁으로 막을 내린 이 전쟁의 트로피는 세계제국이었고, 승자는 영국이었다. 마지막 백년전쟁은 그 이후에 펼쳐진 두 나라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3차전의 승자인 영국이 노른자위를 차지했고, 패자인 프랑스가 그 주변부에 진출했다.

 

천년의 숙적이던 영국·프랑스가 손을 잡은 건 독일이 부상하고 두 나라 기득권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우정은 불과 100년 남짓이다. 이들의 역사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다’라는 국제정치의 대명제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송동훈 문명 탐험가, 조선일보(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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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통령, 후드티 뒤집어쓰고 中 에너지 사업가와 비밀 회동. 보통 얼굴 가릴때는 뭔가 떳떳지 않다는 얘기.

 

-팔면봉, 조선일보(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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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전 척박한 땅에서 키운 개척 DNA… '수퍼파워' 미국 일궜다

 

영국 식민지 13개 건설되다

종교 박해 피해 英 떠난 청교도들
"신성한 '언덕 위의 도시' 짓겠다"
버지니아부터 조지아까지 확장돼
담배 재배 성공 후 노예 노동 시작

 

존 윈스롭(1588~1649)이 이끄는 이민자들이 현재의 매사추세츠 세일럼(Salem)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건 1630년 6월 중순이었다. 기함 아라벨라(Arabella)호를 비롯한 배 11척에 나눠 탄 1000명 가까운 이민자들은 그해 4월 초 영국을 떠나 광활하고 사나운 대서양을 2개월 넘게 항해한 끝에 새로운 세계에 닿았다. 그들 모두 청교도 신자였다. 이 행렬의 지도자는 변호사 출신의 도덕적이고 신앙심 깊은 존 윈스롭. 그는 매사추세츠 베이 컴퍼니(Massachusetts Bay Company)에서 대규모 이민 그룹의 책임자로 선택됐다. 

필그림 홀 박물관 화가 제니 오거스타 브라운스컴이 1914년에 그린 ‘플리머스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절’. 1621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열린 첫 번째 추수감사절 장면을 묘사했다.

 

신대륙 향한 청교도 이민 행렬

 

당시 영국 상황은 정치·종교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 1세(재위 1625~1649년)는 아버지보다 더 엄격하게 청교도를 박해했다. 일군의 청교도 상인들은 신앙을 지키며 신대륙에 보금자리를 개척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베이 컴퍼니를 조직했고, 왕으로부터 뉴잉글랜드의 방대한 땅과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특허장을 사들였다. 국왕은 늘 돈이 필요한 법이고,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종교가 다른 시민들이 차라리 신대륙으로 떠나는 편이 국내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윈스롭은 항해 도중 이민자들에게 “부패한 구세계가 보고 배울 만한 신성한 사회, 즉 예수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전한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신대륙에 짓겠다”는 야심 찬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는 신의 도시가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청교도들은 보스턴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곳곳에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을 디딘 뉴잉글랜드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다. 춥고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주어진 고난을 신이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성실하고 검소하며 경건하게 역경을 이겨냈고, 그 속에서 일궈낸 물질적 성공은 신의 은총이라 여기며 명예롭게 생각했다. 매사추세츠는 그렇게 번영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강인해져 갔다.

 

갈등 속에 확장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청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이곳에선 거꾸로 청교도만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는 모순이 펼쳐졌다. 윈스롭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죄를 짓기 쉬운 인간의 천성을 통제하는 것을 정부의 기본 책무라 여겼다. 당연히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식민지는 정치·사회와 종교가 하나 된 신정 체제(Theocracy)를 구축했다.

 

1631년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젊은 목사 로저 윌리엄스(1603~1683)는 이런 청교도 지도층의 과두 체제에 강력히 반대하며 교회와 정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윈스롭은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추방당하기 전에 달아난 윌리엄스는 1636년 오늘날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새 정착촌을 건설했다. 로드아일랜드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윌리엄스는 영국 의회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그곳에 교회와는 완전히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고, 매사추세츠와 정반대로 유대교 등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코네티컷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매사추세츠의 엄격한 신정 체제에 반기를 든 목사 토머스 후커(1586~1647)에 의해 건설됐다. 후커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신도들을 이끌고 오늘날의 하트퍼드에 정착했다. 그렇게 북미 대륙의 북쪽에서는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새로운 영국’, 뉴잉글랜드가 확장되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탄생과 남부의 형성

 

영국인이 신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1607년 남부에 자리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Jamestown)이었다. 제임스 1세에게 특허장을 받은 런던 회사는 1606년 이주민 144명을 세 척의 배에 태우고 버지니아로 향했다. 항해는 혹독했고, 104명만 살아서 체서피크만 안쪽에 도착했다. 그들은 왕의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이곳의 환경 역시 열악했다. 날씨가 습해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 창궐했다. 1608년 1월, 런던에서 후발대가 왔을 때 생존해 있던 사람은 38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주민을 실어 날랐고, 식민지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발버둥쳤다. 결국 제임스타운은 살아남았다. 존 롤프가 담배 재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서 들여온 담배는 17세기 초, 이미 유럽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기호 식품이었다. 담배는 버지니아 생존의 동아줄이 됐다. 그러나 담배 농사는 토양을 빠르게 고갈시키기 때문에 더 넓고 새로운 경작지가 필요했다. 담배 농장이 버지니아 내륙으로 확산된 이유다.

 

또한 담배 재배는 막대한 노동력을 요구했다. 이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619년 8월, 네덜란드 배가 20여 명의 아프리카인을 싣고 왔다. 노예 노동의 시작이었다. 그해 7월 버지니아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하원(House of Burgesses)을 구성했다. 신대륙에서 선거를 통해 구성된 최초의 의회였다. ‘자치’와 ‘노예제’가 같은 해에 태동한 셈이다. 이 역시 매사추세츠에서의 ‘종교의 자유’만큼이나 모순적이다.

 

버지니아가 살아남자 남부에도 여러 식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볼티모어 경은 1634년 메릴랜드를 건설했고, 찰스 2세의 총신 8명은 1663년 버지니아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왕에게서 하사받았다.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출발점이었다. 1733년 조지아주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 연안에 탄탄한 식민지 13개를 갖게 됐다.

 

종교적 관용과 시민권... 미국적 가치는 비주류 지도자에서 시작

 

펜실베이니아주의 아버지는 퀘이커교도이던 윌리엄 펜(1644~1718)이었다. 퀘이커교(Quakers·떠는 사람들)는 영국 개신교의 소수분파 중 하나로, ‘신의 이름에 부들부들 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청교도와 달리 예정설과 원죄의 개념을 부정했고, 공식적인 교회나 성직자도 없었다. 성(性)과 계급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당시로선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이들은 영국에서도 신대륙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탄압받았다.

 

자신들만의 식민지 건설은 퀘이커교도에게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돌파구는 윌리엄 펜이 마련했다. 찰스2세의 최측근이었던 동명의 윌리엄 펜(1621~1670) 장군의 아들인 그는 1681년 왕으로부터 신대륙의 드넓은 땅을 하사받았다. 망명 시절, 왕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였다.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 윌리엄 펜이 1683년 인디언 부족과 평화 협정을 맺은 장면을 묘사한 18세기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그림.

 

1682년, 펜은 퀘이커교도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넜고 펜실베이니아에 ‘형제애의 도시’ 필라델피아를 건설했다. 펜은 종교적 관용과 시민의 권리를 주창했다. 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국제기구를 언급했고, 식민지 통합도 주장했다. 오늘날 보편적 진리로 여겨지는 가치들이고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들이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조차 무시되기 시작한 가치들, 하찮게 여겨지는 제도들이다. 오늘날 펜의 존재가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송동훈 문명탐험가, 조선일보(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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