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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돌로 빚은 정원에 산벚꽃 흩날리면] ....

뚝섬 2026. 4. 17. 07:23

[모래와 돌로 빚은 정원에 산벚꽃 흩날리면]

[소리에 뜻을 입히다, 가배(珈琲)에서 십승석(十勝石)까지] 

[호칭에 숨어있는 日 장인 우대 정신]

 

 

 

모래와 돌로 빚은 정원에 산벚꽃 흩날리면

양평 메덩골 정원. /원철스님

 

남도의 암자로 거처를 옮긴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창 넓은 차실에서 바라보는 원경은 일품인데 정작 코 앞의 풍광은 삭막하다는 것이다. 정원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절집에서 정원을 수십년 가꾼 이력을 가진 도반들의 연락처를 건넸다. S절은 이미 지역의 유명 관광지에 이름을 올렸고 M절은 얼마 전 민간 정원으로 지정됐다. ‘정원이 사찰의 미래’라는 확신을 가지고 꾸며 온 덕분에 지금은 먼거리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M절 스님은 일찍이 정원 조경에 뜻을 두고서 일본 교토 사찰을 수십 차례 찾았다. 특히 덴류지(天龍寺) 정원에 압도됐다. 조경계 원조격인 무소 소세키(夢窓疎石·1275~1351) 선사는 ‘정원의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다. 그 바탕에는 13세기 동아시아 문명 이동의 역사가 있었다. 남송 말기 원나라 침입으로 중국 저장성 지역의 선승(禪僧)들이 대거 일본으로 망명한다. 선종(禪宗)은 원나라 라마불교와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본 선불교는 해외 인재들의 대량 유입으로 융성기를 맞았다. 무소 소세키는 그들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선종 문화는 사원 조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큰 나무와 물을 배제했다. 거니는 정원이 아니라 관조하는 공간을 추구했다. 교토 료안지(龍安寺) 석정(石庭)인 방장(方丈) 정원은 모래와 자갈과 돌과 이끼만을 사용해 선(禪)의 정제된 이미지를 구현한 작품이다.

 

얼마 전 경기도 양평의 메덩골 정원을 방문했다. 특히 석정 구역이 발길을 붙잡는다. 시그니처 바위 한 개를 옮기고자 초대형 트레일러를 동원했다고 한다. 또 안동 병산서원과 만대루를 현대 건축으로 재해석한 선곡(旋谷) 서원 마당에는 모양새가 제각각인 수십 개의 큰 돌을 이리저리 조화롭게 앉혔다. 서당의 학동들이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어렵사리 형상화했다고 한다. 가운데는 듬직한 모범생 바위들이 차지했다. 장난꾸러기 바위들은 스승의 눈이 닿지 않는 물가 혹은 구석자리에 배치했다.

 

같은 지역에 멋진 카페 정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찾아갔다. 어느 재벌가 별장을 현대 건축가의 솜씨를 빌려 재탄생시킨 곳이라 한다. 옮겨 온 큰 바위 두 개는 본래 있던 이끼를 그대로 살렸고 넓은 마당에는 굵은 모래를 깔았다. 그리고 노출 콘크리트 원형 건물로써 가장자리를 빙 둘렀다. 누구나 창가 자리에 앉아 중정(中庭)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세심한 감각이 돋보였다.

 

알고 보면 단순한 조경이 가장 어렵다. 오래도록 생각하고 엄청나게 꾸몄음에도 불구하고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생명인 까닭이다. 모래와 바위로만 이루어진 정갈한 정원을 만나게 되면 번잡했던 생각을 잠시나마 멈추게 된다. 어느 늦은 봄날, 산중턱에 있는 산벚나무 꽃잎이 흩날리며 하얀 모래마당에 떨어지는 벚꽃 엔딩이라도 만난다면 “유레카!”를 외칠 수도 있겠다.

 

-원철스님 조계종 연구소장, 조선일보(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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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뜻을 입히다, 가배(珈琲)에서 십승석(十勝石)까지 

 

일본 홋카이도 토카치의 한 제과점에 전시된 '십승석(十勝石)' 흑요석 /원철스님 제공

 

한자를 가까이 하면서 생활한 햇수가 짧지 않다.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낯선 글자를 더러 만나기도 한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는 찰황(札幌)이라고 표기했다. ‘ㅇㅇ’라고 써놓고 ‘ㅁㅁ’이라고 읽는다는 말이 농담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다.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 언어를 본섬(혼슈)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그들의 관용대로 번안한 까닭이다. 음(音)과 훈(訓)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조합할 때 전문가들의 논의와 절차를 거친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방문객에겐 낯선 글자일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한자의 여섯 가지 구성 원리, 즉 육서(六書) 가운데 가차(假借)라는 것이 있다. 음이 동일한 글자를 빌려오는 것을 말한다. 절집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도말 반야(般若·지혜)도 그런 사례의 일부라고 하겠다. 열도(列島)에서는 아테지(当て字)라고 했다. 뜻과 관계없이 발음 기호처럼 갖다 붙인 글자다. 한자 외에 따로 대중화된 문자가 없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방편(方便)이기도 하다.

 

삿포로에서 두어 시간 차로 달려가면 만나는 동네 토카치(とかち)는 한문 표기가 십승(十勝)이다. 이 역시 아이누 언어를 발음만 빌린 소리 표기라고 한다. 삿포로가 찰황으로 바뀌는 절차를 거친 것처럼 토카치 역시 그 법칙을 준용하면서 십승이 된 것이리라. 찰황은 글자 자체가 흔하게 사용되는 문자가 아닌지라 군더더기를 붙일 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십승은 달랐다. 누구나 소리 번역을 뜻 번역으로 바꾸고 싶을 만큼 쉬운 글자만 모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역 이름인 고유명사는 경쟁이 치열한 현대 사회에서 ‘열 번 이긴다’는 완승의 뜻으로 대용하고 싶은 잠재적 욕구에 부채질을 해댔다.

 

그 지역 특산물인 품질 좋은 검은 돌인 흑요석(黑曜石)은 ‘토카치 돌’이라고 불렀다.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십승석(十勝石)이 된다. 1947년 창업했다는 노포 제과점에서 방석 위에 귀한 보석처럼 모셔진 십승석(十勝石)을 만났다. ‘토카치 돌’도 ‘열 번 이기는 돌’로 둔갑했다. 가게에 전시된 대형 달항아리만 한 흑요석은 개운(開運·좋은 운세가 열림)이라는 큰 제목 아래 십승(十勝)이라고 쓴 뒤 해설까지 달았다. “십승의 힘과 십승의 돌을 닮아서 전부 이기고 싶다. 열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길”이라는 기원문도 부기했다. 그리하여 흑요석은 모든 소원을 성취해주는 신석(神石)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소리 표기로도 충분하지만 느낌까지 가미할 수 있다면 더욱 훌륭한 번역이 된다. 커피(coffee)를 가배(珈琲)로 표기한 것은 참으로 뛰어난 능력이라 하겠다. 가(珈)는 머리꾸미개, 배(琲)는 구슬꿰미를 말한다. 에도(江戶)시대의 번역가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1798~1846)은 커피콩의 붉은 열매 떨기를 보고서 귀부인들이 머리에 구슬장식을 한 우아한 모습과 연결시켜 ‘가배’라는 단어를 고안했다고 한다. 발음 속에 체리의 아름다움까지 은근히 머금토록 만들었다. 그 아테지는 조선의 고종임금은 물론 요즘 사람에게도 대중성과 높은 호감도를 자랑하면서 동아시아 커피가게에서 가장 선호하는 간판문자가 되었다. 제대로 만든 고상한 단어 한 개가 주는 문화적 힘이라고나 할까.

 

-원철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조선일보(2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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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에 숨어있는 日 장인 우대 정신


'정원사'가 아닙니다, '작정가' 입니다...

오가와 지헤이 7대와 일본의 장인우대 정신 

일본 도쿄 기타구에 있는 구 후루카와 정원. 서양관 정원은 일본 근대 건축의 아버지 조시아 콘도르가, 일본 정원은 제7대 오가와 지헤이가 설계했다. /도쿄도공원협회

 

일본에선 정원을 만드는 사람을 작정가(作庭家)라 부른다. 단순한 정원사가 아니라 예술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의 풍경을 정원 안에 재현해 내는 공간 연출가다. 14세기 초반의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7세기 초반의 고보리 엔슈(小堀遠州)도 유명하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약하면서 ‘근대 일본 정원의 선구자’라 불린 오가와 지헤이 7대(7代目 小川治兵衛) 역시 작정가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오가와 지헤이는 이름에 ‘7대’라는 숫자가 붙어 있는데, 이를 습명(襲名)이라고 한다. 1대는 18세기 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초에는 무사였는데 정원 조성의 길로 들어섰고, ‘칼을 찬 작정가’였다고 한다. 대를 이어 6대까지 내려왔고, 6대는 당시 17세였던 7대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6대는 양자로 받아들인 지 2년 만에 사망했고, 7대는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재능이 있었고, 의뢰인의 의도와 요구를 정확히 파악할 만큼 머리도 좋았다.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 7대는 ‘오가와 지헤이 중흥의 아버지’라 불린다. 지금은 12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가업을 승계하고 있다.

 

오가와의 초기 대표작은 무린안(無隣庵)이다. 러일전쟁 수행 방침을 논의하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이 도쿄로 천도한 이후 교토는 쇠락기를 맞이했는데, 교토를 부흥시키기 위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비와호의 물을 교토까지 끌어오는 것이었다. 일본 3대 및 9대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물길을 활용해 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부지 내에 개울, 연못, 폭포를 만들고 싶었다. 이끼를 심는 것이 주류이던 시절, 잔디를 심어 밝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작정가에게 ‘알아서 해달라’가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하니 반드시 맞춰달라’고 지시할 정도로 정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가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 이미 높았다. 1894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된 무린안은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에게 정원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무린안이 조성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후루카와 재벌의 3대 당주인 후루카와 도라노스케는 멋진 집을 짓고 싶어 했다. 서양식 저택과 서양식 정원은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er)에게 의뢰했다. 콘도르는 영국에서 건너와 일본 내에서 건축가 양성에 힘쓴 사람으로, 미쓰비시 1호관과 미쓰비시 창업자 가족의 저택 또한 그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라 해도 손색이 없다. 대지 아래쪽 부지엔 일본 정원이 들어섰는데, 만년의 오가와 작품이다. 일본에선 1912년부터 1926년까지를 다이쇼(大正) 시대라 하는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과 정원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3대 당주는 이 집에서 1926년까지 살았고, 이후에는 후루카와 가문의 귀빈 맞이용 공간으로 활용했다. 2차 대전 후 이곳은 국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도쿄도는 국가로부터 이 공간을 빌려 1956년 도립 정원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그 덕분에 지금 이곳에서 정원 감상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선 관료나 기업가뿐 아니라 전통 기술을 지닌 장인에게도 호칭을 세심히 붙이는 문화가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이를 통칭해 정원사라 부를 수도 있지만,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경우 작정가라 부른다. 대를 이어 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소질이 보이면 양자를 들여 계승시키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장인을 우대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400년 넘게 대대로 도공의 길을 걸으며 유명 도자기인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빚어온 도예 명가 심수관이 15대까지 이어오며 여전히 일본에서 활약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현암 팩토리8 대표, 조선일보(2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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