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총재 인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권력에 맞선 판사와 누운 판사]
중앙은행 총재 인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美, 임기 100일 전 지명으로
정책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 높여
한국은 불과 8일 전 지명한 적도
늑장 인사가 시장 신뢰 저해

케빈 워시 신임 미국 연준의장. /AP 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1월 30일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후임으로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를 지명한 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1년간 20%가량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나스닥지수는 워시 지명 이후 한 달간 4% 넘게 조정받았고, 워시 지명 전 9만달러에 육박하던 비트코인은 7만달러 밑으로 20% 넘게 추락했다. 그는 2011년 벤 버냉키 의장의 양적 완화(채권을 사들여 돈을 푸는 정책)에 반대하며 14년 임기가 보장된 연준 이사직을 던진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향후 연준이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의 고삐를 죄는 매파 성향으로 돌아설 것이란 우려가 확산된 것이다.
워시가 걱정과 달리 금리를 낮추는 완화적 통화정책을 선호하는 비둘기파로 변신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워시가 임명권자인 트럼프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 때문이다. 트럼프는 올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파월 의장에게 금리 인하를 압박해 왔다. 통상적으로 금리를 낮추면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워시는 민주당 정권 때는 경제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고, 공화당이 집권하면 가속 페달을 밟으려 하는 전형적인 공화당 충성파”라며 그를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이라고 규정했다.
워시의 본색이 매파인지, 비둘기파인지 알려면 두 달여를 더 기다려야 한다. 현 의장인 파월의 임기가 5월 15일 끝나기 때문이다. 그때까진 워시가 아니라 파월의 시간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미국은 통화정책의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연준 의장 임기 만료 100일 전쯤 후임자를 지명한다는 것이다. 워시뿐 아니라 파월과 재닛 옐런, 벤 버냉키 등이 모두 전임자 임기 만료 전 100일가량의 골든타임을 부여받았다. 금리 결정 같은 통화정책은 수장(首長)이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조기 지명으로 확보한 골든타임은 시장 참여자들이 새로운 수장의 성향을 분석하고 대비할 충분한 시간을 준다. 또 서너 달의 인수인계 기간을 통해 통화 정책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는 믿음을 시장에 줄 수 있다. 상원 청문회와 본회의 표결이라는 철저한 검증 과정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진행함으로써 중앙은행장의 도덕성과 전문성을 평가받는다는 장점도 있다.
반면 한국은 중앙은행 총재를 너무 늦게 임명한다. 2000년대 들어 대부분 총재들이 전임자 임기 만료 12~17일 전에 임명됐고, 가장 일찍 지명된 사례도 이주열 총재(29일 전)로 한 달을 넘지 않았다. 심지어 현 이창용 총재는 8일 전에 지명되는 바람에 인사청문회를 거쳐 취임하기까지 20일 동안 초유의 총재 공백 상황이 발생했다. 총재 후보자로 지명되면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인사청문회 답변 준비에만 매몰돼 정책 철학을 가다듬거나 한은 조직을 파악할 시간을 갖기 어렵다. 독립적인 통화 정책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다.
한은 총재 늑장 지명은 이번에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이 총재의 임기가 4월 20일 만료되니 정확히 48일 남았는데, 아직까지 후임에 대한 논의는 감감무소식이다. 통화정책은 가계와 기업의 대출금리뿐 아니라 원·달러 환율과 주가, 집값까지 경제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이런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한은이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처럼 중앙은행을 정부의 산하기관쯤으로 경시하는 관치금융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시장의 신뢰를 얻으려면 한은 총재로 누구를 뽑느냐만큼이나 얼마나 정성껏 준비했느냐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나지홍 논설위원, 조선일보(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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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맞선 판사와 누운 판사

2022년 10월 미국 워싱턴 DC의 연방대법원 건물에서 커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 신규 부임 기념으로 대법관들이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으로, 전원이 현재까지 대법관으로 재임하고 있다. 사실상 종신직인 미 대법관은 현재 보수성향 6명, 진보성향 3명으로 구성돼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해 말부터 “이르면 연내”라던 미 대법원의 상호 관세 판결 전망은 번번이 빗나갔다. 겨울 휴정기가 끝난 지난달 20일에도 반신반의 분위기였다. 나흘 뒤에는 트럼프 2기 국정연설이 예정돼 있었고, 대법관들 역시 의회에 참석해야 했다. 정치적 오해를 피하려 판결 시점을 미룰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았다.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대법원은 국정연설 나흘 전 “조세 부과 권한은 의회에 있다”며 트럼프의 상호 관세를 위헌이라고 단정했다. 정치적 고려를 덧붙인 절충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법 기술’도 없었다. 군더더기 없는 판시였다.
트럼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들까지 겨냥해 “미국의 수치” “가족에게도 부끄러울 것”이라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정연설장에서 트럼프와 대법원장은 의례적인 악수를 나눴고, 연설에서도 그는 “실망스러운 판결”이라는 표현 이상을 넘지 않았다. 집권 여당에서도 “대법원장을 탄핵하자”거나 대법관들의 신상을 터는 ‘좌표 찍기’ 같은 행태는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현재 미 대법원에는 출생 시민권 폐지, 행정부의 독립 기관 통제 권한, 이민자 추방 정책 등 트럼프의 굵직한 정책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제아무리 트럼프라도 판사들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역풍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계산이 작동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미 사법부가 오랜 기간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소신 있는 판결을 통해 축적해 온 권위 덕분이다.
대선 전복 시도 혐의 등으로 트럼프를 두 번 기소했던 잭 스미스 특별검사는 최근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공화당 의원들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정치와 무관하게 명백한 범죄 증거가 있었다”며 수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현직 대통령 기소는 헌법 원칙 때문에 트럼프 임기 동안 중단됐지만,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도 사법 절차 자체는 정치와 별개로 계속 움직이는 셈이다.
양극단 정치에 따른 정치의 사법화는 한·미가 비슷하다. 하지만 결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요 사건마다 법과 원칙보다 정치적 파장을 의식한 듯한 결과가 반복돼 왔다. 윤석열 정권 내내 김건희 여사를 향한 검찰 수사의 칼날은 무뎠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민주당 대표 시절, 사법 리스크 고비마다 적잖은 논란 속에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선거법 항소심 무죄를 받으며 대선 출마의 길을 얻어냈다. 진영을 불문하고 사법 제도가 정치적 변수로 소비됐다.
최근 한국 사법부에 대한 정치권 흔들기가 극에 달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이를 권력의 횡포라고만 탓할 수 있을까. 국내 판사들이 미국 대법원처럼 살아 있는 권력에 추상같은 판결을 내리며 굳건한 독립성을 증명해 왔다면, 정치권이 사법부를 이토록 가벼이 여기진 못했을 것이다. 사법부 스스로 신뢰를 공고히 하지 못한 부분이 위기를 키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워싱턴=박국희 특파원, 조선일보(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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