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갑자기 찾아온 해방… 독립 협상 전무했던 韓日]
미군 항공사진에 숨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두 가지 비밀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45년 8월 16일 독립투사들은 형무소 삼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에 진주한 미군은 서울 일대를 항공사진으로 남겼다. 그해 창간된 사진보도잡지 ‘국제보도’도 해방 정국을 사진으로 보도했다. 이들 사진에는 그동안 잘못 알려진 몇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우선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사진으로 퍼져 있는 아래 사진 촬영 날짜와 장소는 하루가 지난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아래 삼거리다. 항공사진 확대 사진과 해당 사진 속에 무악재가 보이고 건물 지붕들(파란 네모)이 동일하다. 대략적인 장소는 현재 서대문독립공원 안쪽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부근이다. 또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사형장 미루나무는 해방 이후 심은 것으로 밝혀졌다./국사편찬위원회
‘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는 때에 도둑같이 왔다.’(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일우사, 1962, p359)
그렇다. 아무도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당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옥음(玉音) 방송으로 태평양전쟁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과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조선 사람들은 뭔 말인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은 해방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35년 만에 들이닥친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감격은 8월 15일 당일이 아니라 하루가 지난 8월 16일에 폭발했다. 그해 말 발간된 영문판 사진 잡지 ‘국제보도’ 창간호는 서울역 앞에 모인 인파를 뒤늦게 싣고 이렇게 썼다. ‘일본이 연합군에 공식 항복한 다음 날(the next day after Japan officially surrendered to the Allies) 자유를 경축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모인 거대한 군중’.(서울역사박물관, ‘2020 서울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전시도록, p12)

<사진①> 감격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촬영 장소, 촬영자, 촬영 시간은 매체마다 중구난방이다.
정체불명의 사진 한 장
<사진①>은 바로 그 감격적인 해방을 만끽하는 군중을 찍은 사진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70년의 기록, 대한민국 새로운 시작’에는 이 사진이 ‘광복을 맞아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인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정체가 불명이다.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를 찾아보면 촬영 날짜가 해방 당일이나 8월 16일, 장소는 마포형무소(맞는 명칭은 ‘경성형무소’다), 서대문형무소 심지어 천안이라는 설명도 따라다닌다. 해방이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 탓이다. 구체적인 정보가 어찌됐건, 이 사진은 1945년 광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으로 때만 되면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 사진이 언제 촬영됐고, 어디서 촬영됐고, 촬영된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이 사진 정체는 이렇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삼거리에서 형무소 출소 독립운동가들과 군중을 찍은 사진’.
근거는 바로 해방 24일 뒤인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대문형무소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사진②>과 앞에 나온 ‘국제보도’ 창간호 화보다. 이들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어이없는 괴담도 하나 튀어나온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독립투사들이 부여잡고 통곡했다’는 서대문형무소 ‘통곡의 미루나무’ 괴담. 알고 보니 이 미루나무는 식민시대 끝나고 해방 이후 심은 나무였다.
사회주의계열이 선점했던 해방정국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이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함석헌, 앞 책, p356) 식민시대가 끝났다. 총독부는 국내 독립운동세력 가운데 사회주의계열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권력 이양 파트너로 택했다. 재조일본인 안전 보장과 건준의 건국 작업 주도권을 맞교환한 것이다.
8월 15일 여운형은 기존 건국동맹 조직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에게 정치범과 경제범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다음 날인 8월 16일 전격 석방됐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군중은 출옥한 사상범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석방된 정치범들은 상당수 여운형의 건준으로 흡수됐다. 그리고 진주군이 소련군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회주의계열은 조직적으로 ‘소련군 환영’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서울역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진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임이 밝혀지면서 기세등등했던 사회주의계열은 우익계열과 건국을 다투는 험악한 투쟁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사진②>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촬영한 서대문 일대 항공사진. <사진③>은 이 가운데 형무소 입구 갈래길과 사형장 부분에 표시를 한 사진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진③> 미군 촬영사진에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왼쪽)과 형무소 입구 갈래길을 표시했다.
사진이 말해주는 그날 그곳
사회주의 계열 사상범을 포함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지사들은 군중의 환영 속에 무악재 아래로 내려가 기념촬영을 했다.<사진①>
사진 속에는 세 갈래 길이 보인다. 멀리 무악재가 능선 사이 열려 있다. 사람들 왼쪽 뒤로 전차가, 그 뒤로 지붕 세 채가 찍혀 있다. 왼쪽 오르막길에도 군중이 가득하다.
23일 뒤인 9월 8일 미군 정찰기가 인천~서울 일대를 촬영했다. 그 가운데 한 컷에 서울 서부 지역이 찍혀 있다.<사진②> 무악재 서쪽에 서대문형무소가 보인다. 동쪽으로 작은 샛길이 형무소와 무악재를 연결해 작은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이 ‘출옥 기념사진’ 촬영 장소는 명확하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앞 샛길이 무악재로 연결되는 삼거리다. 항공사진을 확대한 아래 사진 속 지붕들(파란 동그라미들)과 세 갈래 길, 출옥 기념사진 왼쪽 파란 동그라미 속 지붕 세 채와 인파 가득한 양쪽 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사진④>

<사진④> 항공사진 확대부분과 출옥기념사진 비교. 위는 항공사진이고 아래는 기념사진이다. 파란 동그라미 부분 지붕들과 세 갈래 길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국사편찬위원회
사진들을 분석해 촬영장소를 밝혀낸 박물관연구소 소장 박찬희가 말했다.
‘증거가 사진 자체에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항공사진과 이 사진에 등장하는 길, 선로, 집들이 일치했다. 촬영 위치는 서대문독립공원 안쪽 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부근이다.’
‘국제보도’ 창간호에 실린 다른 사진에는 출옥 사진 속 인물과 동일 인물(추정) 세 명이 찍혀 있다.<사진⑤,⑥> 흰 양복을 입은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 그리고 중절모와 안경을 쓴 사람이다(붉은 네모). 사진 설명은 이렇다. ‘조선 애국지사들이 다시 한번 중심가에서(once more in the metropolitan street).’(서울역사박물관, 앞 책)
기념촬영 후 도심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또 촬영했다는 뜻이다. 식민 시대 조선일보와 경성일보 사진기자였던 최희연(작고)은 “‘국제보도’에 실린 화보는 8월 16일 내가 찍은 것”이라고 구술한 바가 있다.(2020년 1월 12일 뉴시스, ‘해방정국 3년’)
<사진⑥>의 파란 네모 속 인물은 ‘단파방송 사건’ 주역인 독립유공자 성기석(1990년 작고)이다. ‘단파방송 사건’은 경성방송 조선인 직원들이 미국 방송을 통해 접한 이승만 육성과 일본 패전 뉴스를 전파하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소했다.
괴담(怪談)으로 밝혀진 ‘통곡의 미루나무’
미군이 찍은 사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던 드라마틱한 사실 하나가 괴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사진⑦>은 식민 시대 처형을 앞둔 독립투사들이 독립의 한(恨)을 담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다. 형무소역사관 남서쪽에 남아 있는 사형장 모퉁이에 서 있다가 2020년 고사해 쓰러졌다. 안내판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출판됐다. 형무소역사관은 쓰러진 통나무를 그 자리에 눕혀놨고 여러 시민단체는 이를 보존하기 위해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서울시장 오세훈이 나무를 찾아 묵념을 했다. 서울시는 메타버스 가상공간에 이 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8일 항공사진을 보면 형무소 남서쪽 담장에 사형장이 찍혀 있다. 이를 확대해보면<사진⑧> 사형장 주변에 나무가 없다! 식민 시대가 아니라 해방된 이후 어느 시점에 심은 나무라는 뜻이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이 부여잡고 통곡할 나무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괴담이다. 독립투쟁 선양과정에서 허구로 창조한 괴담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운영됐고 1992년에 독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은폐됐던 공간에 ‘독립투사들의 한이 담긴 통곡의 나무’가 생겨버린 것이다.

<사진⑤> 1945년 사진잡지 '국제보도'에 실린 '시가지에서 다시 한번 환호하는 애국지사' 사진. 표시된 세 사람이 아래 <사진⑥> 속 인물들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사진⑥> 출옥기념사진 등장인물들. 붉은 네모 속 세 인물은 '국제보도' 잡지 화보사진(사진⑤) 속 인물들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파란 네모 속 인물은 독립유공자 성기석이다.

<사진⑦> 2015년 촬영된 서대문형무소 '통곡의 미루나무'. 식민시대 독립투사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독립의 한을 품고 부여잡고 통곡했다'는 나무다. 2020년 고사해 쓰러졌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⑧>1945년 9월 8일 미군 항공사진에 나온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확대 부분. 담장 모퉁이에 있어야 할 소위 '통곡의 미루나무'가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원래 사형장, 즉 ‘교죄장(絞罪場)’은 형무소 한가운데 옥사(獄舍) 사이에 있었다. 교죄장은 1922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고 옛터는 연못으로 변했다.
1945년까지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은 독립투사, 잡범 모두 포함해 493명이다.(이승윤, ‘1908~1945년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의 실제와 성격’, ‘서울과 역사’ 108호, 서울역사편찬원, 2021) 이 가운데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은 92명이다. 92명 가운데 1922년 이후 ‘통곡의 미루나무 옆 사형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18명이다. ‘연못 교죄장’에서 처형된 독립유공자는 74명이다. 연못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자, 사진 한 장 덕분에 해방의 감격을 얻었고 괴담을 버리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사이에 있는 연못. 대한제국시대인 1908년부터 1921년 식민시대 서대문감옥 때까지 사형장이 있던 자리다. 그때까지 독립지사 74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2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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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해방… 독립 협상 전무했던 韓日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동그라미 안)와 한국 측 대표 김용식 당시 주일 공사가 악수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1951년에 열린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 양유찬 대표가 “Let us bury the hatchet(화해합시다)”라고 하자 일본 측 지바 고(千葉皓) 대표가 “What is bury the hatchet?(뭘 화해하자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양 대표는 기가 막혔을 테지만, 이보다 식민지배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 차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이어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는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유명한 ‘구보타 망언’이다.》
“日 덕에 조선 발전” 구보타 망언

1953년 6월 구보타가 작성한 극비 외교문서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을 취하며 세계의 지탄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동아일보DB
구보타는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 홍진기는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으나,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일회담은 그 후 4년 반 동안이나 열리지 못했다(이원덕 ‘한일과거사처리의 원점’).
이 발언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아마 이 두 가지 인식이 일제 식민지시대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민의 대체적인 입장일 것이다. 물론 패전 후 오랫동안 일본의 진보, 리버럴 지식인들을 비롯해 적잖은 일본 시민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견지해 왔으나, 나는 많은 일본인들의 속내에는 ‘그래도 일본 때문에 조선이 발전한 면도 많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한편에 있음을 수시로 느껴 왔다.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속내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분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패전 직후 이미 식민지배에 대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일본 정부 대장성(大藏省)은 외무성과 협의하고, ‘재외재산 조사회’를 설치해 ‘(극비)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모두 35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서인데, 그중 총 10권이 조선편이다. 여기에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가 쓴 ‘조선통치의 성격과 실적―반성과 반비판’이라는 문서가 실려 있는데, 아마도 조선식민지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와 엘리트들의 입장을 대표한 내용일 것이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는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미숙한 점이 있어 조선인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주관적 의도만큼은 조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었다는 이른바 ‘선의의 악정’론을 주장했다.
他 식민지들의 ‘독립 협상’
다른 칼럼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조선식민지에는 식민지 역사상 특이한 점이 많이 있다. 1910년이라는,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이 해체되던 가장 늦은 시점에 이미 민족의식이 충만한 국민을 무리하게 식민지화했다는 점, 식민지배 기간이 35년으로 식민사상 가장 짧았다는 점, 오랫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는 점 등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장래의 식민지 독립에 관한 논의가 식민본국-식민지 간에 일절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식민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장래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과 인도는 공동의 적에 대한 투쟁(인도는 제1차 세계대전에 150만, 2차 세계대전에 250만의 군인을 제공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독립이나 자치를 포함해 식민지의 존재 양태에 대한 다양한 안들이 검토되었다(박지향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프랑스와 베트남의 경우는 식민지배 기간과 전쟁(1945년 이후 베트남의 독립전쟁) 과정에서 길고 지루한 협상을 계속했다. 미국과 필리핀은 필리핀의 장래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1930년대 중반 필리핀 독립에 관한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고, 2차 대전 종결 후 필리핀은 즉각 독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식민지의 리더들은 다가올 미래를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조절할 수 있었으며, 식민본국에 대한 감정도 완화, 또는 상대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독립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과 협상 여하에 따라 그 경로가 어느 정도는 통제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의 해방은 친일 세력뿐 아니라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뜻밖의 것이었다. 적어도 해방 5년 전까지만 해도 5년 후의 해방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말 “도둑처럼 해방이 찾아왔다”(함석헌).
日패전에 직접 대화 없었던 韓日
게다가 조선을 통치하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우는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에 식민본국의 통치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식민권력과 현지 엘리트 사이에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권력이 점진적으로 이양되었다(프랑스-베트남은 협상 결렬로 전쟁 발발). 그러나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전쟁 후 독립을 논의할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식민본국과의 협상 경험과 축적도, 그들과의 협상채널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분리가 이뤄졌다. 한일은 협상과 논쟁을 통해 식민 지배를 ‘정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이 만나 제2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논의하는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당황하기는 일본 측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여 조선을 포기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 인식에 있어서는 혼선을 보였다. 일본 역시 조선의 독립이라는 프로그램을 거의 상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츠담선언 수락(1945년)과 동시에 조선이 독립한 것인지, 대한민국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년),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1952년)로 조선 독립이 인정된 것인지 명확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지, 그리고 그를 가져온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 후 6년 만에 대면한 양국 엘리트 사이에 벌어진 저 대화는 ‘미정산’ 상태인 역사 인식의 현격한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후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십수 차례 사과했지만 곧 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갖가지 ‘망언’들을 해왔고, 이는 한국인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동아일보(2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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