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에 아버지가 은퇴 후
가꾸는 시골 텃밭을 찾았다. 열무 종자(種子)가 담긴 봉지가 텃밭 가장자리 헛간에 있었다. '맛깔열무'라는
이름의 봉지에 찍힌 제조사 신젠타(Syngenta)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신젠타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농업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이 회사가 국내에서 파는 종자는 양파·오이·호박 등을 망라해 160종이
넘는다. 고추만 하더라도 '진짜사나이' '대장부' '다홍치마' 같은
우리식 이름으로 서른 가지 품종을 내놨다. 그런데 이 회사가 하루아침에 중국 기업이 된다. 국영 중국화공(中國化工)이 52조원을 주고 사들이기로 했다.
신젠타 인수는 평범한 M&A가 아니다. 중국의
야심과 국가 전략이 집약돼 있다. 우선 14억 인구를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기반을 얻었다. 또 성장 엔진으로 주목받는 종자 산업에서 단숨에 시장 지배적 위치에 올라섰다. 신젠타가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는 바이오 연료 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축적해둔 유전자변형식품(GMO) 개발 노하우도 넘겨받게
됐다.
중국은 식량 안보 차원에서도 천군만마를 얻었다. 90개국에
직원 2만7000명을 둔 신젠타는 넓은 '식량 영토'를 확보하고 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미주에서도 중국은 '식탁의 지배자'가 될 채비를 마쳤다. 거대 종자 회사 몬샌토를 앞세우는
미국과 뿌리 산업에서도 순식간에 G2로 발돋움한 것이다. 신젠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연구소와 공장을 두고 있다. 중국으로선 라이벌의 깊숙한 진영에 미래 산업의 전진
기지를 확보한 셈이다. 교묘한 적진 침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신젠타는 16조원에 이르는 매출의 27%를 북미에서 거두고
있다. 미국 주요 언론이 중국의 신젠타 인수를 잔뜩 경계하는 기사를 쏟아낸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시점이다. 지금은 중국 경제에 의구심이 증폭되는 시기다. 상하이 증시는 올해 들어 20% 넘게 빠졌다. 중국에는 위안화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달러 실탄(實彈) 확보가 시급한 시절이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거액 현금을 투자했다. 신젠타 인수에서 초강대국을 지향하는 중국의 속내와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경착륙(硬着陸) 경고가 쏟아지던 작년 한 해 동안 해외 기업 인수에 136조원을 쏟아부었다.
그에 반해 우리 기업들의 요즘 행보는 걱정스럽다. 장기
전략 없이 단순히 허리띠만 졸라매는 경영이 대세를 이룬다. 재벌 그룹끼리 일부 계열사를 주고받은
게 위기 대처용 구조조정으로 포장된다. 해외 유망 기업 인수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물론 군살을 덜어내는 작업은 필요하다. 하지만 마냥 감량만 하면서
웅크리고 있으면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까. 수비만 하면 득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정부도 국가 차원의 긴 안목에서 산업계를 독려해야 한다. 중국의
신젠타 인수는 안보와 미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새겨봐야 할 거래다.
-손진석 국제부 기자, 조선일보(1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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