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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 되나] [국부(國父)] ....

뚝섬 2022. 11. 22. 07:54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 되나] 

[국부(國父)] 

[타이완을 홀대해서는 안 되는 까닭]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 되나

 

민주주의 국가 세운 이승만, 통일 노력 멈추지 않은 김구
모두未完의 지도자였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회의 창덕궁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이승만과 김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이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에서 국수를 먹으며 독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현대사 논쟁을 바로잡으려면 백범 김구를 확실히 한국의 정통성으로 안아야 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후손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백범의 행적에 대한 해석이 반(反)대한민국 좌파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YS는 곧바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에이~ 이승만 독재자래이, 독재자.” 김구에 대해선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념 갈등의 뿌리엔 단순히 친북 반공이라는 도식을 넘어 주류 내의 자기 정체성 상실에도 원류가 있다.”

 

이승만과 김구가 언급되는 현대사 관련 기사를 쓰면 댓글은 양분되기 일쑤다. 한쪽에선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로 분단을 고착화한 자”로 몰고 다른 쪽에선 김구를 “대한민국 수립을 끝까지 반대한 친북 협력자”로 폄훼한다. 놀랍게도 이것은 1948~1949년 일어났던 두 사람에 대한 비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각은 과연 온당한가?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보고, 그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언급한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이 남북 분단의 계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6 2 38 이북에 이미 세워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 한반도의 단독 정부였으며 김일성 독재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총선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고, 적화통일이 아니면 일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는 가지 선택지밖엔 없었다. 공산주의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의문이 남는 선택일 수도 있었으나, 지난 70여 년에 이르는 남북한의 역사는 이승만의 길이 옳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은 군정이 시종 이승만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중도파를 지원했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김구는 대한민국 수립과 관련없는 인물’이라는 다른 쪽의 주장 역시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그가 1945년 11월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한 이후 그의 존재 자체가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반탁(反託)운동을 비롯한 숱한 정치적 행보에서 이승만과 손을 잡고 민중을 단합했다. 단정(單政) 수립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과 의견을 달리해 가망 없던 남북협상에 뛰어들었으나통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꿈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백년전쟁’류의 왜곡된 시각이 보여주는 것처럼, 김구의 임정 세력은 대한민국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았다.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장 신익희, 총리 국방장관 이범석 여러 임정 인사들이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을 맡았고, 김구가 서거한 조소앙 같은 임정 계통 인사는 1950 5·30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했다. 6·25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 지형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통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그들의 꿈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모두미완(未完) 국부(國父)’ 있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은 각각 현실과 이상, 정부 수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권력과 재야를 대변하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였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부가 반드시 한 명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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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國父)

 

'국부(國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말하면 터키인을 빼놓을 수 없다. 관공서, 지하철, 노점상에서까지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초상화나 어록을 볼 수 있다. 그 이름을 딴 시설과 동상, 기념관과 기념물은 국토 전역에 널려 있다. 모든 화폐에도 그가 등장한다. 국회는 그에게 '터키의 아버지'(아타튀르크) 칭호를 헌사하며 '영원히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를 모독하면 처벌을 받는 법까지 있다.

▶많은 나라가 건국, 독립,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고 국민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를 국부로 추앙한다. 중국의 쑨원, 싱가포르의 리콴유, 베트남의 호찌민, 남아공의 만델라, 미얀마의 아웅산,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등이다. 미국은 독립선언문과 건국헌법에 기여한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가운데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국부(Father of nation)로 받든다. 매년 미국인 수십만 명이 그의 이름을 딴 수도 워싱턴에서 '워싱턴기념대로'를 타고 30여분 거리에 있는 워싱턴 생가를 찾는다. 

 

▶몇 년 전 정치권에 합류한 원로 진보학자가 이승만을 '국부'로 평가한다면서 "나라를 세운 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그 화합의 힘으로 미래를 끌고 가야 한다"고 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공적을 조명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3선 개헌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한 사람' '4·19 유족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발하자 이 학자는 "국민 눈높이를 만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며 사과했다.

▶엊그제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며 "우리의 국부는 김구가 됐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 운동권들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봤다. 그런 나라를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이승만 없이 건국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무지하거나 일부러 거짓말하는 것이다.

정작 김구는 '환영 국부 김구 주석'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국부 이승만'과 '임정 주석 김구'는 결코 반대편에 서 있지 않다.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다. 이 정권 사람들은 한쪽만 보는 외눈박이 주장을 하면서 양쪽을 다 보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이들의 특기이자 나라를 분열시키는 '역사정치'라는 것이다. '국부'란 용어가 화합이 아니라 싸움의 대상이 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임민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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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을 홀대해서는 안 되는 까닭

 

'나라면서 나라 아닌' 타이완

 우리는 1992년 중공과 수교하며 예고도 없이 비정하게 단교

우리와 동질성 가장 강한 나라

차이잉원 새 총통 취임에 맞춰 독자적인 타이완 정책 세웠으면

 

지난주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했다. 경제적 성과가 크다고 한다. 성급한 대차대조표에 흥분하기보다 차근차근 두고 챙길 일이다. 근래 들어 국가원수의 해외 나들이가 부쩍 늘어난 것은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비중이 높아진 징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로 2시간, 지척에 두고서도 대한민국 국가원수가 찾지 못하는 외국이 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한때 우리가 '자유중국'으로 부르던 타이완이다.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은 나라이기도 아니기도 한 특이한 존재다. 1971년 유엔은 타이베이 정부 대신 베이징의 공산당 정부를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했다. 그때부터 타이완은 유엔 밖의 외계국(外界國) 신세로 전락했다. 기껏해야 '양안(兩岸) 체제' 또는 '1국 2 체제'의 일원으로 '나라 안의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실체는 엄연하되 국제 호적부에 등재되지 않은 인구 2400만의 섬이다. 일찍이 이 나라 소설가 우줘류(吳濁流)는 자신의 조국을 일러 '아시아의 고아'라고 자조했다. 1895년 전쟁에 진 청국이 버리다시피 일본에 건네준 섬이다그전에도, 그 후로도 침략자, 착취자들만 차례차례 '아름다운 섬(美麗島)'을 유린했을 뿐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자 하나 없는 외톨이였다.

10월 24일 '유엔 데이'는 1970년대 초까지 우리의 국가기념일이었다. 1948년 8월, 유엔은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을 즉시 승인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보내 나라를 지켜 주었다. 이날을 맞아 '국민학교' 학생들은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인 '자유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썼다. 장 총통의 은혜도 기렸다. 나라를 빼앗긴 망명객들이 주권 회복의 꿈을 품던 상하이, 충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준 그였다.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찾은 최초의 국빈으로 격려의 언사를 건네주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자 1953년 11월, 타이베이를 방문하는 답례를 치렀다. 당시 두 나라는 그런 사이였다.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동맹국도 적국도 없다. 대한민국도 1992년 '자유중국'과 단교하고 '중공'과 수교했다. 대세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라도 과정이 비정했다. 적정한 예고도, 설득도, 양해를 구하는 위무의식도 없었다. 한때 이 땅에 성행하던 전형적인 속물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냉혹함으로 일관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시골 청년이 부잣집 딸에게 장가들면서 그동안 몸과 마음 바쳐 뒷바라지한 시골 처녀를 헌신짝처럼 버린 격이다. 오늘 이날까지 풀리지 않은 타이완 국민의 분노와 배신감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설령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않을 것이다.' 타이완 국민의 가슴에 숨겨진 비수다.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당시에는 '국부(國父)'로 숭앙받던 두 지도자에 대한 후세인의 평가도 극단으로 갈린다. 그러나 적어도 강력한 반공 국가의 건설에 헌신했다는 공로는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 타이완은 소중한 존재다. 정서적 차원의 과거 때문이 아니다. 국제 정치에 매우 유용한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날로 고조되는 베이징 중국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카드 만들기에 고심한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열네 나라가 공유하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중국 인접국과의 유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중국도 이러한 '오랑캐들의 합창'을 두려워한다. 분단,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동시 성취, 자유주의 반공 국가, 이 모든 점에서 타이완은 우리와 동질성이 가장 강한 나라다. 학자들의 분류대로 '중국 최초의 자유민주정체(First Chinese Democracy)'이다. 그래서 우리와 동조하고 유대할 수 있는 주제와 폭이 넓다. 좀 더 큰 국제 정치의 그림으로 보면 남북한의 통일은 대륙 중국과 타이완, 양안국의 통일 문제와 연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타이완 정치의 핵심은 대륙 출신 국민당과 토착 세력을 바탕으로 한 민진당 사이의 경쟁이다. 지난 1월 선거에서 청년 세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민진당이 승리해 입법부와 행정부를 함께 장악했다. 오는 20일, 차이잉원(蔡英文) 새 총통이 취임한다. 우리 정부가 어떤 형식으로 적절한 관심을 표할지 궁금하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타이완을 너무 홀대했다. 독립국의 자존심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 정부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라도 독자적인 타이완 정책을 세웠으면 한다. 비록 정식 국교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충분한 운신의 여지가 있는 법이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조선일보(1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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