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치의 날’… 해외시장 진출 전략 세워야]
[고추의 전파]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었다]
[어떤 광복절]
[자연에서 배우는 기술]
[과학한국의 첫걸음]
오늘 ‘김치의 날’… 해외시장 진출 전략 세워야
최근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선수단을 위해 카타르 현지에 김치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해 중국의 ‘김치 공정’이 또다시 시작됐다. 중국 관영 매체 환구시보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김치의 중국어 표기인 ‘신치’(辛奇)가 아닌 쓰촨성의 절인 배추를 뜻하는 ‘파오차이’(泡菜)로 표기했다. 관영 언론 기사화를 통해 중국 누리꾼들의 댓글 여론을 만들어 여론을 호도하는 전형적 김치 공정 수법이며 억지 주장이다.
김치에 대한 중국의 문화 공정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소중한 우리 자원을 지키고,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김치를 해외에 어떻게 알릴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국내 김치 수출액은 2016년 7900만달러에서 지난해 세계 약 90국에 1억5990만달러로 늘어나 5년 만에 2배가 되었다. 김치의 우수성과 다양한 효능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정부 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다. 2010년 설립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세계김치연구소는 김치 관련 연구 개발을 통해 핵심 기술을 개발, 산업 현장에 전수하고 있다. 연구소는 최근 구글 측에 항의해 번역기에서 ‘김치용 배추’를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나오는 ‘Chinese’를 삭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1월 22일은 제3회 ‘김치의 날’이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11월)가 모여 면역력 증진, 항비만, 장내 환경 개선 등 22가지(22일)의 효능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지난해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올해에는 버지니아주, 뉴욕주, 워싱턴DC 등에서 이날을 김치의 날로 제정했다. 중국의 김치 공정에 대응해 김치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체계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서경덕·세계김치연구소 홍보대사·성신여대 교수, 조선일보(22-11-22)-
_______________
고추의 전파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아메리카 작물
콜럼버스가 유럽에 소개한 고추… 튀르키예가 전세계 전파하다

콜럼버스 신대륙 상륙-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탐험대 일행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원주민 타이노인들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겸 저술가 테오도르 디 브라이가 그린 1594년 판화가 원작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면서 일지에 현지인들이 재배하는 작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고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추는 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전파되며 전 세계인의 입맛과 음식을 바꿔 놓은 작물이 됐다. /미국 국립 의학 도서관
1493년 1월 15일,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뇰라 섬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는 일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곳에서는 아히(aji)라는 값진 식물을 많이 재배한다. 사람들은 이 식물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식사 때마다 반드시 챙겨 먹는다. 매년 선박 50척 정도 가득 이 식물을 실어 나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전 7000년부터 자연산을 거두어 먹었고, 그로부터 몇 세기 뒤부터 경작해 오던 작물이다. 원산지가 볼리비아 산지인지 혹은 멕시코인지 100%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퍼져 일상적으로 애용하는 음식 재료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유럽인들이 이 작물을 세계 각지로 전파했다. 이전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향신료는 후추나 정향처럼 대개 아시아 산물이었는데, 이제 고추와 바닐라, 올스파이스 같은 아메리카산 향신료들이 더해져 세계인의 입맛을 바꾸어놓았다. 현재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다.
세계 인구 4분의 1이 고추 즐겨 먹어
에스파냐 출신 선원과 상인들이 고추를 본국으로 가지고 간 후 이탈리아 일부 지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지역 사람들이 고추를 즐겨 먹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매운맛보다는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부드럽고 순한 맛의 음식들이 확산 중이었다. 프랑스 요리가 그런 흐름의 정점을 차지한다. 서유럽에서 고추는 음식 재료로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식물원에서 관상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 푹스(Leonhard Fuchs)라는 식물학자는 ‘식물사’(1549)에서 얼마 전부터 독일 각지에서 고추를 기르고 있다고 기술하면서, 놀랍게도 이 작물의 원산지를 인도의 콜카타라고 잘못 소개한다. 왜 그럴까? 에스파냐에서 동유럽 방향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파했으리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부터 전해졌을 수 있다. 작물의 전파는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경로를 거치게 마련이다. 사실 전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달한 사람들은 에스파냐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에스파냐의 고추가 들어간 소시지-에스파냐식 전통 소시지인 초리조. 돼지고기를 다진 뒤 고추와 소금, 마늘 등의 양념을 넣고 말려서 만들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포르투갈 상인과 선원이 고추를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큰 곳으로는 브라질 동쪽 해안 혹은 파나마 지역을 든다. 이들은 아프리카와 대서양상의 섬들에 세운 자신들의 교역 거점들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옥수수 같은 아메리카 신작물을 전파했고, 이때 고추가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아시아의 교역 지점들로도 전달되었는데, 특히 인도의 고아(Goa)가 세계적 확산의 중요한 중간 거점이 되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로, 동쪽으로는 믈라카해협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고추가 확산했다.
특기할 곳이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지역이다. 옥수수, 콩류, 호박, 고추 등 아메리카의 작물들이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소위 ‘콜럼버스 교환 현상’에서 에스파냐 지역보다도 아나톨리아 지역이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아나톨리아 미스터리(Anatolian mystery)’ 현상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아시아 내 해상·육상 교역로들을 통해 물품이 오가는 과정에서 인도에서 튀르키예로 작물들이 전달되었든지, 혹은 오스만제국 병사들이 인도를 공격하던 중 고추 같은 작물들을 얻어서 들여왔을 수도 있다. 아메리카 작물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제2의 고향 삼아 번성했다. 이후 오스만제국 군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향해 공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튀르키예로부터 발칸 지역과 헝가리로 고추가 확산했다. 고추는 특히 헝가리에서 사랑받는 작물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파프리카 종 고추가 개발되었고, 이것을 활용한 굴라시 수프와 같은 국민 음식이 탄생했다.

튀르키예 고추-튀르키예 샨르우르파의 한 전통시장에서 고추로 만든 향신료 가루를 높이 쌓아놓고 팔고 있다. 튀르키예는 과거 아메리카 원산 작물의 주요 집산지 역할을 했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다른 한편 인도로부터 동쪽으로도 고추가 확산해 갔다. 중국, 구자라트, 아랍 상인들이 교역 활동 과정에서 믈라카와 인도네시아로 확산시켰고, 다시 중국과 조선, 일본 방향으로 퍼져갔다. 그 구체적 경로가 모두 명쾌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점은 신작물들의 전파 과정이 여러 시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다기한 경로를 거쳤으리라는 점이다.
한반도에 고추가 유입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옛 문헌들은 대개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기술한다. 예컨대 ‘지봉유설(芝峯類說·1613)’은 “남만초는 센 독이 있는데 왜국(倭國)에서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왜개자라 부른다. 때로 이것을 심은 술집에서 그 맹렬한 맛을 이용해 간혹 소주에 타서 팔고 있는데 이를 마신 자는 대부분 죽었다”고 한다. 사실 남만초(南蠻椒·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매운 양념 풀)와 왜개자(倭芥子·일본에서 들어온 겨자)라는 두 명칭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들어온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에서는 오히려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다. ‘대화본초(大和本草·1709)’에서는 “옛날 일본에는 번초(蕃椒)가 없었는데, 조선을 칠 때 그 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려호초(高麗胡椒)라 부른다”고 하고 있다. 조선은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고, 일본은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두 나라 모두 고추가 이미 전해진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후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과정에서 양국 사람들 모두 전쟁 중 상대편 국가에서 들어온 것으로 믿게 된 듯하다.

중남미의 고추 요리-중남미의 전통 요리 ‘아히 데 가이나(Aji de gallina)’. 올리브와 달걀, 닭고기, 밥과 고추 등이 재료다. 고추는 원산지 아메리카에서도 중요한 식자재였다. /플리커 Discover Corps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광해조부터 고추가 크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고추가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매운맛을 내는 달래, 마늘, 파, 생강, 천초 등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고추가 매운맛을 내는 재료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것은 대체로 18세기부터의 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고추를 사용하는 음식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보일 뿐 아니라, 비로소 고추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번초(蕃椒)를 향명(鄕名)으로 고초(苦草)라 한다”는 언급이 이를 말해 준다. 이전까지 ‘고초’는 산초나 후추를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일반인들이 이제 오늘날의 고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엔 광해군 무렵부터 널리 퍼져
김치의 발전 과정을 보아도 오랫동안 고추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기록상으로는 18세기 중엽에 가서야 김치에 고추가 들어간다. 그러므로 사실 과거 김치는 ‘매운맛’보다는 ‘순한 맛’이었다. 우리 음식 전반에 고추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일제감정기였다. 이 시대 신문기사에 “이렇게 자극성이 많은 고추를 두세 살 먹은 어린아이 적부터 사용하야 이것이 없이는 먹을 수 없이 중독이 되며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하고 한탄하는 글이 나올 지경이다. 갈수록 맛이 강해지는 현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낙지 요리 식당 주인의 인터뷰를 보면 십여 년 전보다도 현재 훨씬 매운 음식을 내야 손님들이 만족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보급되어 많은 나라의 음식이 매워진 현상은 우리가 예민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근대 세계에서 일어난 실로 중요한 현상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매운맛이 확산하는 가운데에도 각 나라마다 색다른 매운 음식을 창안해 냈다. 우리는 불같이 매운 인도 음식과도 다르고 비교적 순한 정도로 매운 헝가리 음식과도 다른 우리 나름의 독특한 매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김치의 변화]
처음엔 심심한 백김치… 18세기부터 고추 사용
김치의 재료와 만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 전기의 자료인 ‘수운잡방(需雲雜方·1481~1552)’에는 김치 재료로 무와 가지가 가장 보편적이고 동아도 비교적 널리 쓰였으나 배추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양념은 단순해서 향신료로 천초와 할미꽃(白頭翁), 생강, 마늘 등이 보이지만, 아직 고추가 쓰이지 않았다. 조선 중기 자료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이르면 김치 재료로 이전에는 없던 미나리와 갓이 쓰이고, 무엇보다 배추가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이 쓰인 것은 아니다. 양념으로는 파, 마늘, 생강, 청각, 거목, 천초 외에 드디어 고추가 보인다. 조선 후기 자료인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를 보면 김치 재료로 무가 주로 쓰이고 오이, 가지, 동아 역시 많이 쓰이지만 무엇보다 배추가 증가하는 게 눈에 띈다. 대부분의 김치에 고추가 쓰인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재료가 다양화·고급화되는 중이고 무엇보다 배추와 고추가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배추는 이전 시대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19세기 말쯤 되어서야 오늘날과 같은 좋은 배추를 재배하게 되었다(예컨대 서울의 방아다리 배추가 이름을 날린 좋은 품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배추 통김치는 ‘단군 이래’ 먹던 게 아니라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들어오고 중국산 배추 종이 개량된 이후인 19세기 말 이후 진정 보편화된 역사적 산물이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11-22)-
______________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었다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과거 김치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우리나라는 1인당 하루 평균 무려 300~400g의 김치를 먹었다. 같은 시기 1인당 양곡 소비량이 하루에 450~520g(그중 쌀이 350g)이었으니, 김치는 쌀 못지않은 주식이었다. 2020년 쌀 소비량은 122g, 김치 소비량은 57g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김치는 쌀, 우유에 이어 셋째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육류 소비가 늘어나며 먹거리가 다양화되기 전까지 김치가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해준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우장춘의 김치 혁명 덕분이다.

1898년 9월, 서울의 일본 공사가 본국에 다급히 연락을 보낸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우범선이 한국으로 돌아와 몰래 잠입했다는 것. 당시 한국은 독립협회의 의회 요구와 만민공동회로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이들과 우범선이 연락하며 뭔가를 꾸미는 것을 포착한다. 하지만 미묘한 정세에 우범선이 다시 주목받으면 일본이 난처해질 수 있어 본국의 지휘를 요청한 것이고, 우범선을 설득해 일본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에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호적을 한국에 올려 놓는다.
우장춘이 다섯 살이던 1903년, 우범선은 암살된다. 한때 우장춘은 보육시설에 맡겨지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도쿄제국대학 부속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이 유명해진 것은 1935년의 논문이다. 전혀 다른 종(種)인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제3의 종 유채(油菜)가 만들어짐을 보이며 다윈의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으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교토에서 대형 종자 회사의 연구농장장으로 일하던 우장춘은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고 있었다.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종자를 일본에 의존했던 한국 농업은 무너지기 일보직전 상황이 됐다. 한국은 우장춘이 절실했지만, 데려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호적으로 본적이 ‘서울’임을 증명하며 재일 조선인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행을 준비했다. 남은 가족들의 생계에 보태라고 일본 고위 공무원 5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100만엔을 한국 정부에서 보냈지만 이 돈을 한국에 가져갈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기구를 사는 데 다 써버렸다. 주위의 걱정에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나갈 것입니다.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라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1950년 3월의 일이다.
3개월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종자 개발에 집중했다. 식량 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 확보가 우선이었다. 1950년 겨울, 딸의 결혼식으로 우장춘이 일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가 전쟁 중인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와서 연구에 매진했다. 종자밭 확보를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그에게 전쟁은 핑곗거리조차 안 되었다.
1954년 드디어 무와 배추 종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우장춘은 조선의 전통 배추, 중국에서 전래한 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배추들이 모두 김치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육종 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 품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먹는 속이 꽉찬 김장 배추는 그가 수많은 교배와 연구를 거쳐 만들어냈다. 고추 종자까지 개발했다. 하지만 세간의 불신은 상당했다. 이때 들고나온 것이 ‘씨 없는 수박 시식회’이다. 흔히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교토대학 기하라 히토시 교수의 업적이다. 단지 우장춘은 육종학의 위력을 시범으로 보인 것이다. 이런 노력 끝에 그의 종자들이 퍼지며 한국은 마침내 ‘씨앗 독립’에 성공한다.
우장춘이 교토에 남겨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58년 4월. 이때 결혼을 준비하던 넷째 딸이 신랑감을 우장춘에게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12월 결혼했고, 이듬해 4월 교세라(Kyocera, 교토 세라믹)를 창업했다. 교세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이나모리는 교세라 홈페이지에 우장춘과의 인연을 남겼다. 무일푼이던 시절 예비 장인을 만나 격려받고 힘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세라 홈페이지에 장인 우장춘을 ‘김치의 은인’이라 기록했다. 지난 8월 사망한 이나모리는 수원에 묻힌 우장춘의 묘를 생전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59년 우장춘은 한국에서 사망했다. 사망 사흘 전 훈장이 수여되었다. 병상의 우 박사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약속대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한국에 왔을 때 전쟁이 벌어졌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왜 이토록 한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조선일보(22-11-14)-
______________
어떤 광복절
[차현진의 돈과 세상]
8월은 한일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한쪽에선 영화 ‘한산’을 보면서 과거를 상기하고, 다른 한쪽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가 미래 지향적이기를 기대한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분노의 시간이었다. 친일파 후손들도 그때의 기억이 편치는 않다. 생물학자 우장춘이 그랬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범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1950년 귀국할 때 주변에서 그의 안녕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라며 고집스럽게 배를 탔다. 그리고 아버지의 업보를 씻는 마음으로 부산에서 여생을 보냈다.
1953년 일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의 변심을 의심하며 출국을 금지했다. 6·25 전쟁 중 현역 해군 소령으로 근무할 정도로 애국심이 컸던 우장춘은 그 의심까지 감내하며 아홉 번의 광복절을 정직하고 담담하게 맞았다. 출생 자체가 한일 근대사의 비극이었던 우장춘의 충정은 과학으로 빛난다. 씨 없는 수박 말고도 제주도의 감귤과 유채꽃, 병충해에 강한 강원도 감자는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들이다.
친일파 후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범선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구연수의 장남 구용서(일본명 구하라 이치로)가 그렇다. 구연수가 조선총독부 고위경찰인 덕에 그 아들 구용서는 도쿄상대에서 유학을 마친 뒤 조선은행에 단독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인데도 도쿄에서 근무하는 전무후무한 특혜를 누렸다. 거기서 친일파 송병준의 손녀(노다 미에코, 한국명 송지혜)와 결혼했다. 광복 직후 귀국해서는 그런 과거를 꽁꽁 감추고 있다가 한국은행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59년 오늘 우장춘이 6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이종사촌이었던 구용서는 그때 상공부장관이었다. 우장춘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고 속였던 구용서는 해마다 광복절이 괴로웠으리라.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2-08-10)-
________________
자연에서 배우는 기술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워싱턴대 연구진이 개발한 실제 거미줄보다 더 강한 인공 거미줄. /워싱턴대 홈페이지
거미는 여러 종류의 거미줄을 만든다. 먹이를 잡고 그 잡은 먹이를 둘둘 말아 저장하거나 알 집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거미줄은 끈적끈적해야 한다. 반면 거미줄의 구조를 지탱하는 방사 실이나 지지 실은 강하고 질겨야 한다. 거미줄 연구의 초창기 학자들은 대체로 거미줄의 끈적끈적함에 매료됐지만 이제는 강하고 질긴 속성을 훨씬 더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거미줄은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훨씬 강하고 질기다. 스피드로인(spidroin)이라는 단백질이 만들어내는 여러 겹의 나노 결정체(nanocrystal) 구조 덕분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초강력 섬유나 수술용 실 등을 제조할 수 있는 인공 거미줄을 만들어내려 노력했는데, 최근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실제 거미줄보다 더 강한 거미줄을 만드는 실험에 성공했다. 스피드로인에 아밀로이드(amyloid)라는 단백질을 합성해 훨씬 길고 강력한 나노 결정 고분자 화합물을 생산해냈다.
나는 거의 20년 전부터 이른바 ‘생체 모방’ 혹은 ‘청색 기술’ 연구에 투자하자고 부르짖었다. 이처럼 자연을 모사하는 연구 분야를 나는 의생학(擬生學)이라 명명하고 이화여대 내 연구실과 국립생태원에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로 신기술을 개발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하지만 의생학 연구는 훨씬 적은 예산으로도 할 수 있어 우리 같은 후발 주자에게 안성맞춤이다.
가방이나 신발에 붙어 있는 찍찍이는 도꼬마리 같은 식물이 씨앗을 동물 털에 붙여 멀리 퍼뜨리기 위해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개발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러나 진화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적의(optimal) 길을 찾을 뿐 반드시 최고의(maximal) 결과로 수렴하는 과정이 아니다. 때로는 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것보다 이번 워싱턴대 연구처럼 원리를 이해하고 개선하면 훨씬 탁월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조선일보(21-11-02)-
________________
과학한국의 첫걸음
'기적의 소나무'서 시작됐다
[미래부, 光復 70년 과학기술 대표 성과 공개]
현신규 박사 '林木 육종' 기술…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등 광복 직후 과학의 싹 틔워
인공위성·휴보·나로호… 최근 눈에 띄는 성과로 꼽혀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핀란드, 스웨덴,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숲이 많은 나라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해진 국토가 반세기 만에 삼림 모범국가가 된 것은 '나무 영웅'으로 불리는 고(故) 현신규(玄信圭·1912~1986) 박사 덕분이다. 현 박사는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있던 1950년대 초 추위에 잘 견디는 리기다 소나무와 재질이 뛰어난 테다 소나무를 교배한 리기테다 소나무를 개발해 산림녹화사업에 기여했다. 이 나무는 '한국에서 온 기적의 수종(樹種)'으로 극찬을 받고 미국 임목육종학 교과서에도 소개됐다.
미래창조과학부는 24일 현신규 박사의 '임목(林木) 육종 성과' 등 광복 이후 지금까지 나온 대표적인 연구성과를 분석해 '광복 70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당시 시대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테면 광복에서부터 1950년대까지는 현신규 박사처럼 개인 차원의 연구성과가 두드러졌다.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로 유명한 공병우(公炳禹·1907~1995) 박사도 대표적이다. 공 박사는 1938년 우리나라 첫 안과 전문병원인 '공안과'를 개업한 안과의사이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나 한글 사랑에 눈을 떴다. 공 박사는 한글 시력표를 처음 만들었으며, 해방 직후엔 자음과 모음, 받침용 자판을 구분한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발명했다. 이 타자기는 빠르고 정확하게 글자를 입력할 수 있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는 과학기술 전담부처와 연구기관이 설립되면서 정부 주도로 농업과 초기 공업화 진흥정책이 추진됐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1898~ 1959) 박사의 마지막 연구성과인 '속이 꽉 찬 김치배추'가 이 시기에 상용화됐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국내 최초 고유모델 자동차인 '포니'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한 '통일벼', 초대형 유조선 등이 대표성과로 선정됐다.
1980~1990년대에는 정보기술(IT) 산업의 연구성과가 쏟아졌다. D램 메모리 반도체, 전전자교환기(TDX), 한글 워드프로세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기술 상용화 등이 대표성과 70선에 포함됐다.
미생물학자 이호왕(李鎬汪) 박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6·25 전쟁 중 병사들이 많이 걸린 유행성 출혈열을 연구해 1976년 발병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한탄강 유역의 들쥐에서 발견해 '한탄바이러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 박사는 1989년 한탄바이러스 예방백신인 '한타박스'도 개발했다.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다양한 과학 분야가 융·복합된 기술이 주목을 받았다. 최근 세계 로봇 대회를 제패한 인간형 로봇 '휴보',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한국 최초의 우주로켓 나로호, 스마트 원자로 등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은 다음 달 28일부터 8월 2일까지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과학창조한국대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장무 대표성과선정위원장(KAIST 이사장)은 "6·25 전쟁 직후 1인당 국민생산 66달러의 최빈국이 세계 13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원동력이 과학기술"이라고 이번 선정의 의미를 강조했다. 미래부는 24일부터 인터넷 사이트(best70.ntis.go.kr)를 통해 대표성과 70선에 대한 국민선호도 조사도 실시할 계획이다.
-이영완 기자, 조선일보(15-06-25)-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時事-萬物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중간선거 결과가 보여준 미국의 회복력] [미국 민주주의의 시험대가 될 중간선거] [다시 트럼프?] (0) | 2022.11.23 |
|---|---|
| [李 측근들 “우리는 개인 비리로 몰아가겠다”] [‘대장동’, 플리바게닝 있었다면 의혹 풀렸을 것] .... (0) | 2022.11.23 |
| [‘나’는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이태원의 ‘정치 무당’, 대장동의 ‘돈 저수지’] [정치가 남긴 사회적 병폐, 국민이 바로잡아야] (4) | 2022.11.22 |
| [‘대한민국 國父’는 두 명이면 안 되나] [국부(國父)] .... (0) | 2022.11.22 |
| [尹, 習에 “경제의 정치화 말라” 요구하라] [中 ‘제로 코로나’ 딜레마] (0) | 202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