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던 문서들]
[서태후]
숨어있던 문서들
로마 제국 지배받던 유대인, 동굴에 구약성경 숨겼다
최근 이집트에서 약 200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와 함께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일부가 적힌 문서가 발견됐어요. 고대 도시 유적에서 발견된 미라를 감싸고 있던 천에 달린 주머니에서 글이 적힌 파피루스 조각이 나온 거예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종이 삼아 기록을 남겼습니다. 내용을 분석한 결과,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출신 등을 기록한 대목인 것으로 확인됐답니다.
이렇게 고대에 만들어져 숨어 있던 문서들은 수백~수천 년 뒤 세상에 나오면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오늘날 연구의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어요. 잊혔던 언어를 해독하게 하기도 하고, 사라진 왕조나 종교의 비밀을 밝혀내기도 했죠.

고대 이집트의 고위 서기관이었던 후네페르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자의 서' 중 일부입니다. 후네페르의 심장이 깃털과 같은 무게인지 저울로 재는 장면이에요.
미라와 함께 묻은 사후 세계 안내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후(死後) 세계를 여행한다고 믿었어요. 이 때문에 사후 세계를 탐색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글이나 그림이 담긴 문서를 무덤 안에 넣었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사자의 서’입니다.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죽은 뒤 저승에서 무사히 살아남도록 돕기 위해 만든 일종의 사후 세계 안내서예요. 파피루스에 주문, 기도문 등을 적어 미라와 함께 무덤에 넣었죠. 사자의 서는 하나의 정해진 책이라기보다,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주문과 그림을 모아 만든 장례용 문서 모음에 가까워요.
사자의 서 중 대표적인 것은 사람이 죽으면 받게 되는 저승에서의 심판 과정이 묘사된 것입니다. 우선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깃털의 무게와 비교합니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악한 행위가 심장에 짐처럼 쌓여 있다는 의미라고 해요. 반대로 심장이 깃털과 균형을 이루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에게 잡아먹혀 영혼이 사라진다고 믿었답니다.

구약 성경 중 시편 내용을 담은 사해 문서랍니다.

사해 문서가 담겨 있던 항아리예요. 요르단 수도인 암만의 요르단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동굴 속에 꽁꽁 숨긴 구약 성경
가장 오래된 구약 성경 사본(원본을 베낀 책)이 포함된 ‘사해 문서’는 1947년 아랍 유목민 베두인족 청년이 도망친 염소를 찾다가 발견했어요. 그는 아라비아반도 북서쪽에 있는 사해(死海) 인근 평원인 쿰란에서 한 동굴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동굴 안쪽에 돌을 던졌는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대요. 그렇게 동굴에 놓인 항아리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 항아리들 안에서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와 양의 가죽을 종이처럼 사용한 양피지, 동판 등 총 700점이 넘는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여기에는 기원전 3세기쯤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구약 성경과 과거 유대교인들의 경전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와 1세기쯤 유대인이 사용한 언어인 아람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고대 언어로 쓰여 있었죠. 사해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히브리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성경은 이스라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민수기 6장 조각 사본이었어요. 이 사본 자체는 7세기 후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죠. 사해 문서가 발견되면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 제작 시기가 1000년이나 앞당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서들이 왜 동굴에 감춰져 있었을까요? 기원후 70년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대항해 벌인 반란 중 이 문서들을 보호하려고 동굴 속에 숨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황제를 신처럼 떠받드는 로마의 통치 방식에도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어요. 로마 제국의 황제는 유대인의 마지막 보루였던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들어가 유대인을 학살했어요. 적의 손에 넘어가면 불태워질 것이 분명한 소중한 문서들을 외딴 절벽 동굴에 숨겨둔 것이었죠.
현재 사해 문서들은 예루살렘의 ‘책의 성소’에 보관돼 있어요. 전시관은 사해 문서가 발견된 항아리의 뚜껑을 형상화했대요. 최근 사해 문서 중 가장 긴 이사야 문서를 인공지능이 분석했는데, 두 명의 서기가 거의 동일한 필체를 사용해 필사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사해 문서 연구는 기술 발전과 맞물려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책의 성소. 사해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사해 문서가 담긴 항아리 뚜껑을 형상화해 지었어요./중국 후난성 창사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죽백 문헌의 일부입니다. 도교 사상 관련 내용이 비단 위에 먹으로 적혀 있어요. /위키피디아
가족 공동묘에서 발견된 미라와 죽백 문헌
1971년 중국 후난성 창사의 ‘마왕퇴(馬王堆)’라고 불리는 언덕에서도 엄청난 발견이 있었어요. 당시 군인들이 지하 시설을 짓기 위해 언덕에 있는 무덤을 파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딱딱한 진흙 더미가 발견됐어요. 이를 뚫고 들어가자 갑자기 무덤에서 청백색 가스가 분출됐대요. 그 아래 중요한 무언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죠.
이후 중국 고고학자들은 대대적 발굴을 시작했어요. 당시 마왕퇴는 당나라가 무너진 907년 이후 세워진 오대 십국 중 초나라의 왕 마은과 그의 아들 마희범 부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무덤 3기와 부장품 약 3000점이 발견되면서, 이 무덤들이 전한 시대 초기 이 지역을 다스리던 관료였던 이창과 그 부인 신추, 그리고 30세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이 함께 묻힌 가족 공동묘라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이 무덤은 마왕퇴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마왕퇴 한묘’라고 불립니다.
마왕퇴 한묘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잘 보존된 신추 부인의 미라와 엄청난 양의 문자 자료예요. 먼저 신추 미라는 죽었을 때 상태 거의 그대로 발견됐습니다. 약 50세 정도로 키는 154㎝였는데 피부의 땀구멍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죠. 신추 부인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이 참외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고 해요.
또 12만 자에 달하는 문자 자료가 발견됐어요. 문자는 ‘죽간’이라고 하는 대나무 조각이나 ‘백’이라고 하는 비단에 적혀 있었죠. 그래서 이를 ‘죽백 문헌’이라고 불러요. 특히 중국 사상사의 핵심 고전인 ‘노자도덕경’과 ‘주역’의 매우 오래된 필사본이 포함되면서 학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어요. 마왕퇴에서 나온 문서는 중국 고대 문화·사상·역사·의학·정치 등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여겨집니다.
-정세정 옥길새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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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청나라 빚 다 갚을 보석 가졌던 서태후의 일생일대 실수
지난 7월 중순, 중국 청동릉(?東陵)에 있는 서태후(자희태후·1835~1908) 무덤을 답사했다. 청동릉은 베이징 동북쪽 100㎞ 거리에 있는 청나라 황족들의 떼무덤이다. 서태후는 48년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서태후의 무덤을 답사한 것은 그녀가 보석과 풍수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보인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32세 때인 1866년 서태후는 자신의 무덤 자리를 찾을 것을 명한다. 이듬해 자리가 정해지고 이에 대한 풍수 보고서가 제출된다. 그 가운데 '산세존엄(山勢尊嚴) 금성원정(金星圓頂) 결성돌혈(結成突穴)'이란 열두 글자가 핵심이다. '산세존엄'에서 존엄이란 북한 최고 통치자를 존엄이라 표현함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될 것이다. 금성이란 오행(五行) 가운데 쇠[金]를 의미한다. 쇠처럼 강한 지도자이면서도 그 덕성은 원만하고 후덕하다는 '금성원정'이다. '결성돌혈(結成突穴·돌혈을 이루었다)'에서 돌혈이란 혈처(穴處·무덤이 들어설 곳)의 모습을 말한다. 지맥이 푹 꺼졌다가 치솟아 오르면서 마치 용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 즉 비룡승천(飛龍升天)을 뜻한다.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태후 신분이되 황제로 군림하겠다는 의도이다. 서태후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해주는 땅이다. 보고서를 본 그녀는 현장에 직접 가보고 "만년 동안 지속될 길지(만년길양·萬年吉壤)"라며 좋아한다. 이후 190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그녀의 지하 궁궐이 조성된다.
그런데 서태후의 무덤과 보석은 무슨 관계일까? 그녀의 보석 사랑은 동서고금 그 어떤 황후보다도 집요했다. 생전에 모은 보석 모두를 무덤으로 가져갔다. 이성무(李成武)가 남긴 '서태후 무덤에 묻은 보석 목록(자희장보도기·慈禧葬寶圖記)'이 종류·수량·가격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청나라가 지고 있던 빚을 다 갚고도 남을 가치였다.
그녀가 이렇게 풍수와 보석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보석과 풍수의 기운을 통해 영원히 썩지 않는 사후의 삶, 즉 영생(永生)을 얻고자 함이다. 보석 가운데 최고는 야광주(夜光珠)였다. 밤에도 스스로 빛을 내는데, 더위와 추위를 잊게 하며 죽은 자가 입에 물고 있으면 시신이 영원히 썩지 않는다고 한다. 소원대로 죽은 그녀의 입에 야광주가 넣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1928년) 군자금이 필요했던 군단장 손전영이 이곳을 도굴한다. 야광주를 빼내기 위해 서태후의 입을 찢었다(얼마 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에게 전해졌으나 이후 야광주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심지어 음부에 넣었던 보석들도 군인들로 하여금 모두 빼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군인들에게 시간(屍姦·시체 강간)을 당했다는 치욕적인 오명을 뒤집어쓴다.
천년 동안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보석들로 치장되어 만년 동안 영속될 길지에 안장된 그녀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권력자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자가 되려면 도굴을 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도굴의 역사는 길며, 도굴을 위한 전문 기술이 발달했다.
서태후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언젠가 그 대비책을 물었다. 시종이 "능침을 영원히 보전하려면 부장품을 적게 넣는 박장(薄葬)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뢴다. 대청제국이 영속할 것이라 확신한 그녀는 "박장을 한 채 지하 궁궐로 간다면 대청제국의 체통이 서지 않을 것"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은 그녀가 죽은 지 3년 뒤인 1911년 사라진다. 권력에 취해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풍수와 보석만 믿었던 통치자가 사후에 겪을 예정된 운명이었다.
-김두규 ·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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