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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구호에 담긴 거짓] .... [부시 대통령, 덩샤오핑에게.. ]

뚝섬 2025. 9. 12. 07:01

[정치 구호에 담긴 거짓]

[전승절 날짜]

[중국·러시아 눈치 보는 ‘글로벌 중추 국가’]

[부시 대통령, 덩샤오핑에게 "관료의 손에 맡겨놔선 안됩니다"]

 

 

 

정치 구호에 담긴 거짓 

 

중국 당국이 금서(禁書)로 다루는 책은 아주 많다. 그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묘비(墓碑)’다. 부동의 스테디셀러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중국을 다룬 도서다. 집권 공산당은 당시 급진적 좌경 실험을 강행했다.

 

집단 소유를 골간으로 삼는 인민공사제(人民公社制) 등 과격한 제도 도입과 영국·미국을 넘어서자는 무모한 경제 실험을 가동했다. 곡물 생산량을 왜곡하는 관료주의가 식량 위기를 불렀고, 지역 폭동까지 번지면서 사망자가 급증했다.

 

책의 추계로는 굶주림과 그로 인한 비(非)정상적인 이유로 1958년 중국 인구 6억6000만명 중 약 3600만명이 죽었다. 인류 역사에 다시 없을 참혹한 상황이었으나 중국은 이 기간을 아직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라고 부른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공산당이 벌인 극좌적 실험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역시 같은 맥락의 호칭이다. 홍위병을 동원한 극한의 이념 투쟁으로 광기(狂氣)가 번져 지식인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뒤 현 집권 공산당이 벌였다는 항일(抗日)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일본을 이겼다며 9월 3일을 ‘승리일(勝利日)’로 정해 얼마 전 행사를 벌였지만 정작 일본과 싸운 쪽은 그때 중국을 지배했던 국민당(國民黨)이다.

 

공산당은 당시 “힘의 7할은 역량 발전, 2할은 국민당 상대, 1할은 항일에 쓰라”는 작전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이 여럿이다. 국민당이 300만 병력을 희생해 일본과 싸우는 동안 자신들은 뒤에 숨어 몰래 힘을 키웠다는 얘기다.

 

‘대약진’ ‘문화대혁명’ ‘항일’ 등 수많은 거짓의 정치 구호가 사람을 세뇌시키는 중국이다. 외부에서 유래한 공산주의 이념이 지배하고, 국민은 복종하고, 일당 독재만 있어 국호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중화’ ‘인민’ ‘공화’마저 다 위선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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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절 날짜

 

중국 후난성 즈장(芷江)현에는 ‘항일 전쟁 승전 기념관’이 있다. 1945년 8월 21일 중국군이 일제 침략군의 첫 항복문서를 받아낸 장소다. 당시 항일 전쟁을 이끌던 국민당은 최후 격전지였던 즈장으로 일본군 부총참모장을 불러내 군 배치도 등을 넘겨받았다. 국민당 장제스 사령관은 1946년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모양이 ‘혈(血)’ 자였다. 중국의 피로 얻어낸 승리라는 뜻이다. 중국 주둔 일본군의 공식 항복은 9월 9일이었다. 천황이 8월 15일 항복했지만 그 후에도 중국 전역에선 소규모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과 서유럽이 2차 대전 승전일로 삼는 것은 5월 8일이다. 독일이 프랑스에서 서명한 항복문서가 효력을 발휘한 날이다. 그런데 스탈린은 소련이 빠졌다며 베를린에서 독일의 항복문서를 다시 받았다. 그래서 러시아 승전일은 5월 9일이 됐다. 이탈리아 해방의 날은 4월 25일이다. 이탈리아 국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와 나치 세력을 제압한 날이라고 한다. 1차 대전은 참전국이 한날한시에 전쟁을 멈췄지만 2차 대전은 나라별로 복잡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 승전일은 당연히 다르다. 일본을 패망시킨 것은 전적으로 미국이다. 그 덕에 우리가 해방됐고 중국도 승전국이 됐다. 미국이 없었으면 중국을 일본이 석권했을 수도 있다. 승전의 주역 미국이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은 날은 1945년 9월 2일이다. 도쿄만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한 날이다. 미국의 맥아더·니미츠 장군 외에 중국·영국·소련·호주·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뉴질랜드 등 9국 대표가 항복을 받았다. 그래서 미·영·소 등의 태평양전쟁 승전일은 9월 2일이다. 중국 장제스는 이튿날인 9월 3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고 경축 국기를 내걸었다. 이듬해 9월 3일을 ‘항일 승리 기념일(전승절)’로 공식 지정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을 전승절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1951년 “전승절을 9월 3일로 통일하라”고 했다. 중국이 승전국 대열에 있던 날짜와 의미를 가져오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군과 주로 싸운 것은 국민당군이었고 공산군은 전력 보전에 주력했다. 그 때문인지 공산당은 10여 년 전까지 전승절 날짜를 강조하지 않았다.

 

▶9월 3일 전승절을 다시 꺼낸 건 시진핑이다. 2015년엔 70주년 열병식도 열었다. 당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쳤다’고 하더니 이번엔 ‘공산당이 승리를 주도했다’고 한다. 땅속의 장제스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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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러시아 눈치 보는 ‘글로벌 중추 국가’

 

대만 총통 취임식은 외면하고 푸틴 취임식엔 참석한 정부
자유민주 진영과 계속 엇박자… 중·러 환심 사도 결국엔 毒 될 것
 

 

지난 19일 라이칭더 대만 신임 총통이 취임식 대표단 환영 리셉션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틀 전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 취임식에 한국 정부는 경축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폼페이오, 아미티지 등 전직 장·차관으로 사절단을 꾸린 미국을 비롯해 호주, 캐나다, 일본, 유럽연합 등 서방 전체가 고위급 대표단을 타이베이에 보냈다. 총 51국이었다. 대만 전체 수교국(12국)의 4배가 넘는다. 이들은 별도의 축하 메시지도 냈다. 서울에선 아무 메시지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는 외국 정상 취임식에 어김없이 경축 특사단을 파견했다. 출범 첫해 필리핀을 시작으로 콜롬비아, 케냐, 브라질, 나이지리아, 파라과이에 이어 지난 1월엔 과테말라에 사절단을 보냈다. 권성동, 정진석, 원희룡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단장을 맡았다. 지구 반대편의 경조사까지 살뜰히 챙겨 온 정부가 가장 가까이 있는 6위 교역국의 경사는 외면했다. 외교부는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해온대로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만은 윤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대만은 1949년 1월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국가로 승인하고 수교했다. 북한이 남침한 건 이듬해 6월이다. 유엔 안보리는 즉각 유엔군 한국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대만), 소련이었다. 소련이 표결에 불참한 것도 천운이지만 대만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거 인연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만은 한국과 자유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다. 외교 용어로 ‘유사 입장국’(like-minded group)이다. 이런 나라들이 50개쯤 된다. 익숙한 말로 ‘자유민주 진영’이다. 이들이 대만 총통 취임식에 대표단을 보냈다. 한국만 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대만은 섭섭하고 유사 입장국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작년과 재작년 유엔 총회 제3위원회에서 신장·위구르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성명이 나왔을 때가 연상된다. 그때도 동참한 나라가 50~51개였고 한국만 발을 뺐다. 모두 이번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반복되고 있다. 2주 전 모스크바에선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취임식이 열렸다. 크렘린궁은 각국 대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자유 민주 진영, 즉 유사 입장국 대부분은 취임식을 보이콧했다. 이웃국가를 침략하고 정적을 제거한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자축하는 자리라고 봤다.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연대의 의미도 담았다. 한국 정부 생각은 달랐다.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를 참석시켰다. 프랑스 대사도 함께라 민망함은 좀 덜했을지 모르겠다.

 

임기 초반의 단선적 외교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런 것이면 다행이겠다. 대만 총통 취임식 1주일 전 베이징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다. 중국은 “대만 문제를 신중히 처리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중국을 설득해 이달 안에 한중일 정상회의를 성사시켜야 하는 정부로선 흘려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구금했다. 중국을 겁내는 공중증(恐中症)과 ‘러시아 포비아’는 한국 외교의 고질병이다.

 

권위주의 정권을 상대할 때 중요한 건 유사 입장국의 단합된 언행이다. 한국은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이자 ‘글로벌 중추국가’를 자처하는 나라다. 안보리를 능멸한 푸틴 대관식에서 손뼉치고 대만 총통 취임식을 모른 척 해선 곤란하다. 당장 중국·러시아의 환심을 살 순 있겠지만 결국엔 우리 외교에 독(毒)이 될 것이다. 9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톈안먼 망루에 올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봤다. 자유민주 진영 전체가 보이콧한 행사였다. 중국의 화답은 무자비한 사드 보복이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외교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용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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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 덩샤오핑에게 "관료의 손에 맡겨놔선 안됩니다"

 

20여년 전 천안문 사태 직후 미·중 관계 최악의 위기 맞자 

부시 대통령은 덩샤오핑에게 '진정한 오랜 친구' 자처하는 비밀 서한 보내 막힌 관계 풀어 

한·중도 頂上들이 나서야 할 때 

 

'무거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권력자 덩샤오핑(
鄧小平)에게 보낸 1989년 6월20일자(字)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외부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극비 서한이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미·중 관계는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발단은 그해 6월 4일에 발생한 천안문 사태였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 정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를 유혈(流血) 진압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초강도 제재 조치를 꺼내 들었다. 여기에는 정부 고위급 접촉 금지, 군사 교류 중단, 무기 및 기술 수출 금지, 각종 교류 중단 등 전례 없이 강력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이 제재 조치를 최종 승인한 게 바로 부시 대통령이었다.

부시는 '중국통'이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정식 외교 관계를 맺기 전인 1973~74년 베이징 주재 미국 연락사무소 대표를 지냈다. 연방 하원 의원에 유엔 대사까지 지낸 부시가 정식 대사(
大使)도 아닌 '연락사무소 대표'를 선뜻 맡았던 것이다. 부시가 베이징에 머물던 시절 즐겨 찾았던 '북경 오리 요리(Peking Duck)' 집은 훗날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가게를 열었고, 이곳엔 부시 대통령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그런 부시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제재의 칼을 뽑아들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탱크까지 동원한 중국 군(
軍)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하자 전 세계가 경악했다. 무엇보다 미국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에선 덩샤오핑 등을 '도살자(butcher)'라고 부르는 거친 표현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가 덩샤오핑에게 비밀 서한을 보낸 것이다. 부시는 덩샤오핑과 직접 통화하길 원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부시는 편지에서 자신을 '중국의 진정한 라오펑유(
老朋友·오랜 친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간 덩샤오핑과 쌓아온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신뢰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제도상 (천안문 사태) 제재는 불가피하지만 양국 관계 유지에 대한 우리의 의지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부시의 편지'를 새삼 떠올린 것은 심상치 않은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한·중 관계 때문이다. 지난 한 달여 한국과 중국 사이에 오간 말만 놓고 보면 두 나라는 당장 절연(
絶緣)이라도 할 듯한 기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한국도, 중국도 잘 알고 있다. 필자는 1992년 8월 베이징에서 한·중이 수교(修交) 문서에 서명하는 현장을 취재했었다. 24년 전 사실상 제로(0)에서 출발한 한·중 관계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일궈냈다. 한국에 중국은 최대 시장이고, 중국에도 한국은 네 번째로 큰 수출 시장이다. 중국이 원·부자재와 소재·중간재를 사들이는 최대 수입국이 한국이다. 한쪽만 일방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혜택을 나눠갖는 호혜적 관계라는 뜻이다.

중국이 문제 삼고 있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는 이런 한·중 관계를 무너뜨릴 만한 사안이 못된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전략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들여오는 사드 1개 포대(총 6기, 48발의 미사일)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 나라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은 결국 외교(
外交)의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다.

27년 전 부시의 편지는 덩샤오핑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속에 담긴 부시의 진심을 읽은 중국이 막후 외교 채널을 재가동하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중국 같은 정치 체제에선 권력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진핑 주석은 전임 주석들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오죽하면 '시 황제(emperor)'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시 주석과 누구보다 돈독한 사이다. 이 정부 출범 후 한·중 관계의 축은 두 정상 간의 '우정'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작년 9월 주변의 반대와 우려를 뿌리치고 베이징 전승절 열병식에서 천안문 망루(
望樓)에 오른 것도 시 주석에 대한 배려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부시가 '이 문제(미·중 관계)는 관료들의 손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도 중요하다'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한 것은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지금의 한·중 관계도 그렇다.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 발표 열흘 전쯤 베이징을 찾은 황교안 총리는 시 주석과 리커창(
李克强) 총리를 모두 만났다. 중국이 나름 예우를 한 셈이다. 그러나 황 총리는 사드와 관련한 어떤 귀띔도 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대신 사드 발표 직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주한 중국 대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고 한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것일 뿐 한·중 간에는 바깥으로 알려진 것보다는 더 내밀하고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가고 있기를 바란다. 위기의 한·중 관계를 수습할 책임은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의 몫이다.

 

-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조선일보(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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