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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연방의 군주] [英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 [백년전쟁]

뚝섬 2022. 9. 13. 06:37

[英연방의 군주] 

[英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 

[백년전쟁]

 

 

 

英연방의 군주 

 

1961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영연방을 벗어나 소련에 다가가는 가나를 방문했다. 여왕은 은크루마 대통령에게 댄스를 제의했고, 과거 군주와 신민이었던 두 사람의 댄스는 세계의 화제가 됐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한국인의 시각에서 영국과 옛 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된 ‘영연방(英聯邦)’의 존재는 이해하기 어렵다. 자존심이 있다면 식민지 잔재를 하나라도 더 지워버려야 정상 아닌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아픈 기억이 없을 리 없다. 인종차별은 기본이고 인도와 케냐처럼 학살을 겪은 나라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옛 식민지가 독립 후에도 연방을 유지하면서 우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모잠비크나 르완다처럼 영국이 아닌 다른 제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도 스스로 영연방에 들어왔다.

 

한국·일본·중국에서 편의상 부르는영연방 사실 잘못된 명칭이다. 공식 이름(국가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서 ‘영국(British)’을 삭제한 지 오래다. 동아시아 연방국인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선 ‘공화 연방’이라고 부른다. 식민지 독립 후 연방 유지를 위해 지배국의 색채를 최대한 뺀 결과인데 국왕에 대해선 좀 달랐다. 영국 국왕은 여전히 연방의 원수다. 56개 연방국 중 식민지 역사의 맥락이 다른 캐나다·호주·뉴질랜드와 카리브해 국가 등 14개 나라는 지금도 영국 국왕을 자국의 왕으로 섬긴다.

 

▶영연방과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1961년 아프리카 가나 방문 때의 사진이다. 서른다섯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나의 초대 대통령과 얼싸안고 춤을 추고 있다. 흑백의 대조가 선명하다. 16년 전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아버지 조지 6세는 식민 당국의 인종차별 때문에 백인하고만 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순방에 동행한 엘리자베스는영국과 영연방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 했다. 영국은 여왕의 방문에 힘입어 독립 직후 소련으로 기울던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을 연방에 묶어뒀다.

 

▶물론 이익이 뒷받침한 이유가 컸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쇠락하고 있었으나 유럽 최대 공업국이었고 세계 무역의 10% 가까이 차지했다. 갓 독립한 나라들은 연방국에 부여된 무역, 이주, 노동 등 특권이 필요했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처럼 신흥 패권국인 미국의 전폭적이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종주국 영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1973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들어가면서 특권을 폐지했을 가입국이영국이 우리를 버렸다 아우성친 것도 때문이다. 영국 왕실의 구심력이 없었다면 특권이 사라진 이후 연방은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선량한 식민 지배란 없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던 영국이야말로 미국, 아프리카, 중국 등 세계 전역에서 수백년 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영국은 식민 지배의 역사가 수십년에 불과한 일본보다도 피지배 국가들로부터 비난받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제국 영국이 이식한 크리켓을 국민 스포츠로 즐긴다. 몇몇 나라 국민은 영국 국왕의 얼굴이 실린 지폐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영국이란 나라의 그릇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그 그릇을 키운 존재가 여왕 엘리자베스 2세였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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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5)이 6일 즉위 70주년을 맞는다. 영국 역사상 최장 기록이자, 유일한 재위 70년 군주다. 영국 정부는 4일(현지 시각) 이를 축하하는 기념우표<사진>를 내놨다. 8장이 한 세트로, 195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주요 장면을 10년마다 한 장씩 담았다. 군복과 파티복, 일상 외출복까지 여왕의 다채로운 패션을 보여주는 구성이다. 85펜스(약 1380원)짜리 기본 우표 4장과 1.7파운드짜리 4장으로 이뤄져 있다.

 

여왕은 1952년 2월 6일, 25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조지 6세가 이날 새벽 갑자기 서거하며 갑작스레 물려받은 왕위였다. AFP 통신은 “엘리자베스 2세는 2차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 쇠퇴와 함께 나타난 급속한 사회·정치적 변화 속에도 왕실의 권위와 지위를 지켜냈다”“명실공히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여왕은 70년간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현 보리스 존슨 총리까지 총 14명의 총리를 겪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남편 필립 공과 사이에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 앤드루·에드워드 왕자 등 3남 1녀를 뒀다.

 

여왕의 70년 재위 기록은 세계사에서도 드문 기록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전까지 영국 최장수 군주는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으로,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만 63년간 통치했다. 재위 기간이 70년 이상이었던 군주는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1643~1715년)과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1946~2016년), 요한 2세 리히텐슈타인 대공(1858~1929년) 등 3명뿐이다.

 

즉위 70주년 당일에는 특별한 공개 행사가 열리지 않고, 여왕이 현재 머물고 있는 샌드링엄 별장이나 런던 버킹엄 궁에서 간단한 왕실 내 행사를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오는 6월 2일부터 5일까지 공식 축하 행사를 연다”고 밝혔다. 6월 2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대규모 열병식이 열릴 계획이다. 6월 3일에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 대한 여왕의 헌신을 기리는 기념 예배가, 6월 5일에는 런던과 콘월에서 수천명이 참여하는 오찬회가 예정돼 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조선일보(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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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16년... 그들은 무엇을 위해 오랜 시간 싸웠을까

중세 유럽, 봉건제도로 약했던 왕권
'노르만 정복'으로 갈등 생겨나며 프랑스·영국 간 영토 싸움 시작돼
휴전·전쟁 지속하며 싸운 '백년전쟁'… 많은 희생 있었지만 왕권은 강해져
 

 

바다를 사이에 놓고 마주 선 영국과 프랑스가 난민 문제로 요즘 떠들썩해요. 세계 각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영국행을 택한 난민들이 브리티시 드림(British Dream)의 꿈을 안고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로 모여들고 있어요. 칼레는 영국의 포크스톤까지 해저로 연결된 유로터널이 시작되는 곳이고, 도버까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에서 영국에 밀입국하려는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터널로 진입하거나 화물차에 몸을 숨기고, 혹은 밀항을 하고 있어요. 칼레가 난민촌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유로터널 관리를 두고 날 선 공방도 계속되고 있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영불해협은 직선거리 약 34㎞로 그 거리가 좁기 때문에 숙명처럼 많은 전쟁에 휘말려야만 했어요. 오늘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백년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해요.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담은 그림. /위키피디아 

 

봉건제도가 한창이던 중세 유럽에서 왕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귀족)에게 봉토(땅)를 주어 다스렸지요. 여러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여러 지역의 땅을 봉토로 받을 수도 있었죠. 당연히 왕권은 약했고, 오늘날과 같은 국가나 국민의 개념은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어요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이 바다 건너 잉글랜드(오늘날의 영국)를 점령하고는 영국의 왕이 되는 역사적인 일이 발생했어요. 노르만 정복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윌리엄1세는 영국의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귀족이라는 이중 신분을 갖게 되었죠.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 갈등의 씨앗이 되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왕의 땅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신이 귀족의 위치에 있으니 권력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반대로 프랑스 왕은 영국 왕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것이 숙원 사업이 되었고요결국 이 갈등은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전쟁으로 폭발했어요. 프랑스의 왕위가 4촌 형제였던 필리프(필립) 6세에게 넘어가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반박하고 나선 거예요. "내 어머니는 샤를 4세의 누이였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 후보자는 조카인 나다." 게다가 영국과 손잡고 모직물 공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플랑드르 지역의 상인들이 앞장서서 영국을 지원했죠. 프랑스 땅이지만 영국을 응원할 만큼 당시에는 국가나 영토의 개념이 부족했던 거예요. 1337년 시작된 전쟁은 자그마치 116년간 지속하다가 1453년에야 끝났어요. 사람들은 긴 전쟁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이라 부른답니다. 겉보기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일어난 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은 플랑드르를 비롯한 땅을 차지하려는 전쟁이었죠.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랭스 대성당(사진 왼쪽), 프랑스 카페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한 샤를 4세(사진 오른쪽). /위키피디아 

 

전쟁은 처음에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했어요. 영국군은 갑옷을 뚫을 만큼 놀라운 위력을 지닌 석궁으로 무장했죠. 영불해협 건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칼레를 포위하고 공격했어요. 칼레의 시민은 1년 동안 결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1347년 항복하고 말았어요. 이때 에드워드 3세는 시민을 살려주는 대신 그동안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고 했어요. 누가 감히 죽음 앞에 선뜻 나설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가 시민의 대표로 죽음을 택하겠소!" 하며 용기 있게 외친 사람이 있었어요. 칼레에서 가장 큰 부자였던 생 피에르였죠. 그의 뒤를 따라 시장, 상인, 법률가, 귀족 등이 나섰다고 해요. 놀라운 희생정신이죠. 다행히 임신한 에드워드 3세 왕비의 간청으로 사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로댕의 조각으로 다시 살아난 이들의 이야기는 칼레 시청 앞 광장에서 이기적인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리고 있죠. 이렇게 사회적으로 고귀한 위치에 있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요.

칼레가 함락되고 나서도 영국의 승리가 이어졌어요. 1356년에는 프랑스 왕이었던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치욕을 당했죠. 결국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이 맺어지면서 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영국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대신에 이때부터 칼레를 새로운 영토로 얻었죠. 이후에 전쟁은 페스트, 농민반란 등을 겪으면서 휴전했다가 다시 싸우기를 반복해요. 이 전쟁이 만약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전쟁 말미에 신의 부르심을 받고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의 활약 덕분에 프랑스는 승리할 수 있었어요.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영토를 회복했어요. 다른 나라와 영토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국가의 개념도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단 한 곳, 칼레만이 예외였지요. 이후에도 칼레는 영국의 영토로 남아 2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답니다. 

 

영국은 대륙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섬나라로서의 인식을 강화했죠. 뜻밖에도 서로 다투고 미워하다가 영국인, 프랑스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생겨났어요. 전쟁 중 많은 귀족이 사망하면서 왕권이 강해져서 근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전쟁 중 세금을 걷는 권리를 얻은 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며 강력한 권력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어요. 백년전쟁은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와 국민을 만들어준 전쟁이 되었죠

 

-공미라·세계사 저술가, 조선닷컴(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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